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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08. 2022

한 걸음을 남겨두고 쓰러져 결승선을 통과 못하였더라도.

결국 그 마라톤은 완주하지 못한 것이다.

子曰: “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학문을) 비유하면, 산을 쌓아 올림에 마지막 흙 한 삼태기를 (붓지 않아 산을) 이루지 못하고서 중지하는 것도 내 자신이 중지하는 것과 같으며, 비유하면, (웅덩이를 메워) 땅을 평평하게 만드는 데에 흙 한 삼태기를 처음 붓는 것이라 하더라도 나아감은 내 자신이 나아가는 것과 같다.”

이 장의 언급은 공자의 말이 아니라 인용이다. 주석에서도 해설하고 있지만 <서경(書經)>에 나오는 글귀를 공자가 인용한 것으로, 주나라 소공(召公)이 무왕(武王)에게 “소절(小節)을 삼가지 않으면 커다란 덕에 누를 끼쳐,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 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공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된다”라고 한 부분을 가져와 언급한 것이다. 과연 공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었던 것일까? 주자의 주석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서경(書經)>(주서(周書) 여오(旅獒) 2)에, “산을 아홉 길을 만드는데, 성공이 흙 한 삼태기가 부족하여 무너진다.”하였으니, 夫子의 말씀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산이 거의 다 이루어졌는데 다만 (마지막) 흙 한 삼태기가 모자란다 하더라도 그 중지함은 자신이 중지하는 것일 뿐이요, (웅덩이를 메워서) 평지를 만드는데 막 흙 한 삼태기를 부었다 하더라도 그 나아감은 자신이 나아감을 말한 것이다.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으면 작은 것을 쌓아 많은 것을 이루지만, (그렇지 않고) 중도에서 그만두면 지난날의 공덕이 모두 허사가 된다. 그 중지함과 나아감이 모두 자신에게 달려 있고 모두 자신에게 달려있고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주자는 해설을 통해 두 가지를 강조하여 이 장을 이해하고 있다. 하나는 아주 작은 시작일지라도 그 시작을 하는 것도 자신의 의지이고, 거의 다 완성했지만 완성 직전에 멈춰버리는 것도 곧 자신의 의지이고 책임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아주 미미하기 그지없더라도 시작하겠다고 한 것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고 거의 다 완성하였다고 하지만 끝까지 매듭짓지 못하게 되면 그간의 노력은 모두 허사가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당연한 듯 보이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상황인 듯하면서도 일반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공자의 말이 아니라 <서경(書經)>에서 가지고 온 말이라고 하였으니 본래에도 그런 의미로 쓰였는지 즉, 그냥 원용한 것인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위에 <서경(書經)>의 내용을 간략하게 해석해놓았지만, 같은 뜻이 아닌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이 장 원문의 시작은 ‘비유하면’이라고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무엇에 비유하는 것인지는 역시나(?) 나와 않아 있다. 그래서 내가 먼저 괄호를 통해 그 비교의 대상이 ‘학문’ 임을 초심자들이 알아보기 쉽게 표기하였다.

맞다. 공자는 자신의 의견을 결코 다른 곳에서 가져와 원용하는 수준의 일반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인용하면서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것도 괴팍하고 모순된 행동일 뿐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 미묘한 인용의 의도를 행간에서 찾아내야만 한다.


본래 <서경(書經)>에서 언급한 것의 가장 주요한 의미는, 앞서 주자의 해설에서 보았던 두 가지 의미 중에서 작은 일상의 세세한 것이라고 하여 그것을 소홀히 하게 되면 결국 커다란 덕에 누를 끼치게 되어 모두 완성될 것 같은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모든 그간의 노력이 무너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경계의 의미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주자는 본래의 의도와 함께 공자가 강조점을 둔 새로운 의미에 다시 의미를 행간에서 길어내어 주석에 담았던 것이다. 즉, 그것이 작고 세세한 것을 삼가는가 아닌가 하는 것 자체가 실수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의지의 문제라고 명확하게 짚어낸 것이다.


이것은 본래 <서경(書經)>에서 의미하지 않은 더 나아간 한 발짝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공자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 위한 방식으로 새롭게 구사한 것이기도 하다. 왜 그 사람의 의지와 관계가 있다고 했을까? 그것은 바로 목적의식에 있다. 

공자는 춘추전국시대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과 뜻을 함께 할, 혹은 자신을 담아낼 수 있을만한 위정자를 찾아다녔다. 완성형으로 생각한다면 이미 그럴만한 그릇의 위정자가 있었다면 벌써 천하는 안정되었을 것이고 그 명성을 공자가 듣지 못했을 리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그 혼탁한 시대에 위정자들의 소문이 아닌 다니는 나라마다 위정자들을 만나보며 그들의 그릇이 어떠한지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의지가 있는지, 아니면 그저 천하를 독식하고 싶어 하는 욕심만 낼뿐인지를 직접 확인하였다.


그것이 바로 이 장에서 말한 의지의 문제이다. 공자는 막연하게 현실과 유리된 철학을 논했던 탁상공론의 주창자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현실적이었고 자신이 학문을 통해 이룬 실천을 현실에 적용해야만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는 지극한 현실주의자였고, 춘추전국시대의 현실은 처음부터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확률이 높다.


이런 배경에서 이 장의 가르침을 읽으면 공자가 굳이 이 비유를 왜 들었는지를 조금은 더 상세하게 읽어낼 수 있다. 공자는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최종 목적을 위한 학문을 하는 이들에게 직접 묻는다.


어떤 위정자에게 투신하여 출사 할 것인가?


아무리 선정(善政)을 펼쳐 성군(聖君)이라고 불리는 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타성에 젖어 이미 완성을 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가 불러도 더불어 함께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엄중한 경고에 다름 아니다. 반대로 이름 없고 작은 땅을 가진 군주라 하더라도 이제부터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마음을 먹고 지혜를 빌리고자 사람을 구한다면 그와는 함께 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권고를 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위정자를 판단하는 안목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학문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래서 이 장의 행간에서 강조되는 학문에 대한 태도가 바로 ‘자강불식(自强不息)’이다.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자신의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번 나태해지기 시작하면 마지막 한 삼태기만 더 해도 산으로 완성되는 것임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늘어지기 일쑤인 것도 사람이지만, 한번 하겠다고 의지를 세우고 매일같이 노력하게 되면 그 노력은 탄력을 받게 되고 꾸준히 이어지기 마련이라는 설명이다. 


어찌 보면 처음 그 시작이 어려울 뿐이지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습관이 쌓여가며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설명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에도 약간의 틈이나 나태만으로도 그간의 공적을 모두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 또한 함께 경계해주는 아주 일관성이 없는 듯 불규칙한 사례를 모두 담아내고 있는 가르침인 것이다.


세상을 올바르게 고쳐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하루하루 노력하는 시작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하루하루 이어나가며 의지를 이어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여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유종의미를 거두는 것 또한 더욱 중요하다. 


중간에 잠시라도 틈을 보이거나 나태한 마음을 갖게 되는 순간 그간의 노력은 한순간에 모두 무너져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환경에 의한 것도 타인에 의한 것도 아니니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앞서 이틀에 걸쳐 2020년 4월에 발생했던 현직 목사 아동학대 사건의 전말을 <논어>의 가르침에 비춰보았다. 대한민국의 경찰이라는 것들이, 그것도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서울지방 경찰청의 감찰부서가 어떤 행태를 보였고, 어린아이가 학대로 죽어 창설된 아동학대 특별수사팀이 어떻게 사건을 뭉개고 있는지를 여실히 살펴보았다. 그렇게 사건은 무려 세 번이나 돌고 돌아 현재 서울지방 경찰청의 아동학대 특별 수사팀 캐비닛에 갇여 있는 중이다.


그것을 세상에 꺼내 그 잘못을 바로잡아보겠다고, (현재는 깊은 잠수를 타버린) 발검 스쿨의 반장과 2022년 1월 설 전에 사건의 전말을 문건으로 정리하여 정치권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일을 바로잡아보자고 의기투합하였다.


경찰을 바로잡을 수 있는 정치권으로 선정했던 것은 경찰을 직접 견제하고 감시해야 할 의무가 있는 행안위(행정안전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당연히 행안위 소속 위원으로서 바로잡아야 할 일이기도 했지만 우연이라도 일부러 그리 맞출 수 없을 정도의 우연이 벌어졌다. 이 문제의 사건을 덮고 왜곡했던 관할 경찰서가 현재 행안위원장의 지역구 경찰서였던 것이다. 

타짜의 정마담이 그렇게 외쳤던 E여대 총학생회장 출신에 3선이나 되는 중진급 파란당 의원인 그녀가 바로 현재 행안위원장이었던 것이다. 내가 해외에 체류하고 있는 관계로 반장의 신속한 처리로 문건은 등기우편으로 그녀의 위원실로 전해졌다. 사무실에 유선으로 연락을 하여 사건의 개략적인 설명까지 마친 상태였다. 1월 중순에 보내진 문건에 대해 해당 국회 위원실에서는 아무런 피드백이 없었다. 


설이 지나면서 반장이 깊은 잠수를 타서 내가 직접 국제 전화를 몇 번이나 해서 채근했으나 결국 지역구를 담당하는 보좌관이 전화를 받아서 한다는 소리가, “이거 사안이 굉장히 복잡하고 힘든 건이에요. 그리고 저희가 지금 대선 때문에 정신이 없어요.”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후 계속 그를 찾았지만, 그는 전화를 피했고, 파란당의 원내대표까지 지내고 서울시장선거에 나오겠다던 중진 국회의원에게 연락을 취해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그의 보좌관이 말했다. “저희는 행안위도 아니면서 경찰을 감사할 수 없구요. 행안위 위원장실에 연락을 취해봤더니 자기네들은 그 건에 대해서 손을 댈 생각이 없다는데요. 도와드릴 수가 없겠네요.” 


나는 나를 도와달라고 그들에게 부탁한 적이 없다. 잘못된 것을 당신들이 국민을 대신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바로잡자고 그 사안을 함께 하자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마치 물밑에서 서로 밀약에 의해 결탁하여 개인적인 민원을 처리해주는 것처럼 굴었다.


발검 스쿨 반장과의 간략한 사전 회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3선의 파란당 중진이며, 현재 행안위원장인 여자 국회의원이 3선이나 지낸 자신의 관할 구역 경찰서에서 현직 목사 아동학대 사건이 터졌는데, 경찰이 그것을 은폐하려 하였고, 서장을 비롯하여 서울지방 경찰청의 감찰계에서 그 사안에 대해 덮어주겠다는 식의 행위를 보였다면 당연히 그녀가 의무적으로라도 이 사안을 살펴 바로잡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녀의 그간 행적을 보았을 때 소매를 걷고 나서서 바로잡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의원실에서 보인 보좌관과 비서관, 비서들이 전화를 받으며 보였던 언행들을 모두 녹취하여 그 민낯을 세상에 공개한다는 복안도 가지고 있었다.


함께 회의했던 반장이 실종(?) 수준의 잠적을 타서 이후 단독으로 2단계의 작전을 폈다. 행안위에 소속한 의원 중에 가장 막내라는 소방관 출신의 파란당 최연소 국회의원실에 연락을 취한 것이다. 어차피 잘 정리된 문건이 있었기에 행안위원장에게 보냈던 문건을 보냈고, 그 국회의원이 소방관이었을 당시 한참 위의 상관으로 은퇴한 소방관 간부 출신의 보좌관과 통화가 되었다. 

대선을 앞두고 있어 바쁘다면서 경찰청에 관련 문건을 그대로 공유하였고 답변을 달라고 했다는 회신을 받았다. 멋대로 문건을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저 던져놓고 그 사안에 대해 당신네 조직의 답변을 듣자고 하는 방식은 국회 보좌관들이 자신들이 사안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일처리를 하는 아주 나쁜 버릇 중에 하나이다. 


그래도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아예 건드리지 않겠다며 후안무치하게 굴었던 행안위 원장실의 보좌관보다는 낫지 싶어 대선이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 물론 대선이 끝나도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진 않았다. 그래서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경찰청에서 이 사안은 개인 간의 고소사건이기 때문에 국회의원실에 답변을 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면서 답변을 거부하였습니다.”


어이가 없어 물었다.


“그래서, 아, 네 그렇습니까? 하고 말았습니까? 초선 티 냅니까? 아동학대 고발사건이 개인 고소사건이나 민사사건입니까?”


“아니, 그게... 그러니까...”


“경찰한테 아무것도 모르는 소방관 출신 초선 의원실이라며 그렇게 무시당하니 좋습니까?”


“아닙니다. 다, 다시 요청할 겁니다. 최소한 감찰 과정이라도 제대로 밝히라고 하던가 왜 아동학대 특별수사팀에서 캐비닛에 넣어놓고 1년이 다 되도록 묶어두고 있는지 직무유기 아니냐고 따질 겁니다. 2,3일이면 답변받기 충분합니다. 그때 교수님에게 연락드리지요.”


그렇게 통화한 것이 2주 전의 일이었다.


과거형으로 쓴 것은 그가 이후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연락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하필이면 오늘 공부한 장의 내용이 이 두 명의 파란당 의원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은 이미 눈치챈 사람들도 있을 듯하다.


국회의원은 돈벌이 직업이 아니다. 국민을 대신해서 사회의 잘못된 곳들을 법의 제정이나 감사를 통해 바로잡으라는 의무에 따른 수당을 월급으로 받는 것뿐이다. 자칭 운동권이랍시며 여대 총학회장 출신의 그녀는 3선이나 되어가며 청문회에서 걸걸한 소리를 내며 사람들을 꾸짖는 것으로 유명해지는 듯하다가 자신의 가족을 보좌진에 고용했다는 점이나 딸의 로스쿨 입학에 자신의 지위를 이용했다는 구설수에 오르며 대중의 눈총을 샀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현재 명명백백한 행안위원장이다. 

썩어버린 고인물들이 정계에서 물러나서 물갈이가 되어야 한다는 외침이 당대표 한 사람의 차기 총선 불출마 선언으로 허망하게 끝났을 즈음에도 그녀는 지금 같은 지역구에서 4선을 해보겠다고 문제의 보좌관을 통해 지역구 표밭을 관리 중이다. 소방관 출신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자신이 있던 소방관 조직의 간부였던 대선배를 보좌관으로 둔 그 의원실 또한 처음 국회의원이 되고자 했을 때와 이제 3년 정도 지난 현실이 많이 다르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이제까지 산을 쌓겠다고 흙을 쌓아온 3선 의원이나 이제 웅덩이를 메워 평지를 만들겠다고 흙을 처음 메우기 시작한 초선이나 똑같이 구태에 젖어 자신들이 속한 행안위에서 현역 목사 아동학대 사건을 경찰이 덮은 사안을 바로잡지도 않겠다면서 다시 자신들을 뽑아달라며 4선을 꿈꾸고 재선을 꿈꾼단다.


그들은 과연 그들의 나태가 이번 대선의 결과를 만들어냈음을 알기는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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