피아노나 다른 악기, 음악에는 어릴 때부터 큰 재능과 흥미가 없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알았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우면서도 연습 횟수를 표시하는 이 동그마리를 얼른 채우고 학원 밖으로 나가는 생각만 하던 아이였다. 그래도 계속했다. 엄마에게 나는 이것을 더 이상 배우지 않겠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야기를 했는데도 엄마가 계속 시킨 것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 기억에 사교육이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에 피아노는 유치원~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필수로 배우던 악기였고, 3~4학년이 되면서 차츰 피아노를 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졌던 것 같다.
내가 다니던 오래된 건물 3층에 있던 피아노 학원이 문을 닫았다. 그 무렵 나는 체르니 40 정도를 진도로 배우고 있었던 것 같고, 교회 반주도 함께 배우고 있었다. 엄마의 꿈...이랄까 목표랄까... 여하튼 그것은 내가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는 것이었고 내가 5학년이 되던 해부터 코드를 배우고 반주를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피아노 학원이 문을 닫게 되었는데 엄마는 나를 잘 가르쳐주시던 피아노 학원 선생님을 우리 집으로 모셔와서 개인 강습을 받게 했다. 그러니까 피아노 과외를 받게 한 것이다.
나는 반지하인 줄도 몰랐지만 반지하였던 그 집에서 나는 피아노 과외를 받았다. 방이 두 칸이었던 그 좁은 집에 누군가가 준 피아노도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을 선생님에게 교회 반주를 배웠다. 배우면서도 하기 싫다고 계속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시절 사춘기였다. 친구들과 몰려다니고 밖에서 만나고 싶어 하던 초등학생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았고 친구들이 다 어디 가는데 나 혼자 피아노 레슨을 받아야 하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러다 나는 어느 날, 레슨이 있는 시간에 가지 않았다. 핸드폰이란 것이 거의 없던 시절.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선생님과의 레슨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가지 않았다. 수업에 가지 않고 어디서 무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친구들이랑 몰려다니며 떡볶이나 먹었을 테다. 선생님은 집에서 계속 기다렸고, 맞벌이로 직장에 있었던 엄마와 연락을 하고 전했을 것이다. 친구들과 있으면서 마음 한 켠이 불편했던 느낌이 기억난다. 그날 저녁에 엄마에게 정말 무섭게 혼났다. 약속이 무엇인지,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믿음이란 게 무엇인지 알 리가 없는 아이였다. 엄마에게 혼나는 게 싫고 억울하다는 생각만 했다. 나는 놀고 싶은데!!!
그 이후에도 나는 피아노를 계속 배우다가 얼마 안 가 그만두었다. 내가 그만둔 것인지, 선생님이 그만둔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가끔씩 어떤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그날을 떠올린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모르는 사람들 투성인 곳에 가야 할 때, 너무 중요한 일이 몰려올 때, 영어로 미팅해야 할 때, 나에게 적대적인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해야 할 때...
"나는 어른이지. 책임감 있는 어른이지." 피아노 레슨이 싫어서 도망치고 엄마한테 혼나고서도 정신 못 차리던 꼬마가 시간과 약속에 강박을 느끼고 해야 할 일을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는 어른으로 자랐다. 작은 방의 피아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선생님의 마음을 이제는 헤아릴 수 있다. 나에게 기대를 하는 어떤 것을 해내려고 최선의 노력을 한다. 불확실성을 못 견디는 성격만큼 다른 누군가에게도 나라는 사람 자체가 불확실한 어떤 것으로 취급받지 않기 위해 명확하게 행동하려고 한다.
문득 이날의 기억이 또 떠오른 이유는 지금 다 외면하고 도망하고 싶기 때문이다. 언제 끝날 것인지 알 수 없는 답답함,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쓸 모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무력함, 다들 앞서 가는데 뒤쳐져도 한참 뒤처진 데서 오는 조바심. 이런 마음들이 매일매일 뒤엉켜 지금 이 상황을 회피하고 그저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다시 한번 되뇌인다.
나는 어른이지. 책임감 있는 어른이지. 헤쳐나가야지. 해야지. 해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