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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11. 2022

공자는 왜 안회를 그렇게 많이 칭찬했을까?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

子曰: “語之而不惰者, 其回也與!”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道를〉 말해주면 게을리하지 않는 자는 顔回일 것이다.”
안회(顔回)의 초상

이 장은 공자가 애제자 안회를 평가하며 그의 장점을 말한 것이다. 단순히 안회를 칭찬하기 위한 것이 아닌 것 정도는 이제 눈치챘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안회에 대해 공자가 여러 가지 형태로 언급하고 칭찬했던 내용은 <논어>에서 상당히 많이 눈에 띤다. ‘위정(爲政) 편’ 9장, ‘옹야(雍也) 편’ 2장, 5장, 9장, ‘술이(述而) 편’의 10장, 그리고 ‘선진(先進) 편’의 3장 6장, 18장 등등 적지 않은 언급을 보이고 있다. 


이 언급된 부분들의 공통점이라면 하나같이 칭찬일색으로 꾸짖거나 단순히 그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글을 열면서도 설명했지만, 공자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편애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굳이 안회에 대해 칭찬일색으로 일관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 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가 어떤 부분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실제로 궁행 실천해 보이고 있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점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성인(聖人) 공자의 가르침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성인급의 경지에나 올라야 한다는, 해보지도 않고 그저 경외시 하는 무지몽매한 몰이해와 몰지각으로 점철된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본래 선한 마음을 깨닫게 하고 그것으로 인해 사회를 올바른 것으로 다시 교정하려는 공자로서는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제자가 성큼성큼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일반인과 공자 사이에서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며 얼마든지 자신의 노력과 수행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보여주는 사례가 나와주는 것만큼 반가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가르치는 입장에서 그것에 대해 이해가 어렵다, 그런 걸 누가 이해하냐? 심지어 그걸 이해하고 실천으로 이행할 수 있기는 한 것이냐?라는 투덜거림만 듣다가 그것을 따라와 주는 제자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공자는 너무도 반갑고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안회는 공자에게 그런 제자였다. 안회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깨닫고 인성도 훌륭하여 하는 행동마다 문제의 소지가 될만한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 경지에 달했을 리도 없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문하에 들어와 하나씩 배우기 시작하면서 확연하게 그 두각을 드러냈다. 배우고 익히는 것에서 시작해서 넌지시 모든 행간까지 길어내어 일러주지 않더라도 스승이 가리키는 바를 명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몇몇 주석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안회가 이해력이 뛰어나고 영민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달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과연 안회의 진면모를 읽은 것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


사실 안회가 처음 공자의 문하에 들어와 어떻게 일취월장 학문의 성취를 이루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나 언급이 없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논어>에서 공자가 언급했던 것만으로도 우리는 안회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충분히 유추해낼 수 있다. 이 장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이 장에 대해 주자는 단 한 줄, 한 문장의 주석을 달고 있다.

‘惰(타)’는 게으름이다.


도에 대해 일러주면 (그것의 본질을 더 명확하게 알려고 하고 그것을 몸소 실천해보고자)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핵심은 괄호 안에 생략된, 하지만 아주 쉽게 유추해낼 수 있는 바로 그 내용이다. 

학문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이 안회의 가장 큰 자질이었고, 그 공부를 통해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자 하는 진지한 자세야말로 그가 스승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소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제자 안회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얼마나 공자에게 아픔이었을지, 자식을 잃은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이 그의 뼈를 관통하며 절규하게 했을 것이다.


다시 원문으로 돌아와 보자. 그런 배경에서 이 장에서 안회를 통해 공자가 다른 배우는 자들을 일깨워주기 위한 항목은 무엇이었는지 확인해보기로 하자. ‘말해주면 게을리하지 않는다’ 목적어가 빠져있다. 당연히 빠진 목적어는 내가 원문에서 괄호로 표기한 바와 같이 공자의 궁극적인 가르침 ‘道’이다. 


끊임없이 노력했던 그 자세가, 공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가장 기본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는 내용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 장에 대해 범 씨(范祖禹)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안자(顏子)가 夫子의 말씀을 듣고는 마음에 이해되고 힘써 행하여 경황 중이거나 위급한 상황이라도 일찍이 어긴 적이 없었다. 마치 만물이 단비[時雨]의 적셔줌을 만나 꽃을 피우고 자라는 것과 같으니, 어찌 태만함이 있겠는가. 이는 여러 제자들이 미치지 못한 바이다.”


이 주석의 핵심은, 굳이 공자가 안회의 칭찬을 한 것이, 안회가 잘해서가 아니라 다른 들이 그에 미치지 못한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주석을 통해 안회가 머리가 영민하고 이해력이 빨랐다고 했던 것에 내가 동의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이런 부분에 있다. 


만약 그가 그저 영민하고 이해력이 빠른 사람이었다면 공자는 굳이 그가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것에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주석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또 한 가지 사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 또한 그의 천성이 그러했기 때문이 아니라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그의 머리와 그의 마음이 그것에 감화되어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지금의 9편까지 <논어>를 읽어오면서 수차례 지적하기를 반복하였지만, 공부를 하는 것은 내 일신의 출세를 위함이 아니다. 그런데 백날 그것을 강조해봐야 어차피 공자의 문하에 들어온 이들의 절반 이상의 절대다수들이 유명한 학자의 문하에 들어가 어떻게 학문을 쌓고 그 유명세를 통해 위정자에게 발탁되어 벼슬자리 하나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수천 년이 지난 작금의 한국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고 미천한 집안에서 공부하나 잘해서 관악의 경성 제대로 직행하여 지금의 부와 명예를 쌓아가는 이들이 있는 것이 무엇 하나 이상할 것이 있겠는가? 그들이 과연 머리로 진리를 모르고 무엇이 옳은 줄 모르며, 어떤 것이 잘못된 것인지를 몰라 그따위로 살았겠는가?


지금은 혼란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경성제대에 들어가 세상을 알게 되고, 올바른 것을 잡아보겠다고 책 대신 화염병을 잡고, 도서관 대신 유치장에 들어가기를 밥먹듯이 해서 당당하게(?) 별을 달고 그것을 훈장으로 여의도에 배지를 달고 입성한 자들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20대에 시작했던 올바른 사회를 만들겠다는 이념은 그들이 자신이 고생했던 20대를 보상받아야 한다는 듯이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자기 친척 친지들을 쳐 먹이고, 공부 못하는 자기 자식을 로스쿨과 의전원에 보내겠다는 몽니를 부리면서 다 퇴색되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그런 추악한 행태가 드러나 지적을 받는 상황이 되어서도 그것이 관행이라는 둥, 다른 쪽의 사람들은 훨씬 심한 악행을 자행하는데 왜 자신에게 이런 심한 잣대를 내미느냐는 둥 후안무치한 태도를, 그들이 20대에 화염병을 던졌던 군바리 출신 정치인들이 했던 짓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그들이 그렇게 치열한 운동권이라는 명패를 달고 지낼 동안, 매캐한 최루탄을 치약으로 막으며 도서관에 틀어박혀 사법고시에 ‘소년 급제’하여 화염병 든 친구들을 잡아넣는 조서를 꾸미고, 정권의 입맛에 맞게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승승장구하고 그렇게 원하던 돈 많은 처가를 잡아 자신의 인생을 업그레이드했다며 착각하고 있다가 어느 한순간 그 지저분한 과정이 드러나 꿇어박은 인생들도 있다.

빨간 당 아니면 파란당, 그 둘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프레임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 아, 꼴페미 노란당도 있다고 우기고 싶은가? 자신들이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순간 당 수뇌부에서 성추행이니 성폭행이니 하는 말이 나오질 않나, 노동자들을 대표한다고 입으로만 떠들면서 그들에게조차 자신들의 정당성을 실천궁행(實踐躬行)으로 1도 보여주지 못해서 외면받아 기억에서 멀어져 가는 그 노란당이 대안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면서 파란당에서 20대의 여성 동지들을 박씨처럼 물고 온 박지현 양을 공동 비대위원장으로 두었다고 한다. 듣보잡 지방대 출신의 스물여섯 먹은 여성이지만, n번방 불꽃 감시단 출신으로 유명세를 날린 그녀는 빨간당의 당대표의 대항마격으로 나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직 젊은(아니 젊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어린) 그녀에게 정치의 새로움을 찾겠다는 좋은(?) 의도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이, 다선의원들이 여태 썩은 정치를 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모두 정계 은퇴를 해야 한다는 흐름을 어떤 식으로든 희석시키고 거기에 묻어가서 자신들의 정치 생명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보겠다는 수작이 아니라면 말이다.


박지현 양도 그렇지만, 최근 민주당은 2030 여성 지지자들에 대한 지지와 더불어 젊은 새로운 흐름으로 환골탈태하고 있다는 식(?)의 코스프레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여태 다선이랍시고 파란당이 절대적 여당일 때의 정점을 만들어주었음에도 이 모양 이 꼴로 무속인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법비를 대통령으로 국민들이 뽑을 지경까지 망가뜨린 책임은 왜 안 지는가?


2년여 전에 자신들이 새로운 피라면서 사법 농단의 피해자라며, 새로운 정치를 만들겠다며 배지를 단 법비출신에서부터 소방관 등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코를 후비며 딴짓을 했었단 말인가?


지난 <논어> 공부 3회 차에 걸쳐 언급했던 현직 목사 아동학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을 수 없다. 또 그 얘기냐고 역정을 내기 전에 조금 주목하며 당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 과연 당신의 공부가, 당신의 실천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공부하라고 현재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서 사례를 들어 일러주는 것이니 똑똑히 보고 기억하고 공부하길 바란다.

다선의 행안위원장인 운동권 출신 여자 국회의원과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며 초선이 된 소방관 출신의 국회의원실에 직접 제보하고 도움을 청했으나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묵과하고 대강 뭉개고 넘어가자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충분히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파란당의 개혁의지와 젊은 피라며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그들이 정말로 그러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저 테스트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현재 벌어진 경악할만한 사건이 있지 않던가?


그래서 두 사람에게 연락을 취해보았다. 가장 대표적인 현재 공동 비대위원장 박지현 양에게 이메일로 제보를 했다. 한국 시간에 새벽에 날아간 지메일을 그녀는 한국시간 아침 7시 5분이 읽었다. 그리고? 씹었다. 아무런 연락이 없다. 요즘 바쁘고 신난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한참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을 거라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왔다. 서글펐다. 


그저 오래된 자신들이 새로운 옷을 입는다는 퍼포먼스의 일회용 허수아비로 전락해서는 안되는데, 그래서는 대선 한 번의 치욕으로 끝나지 않을 텐데, 그들의 멱살을 잡고 싶다는 거친 언사로 이슈몰이를 할 정도라면 너까지 그러면 안 되는데... 아쉬움에 속이 아려왔다.

두 번째로 연락한 는, 현재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 중이 사람이었다. ‘황희두’라는 자신의 실명으로 노무현재단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전직 프로게이머 출신의 ‘파란당 스피커’였다. 내가 굳이 그를 설명하는데 ‘파란당 스피커’라고 소개한 이유는 하나이다. 


그는 여기저기 방송매체를 통해 고개를 내미는 것을 포함하여 자신의 전력과 어울리게 SNS로 말장난 저격 싸움을 하는 역할을 파란당의 최전선에서 스피커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같이 브런치를 통해 마치 자신의 사견인 듯 사견 아닌 정견을 써재끼며 파란당의 스피커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지금 그의 브런치를 가보면 알겠지만, 나는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대신 이 사건에 대해 링크를 걸고 직접 댓글에 “당신이 정말로 파란당의 스피커로써 제대로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정치활동에 투신한 것이라면 이런 사건을 눈감아주려는 파란당 중진 국회의원의 행태를 포함하여 내부에서 목소리를 내어 바꿀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게 연락을 다오.”라고 남겼다.


결과가 어땠을 것 같은가? 직접 그의 브런치에 가서 댓글을 확인해보라. 그는 여전히 고장 난 스피커처럼 파란당의 홍보에 가까운 볼멘소리를 그저 볼륨 높여 매일같이 떠들고 있을 뿐 전혀 그 댓글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내가 수십여 권의 책을 출간하고서도 책을 출간하는 것 대신에 일주일에 한 권 분량의 글을 브런치에만 연재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실시간 소통을 통해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양방향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생각을 정리하여 쓰는 글도 그럴진대, 하물며 정치라는 것은 실시간으로 대중들의 생각을 많이 듣고 그것에 양방향으로 반응하지 못한다면 그저 고장 난 스피커로 고물상에 넘겨버릴, 공산당 시절이나 군바리 독재 시절의 그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제 서른이 갓 넘은 그 노무현 재단의 이사라는 직함까지 이용해서 정치에 기웃거리는 젊은 프로게이머 출신 친구는 결국 자신의 인지도를 높여 썩어빠진 정치권의 간택을 기다리는 후궁 후보에 지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들이 너무 바빠, 아니 봤는데 너무 바빠 잠시 잊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들이 그런 것이 아니라면, 파란당은 물론이고 새정치에 대한 희망 따위는 쓰레기 더미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슈가 되고나서야 방송 카메라에 인터뷰를 하겠다고 나서는 여의도에 배지 달고 있는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들과 새로움을 가져오겠다고 외치는 그들이 무엇이 다른지 정말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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