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르겠을 땐 지리산을 가라 - 서문
지금부터 소개해드릴 글은 2016년, 첫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준비하면서 고민하던 시기에 쓴 이야기입니다. 서른 하나부터 서른넷까지 힘을 얻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지리산 여행기]
평생직장이 없는 불안한 시대, 언젠가 단단히 서 있을 수 있는 미래를 꿈꾸며 지난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빈틈이 많지만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찾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 이름을 날린 사람들의 일대기를 보면, 어린 시절부터 노는 물이 다르단 걸 알게 된다. 열차를 통째로 태워먹을 뻔 한 토마스 에디슨, 조선 역사상 최연소 장원 급제 율곡 이이. 일찍이 공자께서는 서른을 이립이라 하여, 자신의 사상적, 활동적 토대를 세우는 시기라 하지 않으셨던가? 그래서 그런지 이 유명한 사람들은 인생의 가장 빛나는 업적을 이미 서른에 달성해 버리기도 한다.
십 대의 나는, 나도 서른이 되면 잘 모르겠지만 뭔가 훌륭한 업적을 남기리라고, 하다 못해 한 아이의 아버지는 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로부터 나이만 조금 더 먹었을 뿐인데 왜 업적도 못 세우고, 아버지도 못된 걸까.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이 글은 서른 즈음. 정확히는 스물아홉부터 서른하나까지 인생의 빛나는 업적을 세우지 못해서 불안하던 나의 기록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릴 적부터 끈기가 부족했다. 뭐 하나 달성하지 못하고 이거 했다, 저거 했다 우왕좌왕하며 살았다. 치토스 먹으면 나오는 따죠, 빵보다 스티커를 가지려고 사 먹은 포켓몬스터 빵, 사회가 인정한 어른스러운 취미의 대표 주자 우표 수집. 모두 한 달을 가지 못했다. 그나마 비용과 시간이 적게 드는 취미라 타격은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있었다. 부유한 어린이들의 상징 과학상자를 아는가? 나는 14살, 초등 3학년으로 과학이라곤 남박사가 만든 마징가제트밖에 몰랐는데, 과학이란 말이 마음에 들어서 경시대회 나가보고 싶다고 투정을 부렸다. 당시 과학경시대회는 과학상자를 가지고 정해진 시간 내에 조립해 내는 대회였다. 당연히 과학상자는 필수품이었고, 엄마는 고심 끝에 구입을 결심했다. 그것도 2호, 3호와 같은 저가형이 아닌 5호로. 지금도 과학상자 5호는 10만 원이 넘어가는 고가품이다. 미군부대 앞, 가난한 동네에서 힘겹게 살던 엄마에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대회는 안 나갔다. 받아 볼 때까지는 설레고 기뻤는데 이상하게도 직접 만지고 나니 흥미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나사 한 번 조립해보고 장롱 아래 영원히 내려오지 못했다. 지금도 과학상자 생각만 하면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물론 "원래 애들이 그런 거 아니야?" 하고 반문할 수는 있다. 누구나 그런 실수는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대로 어른이 된 경우는 꽤 희귀하지 않나. 덜 자란 어른 김기덕, 그래서 서른의 분기점을 '달성'으로 설정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육자배기의 달인, 임인석 선생님은 "판소리 한 대목에는 인생이 다 들어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어느 한 가지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며, 마침내 마무리를 해 낸 사람이라면 다른 무엇도 해 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 가지 일의 마무리. 지금껏 나의 일을 온전히 완성해 본 적 없는, 치기 어린 서른에 가져 봄 직한 작은 꿈. 만약 무엇인가 완성하는 날 나는 다시 태어나리라, 소망을 가져보았다.
굳이 글을 쓰려는 이유, 거기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건 내가 하던 일의 연장선이다. 전통공연을 하면서 풍물 기술도 익히고, 공연도 많이 다녔지만 그 밖에 가다듬은 기술이 있다면 글쓰기와 이미지 편집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었지만 sns 홍보 문구, 포스터 제작, 슬로건 고민 등등 간단한 작업에서부터 신문 편집, 기사문 작성까지 꽤 다양한 업무를 하면서 디자인과 글쓰기의 실력이 자라왔다. 그래도 3년 단련해 온 기술인 만큼 그 역량을 발휘해 보고 싶었다.
두 번째, 글을 씀으로써 사건들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의 배운 것들 중에 단 하나를 손꼽자면 그건 바로 '마무리'일 것이다. 업무 다음 사람에게 인수인계할 수 있도록 정리 정돈하는 것이 대표적인 마무리. 마무리는 일상에도 필요했다. 헤어진 연인과의 기억, 좋은 건 좋은 대로 슬픈 건 슬픈 대로 정리하는 방법. 함께 다녀온 여행에서 모두의 경험을 모으는 방법. 마무리. 인생의 가르침들은 때로 서로 불협화음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유독 마무리는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법이 없다. 가끔 희귀한 경험을 했을 때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일 없이 단단히 붙잡아서 피와 살로 만드는데 유용한 좋은 친구다. 소중한 나의 인생, 두텁게 느낄 수 있도록 자주 쓰고 많이 써보려고 한다.
세 번째, 내가 글쓰기를 예술 지향적 인생의 표출 방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새 직업을 준비하면서 자기소개서에 뻥을 많이 쓰고 있다. 다섯 번째로 쓴 자기소개서에 그런 말도 적었었다. "나는 예술가로 길러졌다. 그래서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 관점을 발휘할 작업을 찾아 헤맸다." 반쯤은 거짓말이고 반쯤 진심이다. 작정하고 예술가로 길러진 적은 없었지만 살다 보니 관점이 생긴 건 사실이고, 그걸 글쓰기로 풀어내고자 욕심을 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글쓰기는 나의 오랜 소망이다. 글쓰기와 관련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다른 데 돈 쓰는 건 참아도 책 사는 데에는 아끼지 마라."라고 얘기해주는 엄마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것이(사는 것을 포함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행동이라고 생각했고, 보안관 밤쇠같은 어린이 동화부터 괴테의 파우스트까지(몇 번 졸다가 포기했다) 많이도 사서 모았다. 책을 사고, 펼쳐놓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을 미소 짓게 만드는 마법의 물건. 내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책과 관련된 허세의 왕은 글쓰기. 글쓰기에도 선망의 마음이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대충 눈대중으로 훑어도 넘어갈 수 있는 책 읽기와 달리 글쓰기는 여간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글쓰기를 잘 못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만나게 되는 온갖 글쓰기 경진대회, 그리고 수업 시간에 틈틈이 하게 되는 글쓰기에 두각을 보인 일이 전혀 없었다. 칭찬도 못 듣고, 재미도 없으니 글쓰기와는 점점 멀어졌다.
그러다 이십 대 중반, 첫 일자리에 취직하고 업무상의 이유로 글쓰기를 하게 된 것.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는 과업들은 글쓰기의 자신감을 만들어 주 었고 문뜩, 앞으로도 살면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감히 바라건대, 지금의 이 작업이 앞으로 내 인생의 글 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끝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