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른백산 Jul 22. 2020

독야청청 천왕봉보다 능선따라 세석평전

잘 모르겠을 땐 지리산을 가라 - 07 



함께 걷기 시작한 지 두 시간쯤 지났을 무렵, 길 위로 3층 높이의 거대한 바람개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석 대피소의 풍력발전 시설이었다. 대피소를 이토록 평온한 상태에서 만나게 되다니. 대피소 취사장에 도착하니, 며칠 동안 종주하며 만나고 지나쳤던 사람들은 거기 다 있었다. 오라고 손짓하는 아저씨들 틈바구니로 들어가 함께 식사를 준비했다. 능숙하게 꺼내는 팬, 반찬, 버너. 셋은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다고 내 참여는 정중히 사양했다. 대신 내가 먹으려고 했던 음식을 함께 먹자 제안했고, 나는 고작 팩소주와 즉석식품 두 가지로 갓 지은 하얀 쌀밥에 프라이팬으로 바짝 구운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세석 대피소, 지금은 리모델링이 끝났다

최근 몇 년 간 경험하지 못한 강행군에 몸이 피로했는지 한 잔 술에도 눈이 핑핑 돌았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 테이블 옆엔 전 날, 반야봉에서 인사하고 함께 사진도 찍었던 중년 부부가 밥을 먹고 있었고, 그 뒤에는 벽소령에서 물을 뜨며 인사했던 활력 넘치는 형이 있었다.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상에서는 서로 아는 척을 하고 참견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는데 산은 그렇지 않다는 게.  오전에 길을 가면서 산은 시작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 함께 나누는 것이 산이다 라는 말을 들었었다. 아픈 나를 신경 쓰고 도와준 은인을 생각하며 반은 무조건적으로 끄덕였던 것인데, 함께 밥을 나누어 먹고 의지하며 가니 새삼 함께 사는 세상의 가치를 생각하게 되었다.


세석평전. 낮은 풀들의 군락이 묘한 분위기를 만든다

붕대를 동여매고 나선 길,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쭉 걸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이 나타났다. 산의 뼈가 드러난 벼랑도 아니고, 울창한 숲도 아니었다. 무릎 아래로 자란 풀들. 완만한 경사로 옆으로 습지가 이어졌다. 표지판에 세석평전 하고 적혀있었다. 경사로 끝에는 커다란 돌 하나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올라갈 수 있게끔 나무 안전바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출발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다들 모여서 풍경을 감상하길래 나도 따라 올라갔다. 그곳은 지리산의 심장부였다.


올라온 길을 굽어보니 거슬리는 나무 한 그루 없이 평탄한 초원이 보였다. 그 아래는 세석 대피소의 지붕, 그리고 풍력발전시설의 커다란 바람개비가 있었다. 다시 올라온 방향으로 몸을 돌리니,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 꼬리에 꼬리를 문 산맥의 위용, 산 너머 산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리산을 다녀오고, 네팔 히말라야 근처도 서성여봤지만 지금껏 내가 만난 풍경 중 세석평전만큼 넋을 놓고 지켜보게 한 장소는 없었던 것 같다.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될 수많은 어려운 일. 게 중에는 일상의 행복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대부분이겠지만 어쩌다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 될 때 어디에선가 위로받고 싶다면 그건 여기, 세석평전 이리라. 독야청청 천왕봉도 경이롭지만 나는 세상 참견 한가운데, 푹 잠겨 있는 세석평전이 더 좋다.





가을 하늘의 티 없이 맑음을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걷는 기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평생 모를 기쁨이다. 시야를 방해하는 높은 나무도, 곁에 높다랗게 서 있는 산도 없이 맑은 능선을 쭉 쭉 걸어 나갔다. 평야가 아름다웠던 세석평전을 지나고 슬슬 해가 기울어져 갔다. 능선을 건너 건너 정면에  커다란 산이 보였다. 나는 그것이 천왕봉인가 했었지만 아니었다. 그 커다란 산은 그림자도 거대했다. 해가 기울수록 그림자는 점점 커다랗게 부풀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실시간으로 점점 더 시커멓게 변했다. 여태껏 이렇게 큰 그림자를 만난 적이 있었나. 이게 정말로 산 그림자구나 싶었다. 이런 건 복잡한 도시에서 절대 볼 수 없으리라. 그림자 산을 옆구리로 돌아 돌아 빠져 나가자 머털도사가 수련하던 누덕봉 같은 전경이 펼쳐졌다. 산과 산을 이어주는 길은 아주 얇았고 그 옆으로는 깊은 낭떠러지가 나 있었다. 좁던 길은 점점 더 넓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 홀로 길을 덮고 있는 커다란 봉우리가 보였다. 꼭 지상에서 보던 산 같았다. 산속의 산, 천왕봉. 웅장한 자태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지는 해와 함께한 이튿날, 어느새 즐거운 산행이 끝났다. 천왕봉 아래 이색적인 건물이 발견된 것이다. 만 배 키운 휴지심같이 생긴 물건이 길의 좌우로 죽 늘어서 있었다. 만약 인류가 화성에 테라포밍을 위한 대피소를 만든다면 저와 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되는. 그 너머에 마지막 대피소, 장터목 대피소가 있었다.

장터가 열리던 곳.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했다



이전 07화 등산객들이 인사하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