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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18. 2022

삶은 계란 - 마지막 편

부활절 즈음을 추억하는 단편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026


                          - 8 -


인간들은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씩 조금씩 배운다. 그런데 삶이 그렇게도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겨 왔던 내가 조금씩 조금씩 살아가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나의 행동, 나의 생각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들이나 자신의 고통과 불편을 가중시키고, 견딜 수 없는 그러나 처음에는 내가 그토록 즐겼던 이 세상의 무게를 가중시킬 뿐이게 되는 그 순간까지.


정동진에 내려서 철도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자니 산 중턱에 배가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까지 올라가서 차를 시켜놓고 보니 넓게 펼쳐진 정경에 눈이 부셨다. 손에 들고 있던 괴테 전집을 덮었다. 그는 죽었고 롯데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을 덮으니 다시 서울에 있을 그녀가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우린 서로 너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수차 두 달간 교수들과 미국에 다녀온 후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난 그녀가 너무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나는 영문을 몰라 적잖이 당황했다. 뉴욕에 들러 티파니에서 결혼반지까지 고르고 골라 사온 나였다. 두 달만에 만나 이제 그간 우리의 사랑을 완성시키고자 바로 그날 프러포즈를 할 마음으로 그녀의 앞에 앉은 나였다. 하지만 그녀의 갑작스러운 통보에 코트 안으로 만지작거리던 반지함을 가만히 놓아두고 그녀의 표정을 읽었다. 그녀의 표정은 전에 없이 너무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냥 오빠 없는 동안 우리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니?”


나는 나름대로 냉정을 찾고 차분히 물었다. 하지만 억지로 냉정함을 갖추겠다고 가라앉을 마음이 아니었다.


“그냥 우리 편한 오빠 동생으로 만났으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결론을 내려?”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두 달 사이에 몇 번의 국제전화통화가 있는 동안도 그녀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표정과 그녀의 눈빛은 어떤 무엇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의지랄까 하는 것이 담겨 있었다.


“나도 이유 정도를 물을 자격은 있는 거지?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거지? 서로 다르지 않다고, 똑같다고 생각하고 만난 건 아니잖아? 게다가 네가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만날 만큼 어린 나이도 아니잖아.”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오빠는 내가 믿고 있는, 따르고 있는 길을 함께 하려고 하지 않고 그건 내게 있어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조건이라면 조건이에요.”


“내가 예수쟁이가 아니라 하는 말인가?”


나도 모르게 말에 가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래요.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함께 믿고 함께 천국을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랑한다고 해도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함께 살아간다는 건 그냥 사랑만 가지고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오빠는 사람도 좋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내가 사랑하고 평생을 같이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게 내 결론이에요.”


“우습군.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결혼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내가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고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 사랑이 무효가 된다는 뜻인가?”


“그렇게 단순하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결론은 같아요.”


그녀의 단호한 결정을 들으며 굳이 그녀를 잡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녀와의 결혼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오히려 더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 더더군다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깔끔하게 정리하기로 하자. 난 좋은 오빠 동생 따위의 관계로 질시켜 질질 우리 관계를 연명하는 건 별로다.”


“오빠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래. 잘 지내고 그럼 먼저 일어서마.”


그녀보다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오며 나는 코트 주머니 걸리는 반지함을 꼬옥 쥐고는 바람이 차가운 그 겨울의 대학로를 빠져나왔다.


                          - 9 -


그렇게 그녀와 헤어지고 난 후에도 세상은 아무런 변화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해가 바뀌었고 새로 맡은 일에 적응하고 이것저것 하느라 정신없는 듯했지만 나는 결국 그녀에 대한 미련을 지우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을 뿐이었다. 늘 전화하던 그녀와 갑자기 통화를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고 틈만 나면 나가던 대학로로 발걸음을 옮겨도 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클래식 음악을 함께 듣던 오래된 찻집을 지날 때면 나는 그녀의 모습이라도 발견할까 싶어 그녀의 잔상을 지우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정신과를 지망하고 나서 나 자신이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차마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겨우 아침 녘에 잠이 들어 한두 시간의 수면만으로 두어 달을 버티고서 봄을 맞았다. 더 이상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할 즈음 나는 다시 생활에 적응하는 듯해 보였다, 최소한 그녀가 우리 병원의 후배 녀석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의국 문을 열려는데 옆에 알림판에 청첩장이 압정에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예과 때부터 전도하는 것에 열성이던 후배 녀석의 청첩장이었다. 그 안에서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곤 설마 하고 다시 보았지만 눈에 익던 장로와 집사라는 표시가 그녀의 부모님 이름 옆에 있었다.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청첩장을 구겨쥐고는 속에서 울컥하고 뭔가 올라올 것만 같아 화장실로 달려갔다.


눈물이 솟아나고, 대지에로 다시 돌아간다며 자살을 꿈꾸던 파우스트를 생각하던 나는 괴테 전집을 들고서 무작정 청량리역에서 정동진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 있었다.


그날이 부활절이라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나는 이미 단테와 같이 35살의 나이로 여행을 떠나 어두운 터널을 그렇게 지났다. 돌아오는 길에 교회에 들러 기도를 하고 나오며 누군가 내미는 부활절 계란을 손에 받아 쥐었다. 나는 새로운 삶을 쥐고 그녀가 있는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 앉아 있었다.


                          - 10 -


복음을 듣지만, 그러나 내게는 믿음이 없다.

                                  괴테의 <파우스트> 중에서


이 부분을 보면 어떻게 기독교적 신앙도 없었던 파우스트가 부활절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자살을 하지 않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어떻게 보면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 그 상황을,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던 그에게 일어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괴테는 오만함이 바로 그의 능력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나태, 잠, 허약에 투쟁할 수 있는 정신적인 결투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파우스트의 자살 결심도 그의 오만에서 나왔고 또한 자살을 유보하고 부활한 것도 그의 프로메테우스적 오만에서 유래함을 알 수 있다. 자연을 신뢰하고 자신의 인간성인 신성을 믿고 끝까지 견디면서 더 큰 존재를 향한 노력을 바로 불멸의 완성력(엔텔레키)의 과정에서 본다면, 파우스트의 부활은 바로 기독교적 옷을 입은 새로운 인간, 신적 인간의 행로임이 드러난다.




대략 글을 매듭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괴테가 가지고 있던 자살관에 대해 문득 의문이 간다. 물론 괴테도 한 사람의 남자였을 뿐이다. 그의 문학을 보면 그 역시 너무도 예민하고 너무도 상처받기 쉬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목숨을 끊겠다는 주인공들에게 있어 자살을 생각하는 과정들도 삶의 한 과정으로 괴테는 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일주일 전 사랑하던 여자와 종교문제로 고민하다가 헤어진 피상담자에게 해줬던 말을 떠올리곤 미소 짓는다.


그녀와 잘 안된 것이 굳이 종교관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그저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랬을 뿐이니 그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그것을 그 역시 극단적인 생각까지 가지고 난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을 그에게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그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다.


파우스트 역시 자살의 끝에서 다시 삶으로 돌아오고 난 후에 말하지 않았던가.


“생명의 맥박이 신선하고 생동감 있게 고동치고 대기의 여명을 향해 부드러이 인사한다. 대지여, 그대는 지난밤과 다름없이 새로이 내 발 밑에서 생기 있게 숨 쉬는구나, 벌써 기쁨에 넘쳐 나를 둘러싸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굳은 결심을 하게 하고, 지고의 존재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게 한다.”


그는 다시 글을 맺으며 두어 줄 정도를 더 적어 넣는다.


삶은 계란이다. 부활절의 계란처럼 내 소원을 정성 들여 그림으로 그리며 그것을 소망하는 기도를 담을 뿐이다. 산다는 것은 계란처럼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지만 언제고 그 껍질을 깨고 생명이 나올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마치 봄비가 내리듯 꽃이 모든 것 위에 휘날리며 떨어지고, 들에 가득 찬 초록빛 축복이, 지상에 태어난 모든 것 위를 비추면, 비록 모습은 작지만, 마음이 대견한 요정들은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신성한 사람이건, 악한 사람이건, 불행한 자를 그들을 가련하게 여긴다.

                                  괴테의 <파우스트> 중에서

단편 <삶은 계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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