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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른백산 Jul 21. 2020

등산객들이 인사하는 이유

잘 모르겠을 땐 지리산을 가라 - 06


오죽 아프면, 춥고 바람도 거세게 부는 그런 포인트에서 쉬고 있겠냐면서. 젊은 친구 도와주자는 생각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진통제 한 알을 주고, 불편한 부위에 연고를 발라줬다.



나는 잠귀가 밝은 편이다. 자다가도 오만 소리는 다 듣는다. 학교 다닐 때 동아리 선배들은 이미 잠든 지 한참인 나를 곁에 두고 저희들끼리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다 내 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 나는 자던 자세 고대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는 했다. 어차피 내 얘기를 하는데 일어나 아는 체를 했다간 제 얘기를 몰래 듣는 놈 취급을 면할 길이 없어서 마저 자는 척을 했었다. 아무튼 나는 잠귀가 밝다. 어디서나 편하게 자는 무딤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새벽녘부터 대피소는 부산했다. 산행은 준비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연했다. 거센 바람을 막아줄 바람막이, 안에 끼워 넣을 내피, 비가 내리면 바로 착용시킬 배낭 커버까지. 북적이는 소리들에 슬쩍 눈을 떴다가 모른 체 마저 잤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다리 상태, 몸 상태를 점검해야 했는데 그게 겁이 나서였다. 만약에 다리가 심각한 수준이라면 하산해야 했다. 두 차례 선잠을 잤다 일어났는데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작아졌다. 인기척도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때 시계는 오전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굳이 산이 아니라도 이미 늦은 아침이었다.

취사장에서 늦은 아침을 해 먹었다. 어젯밤에 들렀던 급수대는 간 밤의 추위로 꽁꽁 얼어서 물은 사 마실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지리산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배낭을 들쳐 메고 스틱을 짚으면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해보았다. 막 일어났을 때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저릿저릿했었는데 그보다는 좀 나아진 것 같았다. 그래도 확신이 들지 않아서 장터목 가는 길목을 멍하니 쳐다만 봤다. 맑고 경쾌한 하늘, 씽씽 불어오는 강한 바람. 바람 따라 옆으로 누운 갈대들. 인터넷으로 산을 배운 나에겐 댓글에 달린 경고문이 전부였다. "산을 얕보지 마시고 가능 한 만큼만 도전하세요."라고 쓰여 있던 댓글이 생각났다. 내게 지리산 종주 계획이 단순한 산행은 아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 여정은 어른이 되어서 내 인생을 오롯이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느냐는 질문이었고 그 답을 알기 위한 여행이었다. 그래서 더, 지금 포기하지 않는 것이 나의 인생, 위기를 모른척하는 무책임한 시도가 아니냐고 뼈아프게 질문하게 만들었다. 겁이 났다. 지리산도 인생도 모두 실전이니까.


기분이 좋아지는 아침. 이런 날엔 걷고 싶어 진다

결국 하산하기로 했다. 다시 돌아오겠다- 누구에게 하는 생각인지도 모를 다짐을 하고 하산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 얼굴로 바람이 훅 끼쳐 들었다. 바람은 시원했고, 기분 좋았다.  바람을 보고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그 방향은 장터목 가는 길목이었다. 길이 좋아 보였다. 열 한시의 햇살은 정수리를 향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바람 따라 누운 갈대들이 길 안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깨 높이까지 고르게 자라 있는 풀들이 이리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바람을 막을 요량으로 마스크를 귀까지 뒤집어썼다. 어딘가 홀린 것처럼 장터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딱 삼십 분만 가 보자. 그리고 아니다 싶으면 되돌아가면 된다. 그렇게 나 스스로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산의 깊숙한 곳. 이튿날의 등산로는 가는 곳마다 절경이었다

벽소령의 험준한 계곡을 가로지를 때와는 달리 고른 평지에 드문드문 바위가 솟아있는 정도로 편안한 길이 이어졌다. 바람이 거세게 불기는 했지만 풀들을 가로지르다 번번이 자신을 뽐내고 있는 지리산의 절경이 고통도, 미래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가냘픈 안전바 너머에 겹겹이 산들이 둘러싸여 있었고, 산마다 작은 길이 나 있었다. 더 너머에는 바다가 보였다. 여기에 지리산이 있었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사진을 찍었다.

평지길에서 무리해서 걸은 모양인지 한 시간쯤 지날 무렵 고통의 빈도나 정도가 꽤 심해졌다. 점점 더 자주 쉬어야 했다. 산행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앉을 만한 자리가 나오면 등짐을 내리고 앉았다. 바위를 넘어가느라 또 몇 번이나 삐끗했다. 해가 들지 않는 바위 위, 바람이 몹시 거셌지만 일단 앉고 보았다. 바로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어? 여기서 뭐해."

오십대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 셋이었다. 그들은 내가 앉아 있는 걸 보고 말을 건 듯했다. 대뜸 처음부터 말을 놓는 바람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공손하게 대답했다.

"다리가 아파서 잠깐 쉬다 가려고요."

"어디 어디가 아픈데."

나는 쭉 뻗은 왼다리를 가리키면서 짧게 설명했다.

"갈 수 있겠어?"

"아 네. 그럼요. 먼저 가세요. 저는 천천히 가겠습니다."

걱정스럽게 얘기하는 아저씨에게 특유의 허세로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조심해서 와. 절대 무리하지 말고."

아저씨들은 나를 지나쳐서 바위를 넘어갔다. 도와달라고 할 걸 그랬나. 잠깐 후회했지만 적절한 시기에 위로받아서 이것만으로 마음에 안정이 되었다. 기댈 곳이 필요했나, 아직 멀었구나 하고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이제는 쉬어도 별 차도가 없었다. 결국 어제랑 똑같은 신세가 된 것. 어쨌든 가야만 한다. 십여분 정도 걸어갔다. 돌들이 우거진 지대를 넘어가자 아까 나를 걱정하며 지나갔던 아저씨들이 나타났다. 세 아저씨는 각자 특징이 분명했다. 마른 체격에 안경을 쓴 인텔리 한 스타일, 냉정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가장 먼저 나서서 말을 걸어주었었다. 아마 따뜻한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두 번째는 큰 체격에 푸근한 표정을 지닌 따뜻한 인상. 마지막 아저씨는 높은 목소리 톤에 장난기가 주름을 만들고 있는 유쾌한 스타일이었다.

"어이, 다리. 여기야. 이리로 와봐."

다리?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웃으면서 대답했다.

"여기서 쉬어 가세요?"

"쉬기는. 와서 바지나 올려봐."

장난스러운 표정의 아저씨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아저씨들은 바위를 넘어가자마자 걱정이 들었다고 했다. 오죽 아프면, 춥고 바람도 거세게 부는 그런 포인트에서 쉬고 있겠냐면서. 젊은 친구 도와주자는 생각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효과가 세다는 진통제 한 알, 시원한 연고를 발라줬다. 의무병 시절, 군의관에게 멘소래담이나 파스의 효염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군의관님 파스는 무슨 효과가 있습니까?", "괜찮아지는 기분이 들지. 약간은 덜 아파질까?" 한의사들을 주술사라 표현하던 그에게 파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 뒤로 파스, 멘소래담은 무한 불신하고 있었는데, 마음이 닿아서였을까. 아저씨들이 약을 발라주자 마자 나를 괴롭히던 고통도 정말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처치를 받는 김에 내 배낭에서 압박붕대를 꺼냈다. 내 다리로 척척 감아올렸다. 그러자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표정들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누그러졌다. 거듭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함께 길을 가기 시작했다. 푸근한 표정의 아저씨는 내가 인상도 좋고, 마음에 든다며 딸만 있으면 소개해 줬을 텐데 아쉽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의지하며 가는 산행, 홀로서기라는 소기의 목적은 실패한 듯했지만 대신 마음속 깊이 따뜻함이 느껴졌다.

멀리 바다도 보인다
여벌의 붕대는 챙기지 않았다. 재활용해서 다시 써야만 했다


다리도 한결 나았다. 진작 붕대를 처치하지 않은 나의 부주의함에 질책을 하고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지리산 종주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하는 코스인 탓에 산행 중간에 만난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일이 잦다. 어차피 모두의 목적지는 천왕봉, 장터목 대피소이기 때문이다. 아저씨들과도 계속해서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저씨들 그룹에서도 목적지만 동일하게 잡고 각자 걷고 싶은 속도로 걸어갔기 때문에 한 명 한 명 이야기하기 좋았다. 어쩌다 내가 앞서 가기도 하고, 아저씨들이 앞서 가기도 했다. 가진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함께 걸었다. 바깥에서 산 안쪽으로 들어오는 첫날, 건조했던 풍경과 달리 이 날은 능선을 따라 걷는 여정이 계속되어 끝도 없이 절경이 펼쳐졌다. 높은 곳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목적지나 지금까지 지나쳐온 길들도 볼 수 있었다. 아저씨들은 손가락으로 일일이 가리키며 봉우리의 위치나 앞으로 갈 길을 알려주었다. 그곳엔 정말 빨치산들이 숨어있을 것만 같은 천혜의 요새도 있었고, 홀로 오랫동안 수련하는 도인들의 바위 같은 것이 있었다. 오르는 산에서 알게 된 산으로의 변화, 꽤나 극적인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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