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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

by Swimmer in the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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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 년 전에, 대학생 시절 부모님은 없는 살림을 탈탈 털어 나의 캐나다 어학연수를 지원해 주셨다. 정말로 없는 살림이었으므로 부모님이 어떤 마음으로 나를 보냈는지를 잘 알았고, 미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눈을 딱 감고 토론토로 떠났다.


토론토에서의 생활은 평화로웠다. 엄마 아빠가 보내준 생활비로 나는 좋은 홈스테이에서 여유롭게 지냈고, 어학원 생활도 잘 적응해 나갔다. 저녁마다 파티를 하거나 모임을 가지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나는 잘 어울리지 못했고, 가끔 한국인 친구들이랑 식사를 하거나, 주로 집(한국인 홈스테이)에 돌아와서 동네 산책하고 교회 가고 그랬다. 그래도 어학원에는 한국인이 꽤 많았는데, 사실 한국인은 어딜 가도 많았지만, 어학원 규칙상 영어로 대화를 해야 하지만 그 안에도 정감이 있었지. 한국인끼리만 통하는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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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라는 영어이름을 쓰는 한국인이 있었다.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민지와 소피아와 함께 점심을 먹었던 사이였다. 나이는 나보다 어렸던고 똑 부러지고 영어도 잘하는 아이였다. 점심을 같이 먹었던 것 같기는 한데 그닥 친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소피아가 친구들 무리로 오더니 전날 있었던 일을 말했다. 자기의 가방에 있던 돈을 잃어버렸다고, 소지품도 함께 도둑맞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걱정을 했지. 어머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조금 이상한 거다. 그 아이가 돈과 소지품을 잃어버렸다고, 본인은 '이때' 누군가가 훔쳐갔을 거라고 얘기하는 그 시간에, 그 강의실에 내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면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얘기를 하는 거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걱정을 하다가, 뭔가 이상하게 흘러감을 감지하고, "아 그때 내가 있었는데?"라고 얘기를 했더니 내 눈을 더 똑바로 보았다.


나는 마침 그때 엄마가 한국에서 사서 보내준 새 가방과 새 모자를 쓰고 온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둘이 있을 때 또 그 큰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난 널 믿어'라고 했다. 그때부터였다. 평화롭고 고요했던 나의 연수생활이 괴로워진 것은.


너, 내 돈이랑 물건 훔쳐갔지?라고 나에게 대놓고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나도 딱 잘라서 얘기하고 무시했을 텐데 (과연 이렇게 똑 부러지게 말했을지는 의문이지만) '너가 훔쳐간 것 다 알고 있어'라는 온갖 제스처로, 뉘앙스로 나를 몰아세워 놓고 물어보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해명할 수는 없고.


가만있다가도 그 생각만 하면 속이 갑갑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 같았다. 사람들이 나를 도둑으로 생각할 것 같았다. 소피아는 나를 점점 멀리했고, 나는 소피아와 멀어지는 것은 전혀 아쉽지는 않은데 내가 그런 취급을 당한다는 것이 너무 억울했다. 그러면서도 조마조마했다. 여기에서 내가 도둑누명을 쓰고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봐. 엄마에게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멀리 있는 엄마가 걱정할까 봐 가족에게도 한마디도 못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냈다. 소피아와는 더 이상 점심을 같이 먹지 않았다. 나랑 같이 밥 먹기 싫었겠지. 너도. 나도 싫어... 근데 나 진짜 아니야. 나 우리 집 가난해도 누구 돈 훔치고 그러는 사람 아니야. 이거 모자랑 가방이랑 엄마가 한국에서 사서 비싼 국제택배값 대서 보내준 거라고!!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 당시 같이 연수를 하던 친구들에게도 아무 말도 못 했다. 저이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고. 너희들도 나를 의심하는 거냐고.


나는 깊이 우울하고 괴로웠다. 얼마나 울면서 기도했는지 모른다. 하나님 나 억울해요. 나 정말 괴로워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느 날 소피아가 너무나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다가와서 당황했다. 그러고는 자기 물건을 훔친 사람을 찾았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수업시간에 자기 물건(필통, 비싼 펜)을 사용하고 있는 콜롬비아 아이를 발견한 것이다. 그 아이에게 이것저것 캐묻고는 범인이 그 아이라는 것을 확신한 모양이다. 그러고는 나에게 갑자기 너무나..... 잘해주는 것이다...? 서로 외면한 지 오래였는데 이렇게 돌변하는 태도가 너무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후련했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 다른 친구들과 그 도난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소피아의 이상한 태도(?)를 의아해하는 친구들에게 사실은 그간 그가 나를 의심했노라고, 그 때문에 나는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했다. 다들 나를 도둑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집에 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전에도 그날 가족들과 화상통화(네이트온)하면서 그 얘기를 했다. 나에게 그간 이런 일이 있었다고. 속상해할 부모님을 떠올리기에는 난 너무 어렸다. 그리고 이제 나의 괴로움이 해소되었으니 엄마, 속상해하지 마!


그 아이는 날 왜 의심했을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을까. 돈을, 본인이 쓰던 좋은 물건을 탐내는 아이로 보였을까? 그런 생각에 갇혀 몇 개월을 괴롭게 보냈지만 지금이라면 간단하게 답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 아이는 날 모르는 사람이었던 거다.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순간에 나를 의심하고 도둑이라고 확신하지는 못했을 테지. 그런 사람에게 너무 마음 쏟지 말자. 너무 신경 쓰지 말자. 지금이라면 이렇게 나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어렸고,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일에 정말 범인이라도 된 양손이 덜덜 떨렸을 뿐이다.


나에게는 나를 평생 괴롭히는 트라우마 같은 몇 가지 장면과 날들이 있는데, 이 시기도 나의 트라우마 중에 하나다.

거의 대부분의 순간 잊고 지내지만 가끔씩 이때가 떠오르면 (지금처럼) 눈물이 난다. 나는 이제 좀 벗어나고 싶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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