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술 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Apr 18. 2022

생산 지역에 따른 와인(Wine) 분류법

프랑스 와인(Wine) - 3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029



결과 발표 후의 여파가 어땠나요?

프랑스 대표 5대 와인

이는 평가를 한 평론가들도 당황할 정도의 대사건이었고 심사 위원 중 한 명인 오데트 칸은 자신이 투표한 내용이 공개되어 개망신을 당하게 될 것이 두려워 쪽지를 스티븐 스퍼리어로부터 빼앗으려 할 정도였다. 오데트 칸은 유력 와인 잡지의 수석 편집자였는데, 이후 자신의 잡지에 시음 순서가 프랑스 와인에 불리하게 조작되었다며 음모론까지 제기한다. 그러나 시음 순서는 즉석에서 제비뽑기로 결정된 것이기에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타임즈>의 프랑스 특파원인 조지 M. 테이버가 이 블라인드 테스트를 ‘파리의 심판’이라는 헤드라인을 내걸고 기사화를 하면서 일대 사건으로 기록되게 된 것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현지 프랑스 기자들은 당연히 프랑스 와인이 이길 거라고 생각해서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고, 조지 테이버 혼자서만 이 행사를 취재하러 갔다고 한다.


이를 기사화한 테이버 기자조차 행사를 참석하면서, 미국 와인이 그렇게까지 선전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갔다고 고백하였다. 이후 그는 당시 경연대회 모습과 5년여간의 추가 취재 내용을 곁들여 2005년 <파리의 심판>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는 영화 <와인 미라클>의 각본을 집필하는데 기초자료로 인용되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와인 업계는 한 마디로 초상집 분위기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프랑스는 나름대로 문화 대국이라 자랑하는 나라였고 프랑스 와인은 프랑스 문화의 정수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들의 와인에 대한 자부심은 정말 하늘을 찌를 듯한 것으로 유명했다.


예컨대, 이탈리아 와인을 시음해본 후 “프랑스산이 아닌 것 치고는 제법이네.”라고 해서 이탈리아인들을 무시할 정도였다. 이것이 왜 어이가 없는 예인고 하니, 앞서 와인의 역사에서 공부했던 바와 같이, 가장 오래된 와인 항아리 유물이 발견된 곳은 조지아이고, 조지아를 비롯한 코카서스 지역을 시작으로 소아시아, 고대 그리스, 이탈리아로 전래된 후 로마 제국 시대에 프랑스와 스페인 등지로 퍼져나갔다는 것은 부동의 정설이다. 그러니까 프랑스는 자기들에게 와인 제조법을 가르쳐 준 이탈리아인들을 향해 도리어 자신들이 최고라는 자뻑 의식을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콧대 높던 프랑스가 미국한테 박살나버린 것이다. 미국은 프랑스에 비하면 와인 제조 경력이 한참 뒤진 새내기 중에서도 풋내기에 불과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자기들이 문화적으로 한참 밑이라고 여기며 무시하던 미국이 자기네들보다 더 뛰어난 와인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된 후였다. 프랑스 언론들은 이 사건을 최대한 가십처럼 축소 보도했으나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할 길은 없었다. 당연히 다른 나라들은 이 와인계의 대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상황을 즐겼다.


이 시음회에 참가했던 평론가들은 본의 아니게 매국노 취급까지 받으며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대개 와인 관련 잡지 편집자,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 관계자, 유명 와이너리 소유주에 프랑스 와인 원산지통제위원회 총감독 등 와인 업계에서는 견줄 데 없는 한 거드름 피우던 분들이었는데, 이들이 졸지에 욕바가지에서 수영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업자득인 셈이었다. 특히 이 시음회를 주최했던 스티븐 스퍼리어는 영국인이었다는 점에서 프랑스인들의 욕을 몇 곱절로 얹어서 곱빼기로 먹었다.


한편 미국 와인 업계는 이 사건을 통해 근거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과학 기술을 동원하고 품종 개량을 하면서 지속적인 품질 향상에 노력했던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또한 이 사건으로 신대륙 와인들에 대한 편견이 어느 정도 희석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신대륙 와인에 대한 소비도 상당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와인 제조업자들은 이 사건 이후로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으며, 테스트에서 1위를 차지한 백포도주 샤토 몬텔레나와 적포도주 스택스 립은 열렬한 환호성 속에 동이 날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 사건 당시 샤토 몬텔레나를 만든 와인 제조업자는 와인 관련 모임에 참석하려고 프랑스의 유명 와이너리를 방문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의 결과를 조지 M. 테이버로부터 전해 들은 후 “저희 같은 시골 애송이가 만든 와인이 좋은 평가를 받아 영광입니다.”라는 겸손하기 그지없는 평을 남겼다. 그의 인격이 겸손하기 그지없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아무리 캘리포니아 와인이 객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더라도, 거만하게 있는 그대로 기쁜 티를 내며 인터뷰를 하게 되면 와인 업계의 주류였던 프랑스 와인업계로부터 찍힐까 봐 살아남기 위해 일부러 최대한 겸손하게 대답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와인업계에 확산되기 이전이던 프랑스 와이너리 사람들은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미국 와인도 프랑스 와인만큼 훌륭한 와인이 될 수 있다.”라고 그를 격려(?)해주었다.


뒷이야기에 의하면 이 미국 와인 제조업자는 그들의 앞에서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가, 프랑스인들과 헤어지고 난 후 자신이 탄 버스가 프랑스인들의 시야에서 멀어져 프랑스인들이 주변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친구들과 함께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

이후에 ‘파리의 심판’ 결과를 들은 당시 거만한 프랑스인들의 얼굴이 궁금하긴 했을 법도 하다.


레드 와인 시음에서 2위를 한 프랑스의 와인 샤토 무똥 로칠드의 경우, 1976년 5월, 파리의 심판 당시에는 보르도 그랑크뤼 1등급이 아니고 2등급이었던 상황에서 블라인드 테스팅에 나섰던 것이었는데, 무똥 로칠드는 2등급일 당시에도 ‘1등급이 아닌 2등급으로서 굴욕을 참을 수 없다. 무똥이 곧 나다.’라는 문구를 병에 직접 새겨 넣을 만큼 1등급 승급에 목이 매여있던 상황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던 와이너리 투어 오픈, 청원서 제출, 각종 로비를 통해 1등급 승급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는데, 듣보잡이던 미국 와인에게 1등을 내주긴 하였으나 프랑스 와인 중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2위를 하는 바람에 1등급으로 인정받는 소원은 이루게 된다.


‘파리의 심판’, 결과가 공표되자 무똥 로칠드의 주인이었던 바롱 필립 로칠드가 스퍼리어에게 전화를 걸어 불같이 화를 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선조의 뒤를 이어 4대째 양조장 주인을 맡게 되면서 2등급에 멈춰있는 것이 한이 되어, 1등급 승급에만 20년을 바쳤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목표로 했던 1등급 와인들은 물론이고, 그 자신이 심혈을 기울였던 사토 무똥 로칠드까지도 이름도 모르던 미국 와인에게 패배했으니 분통이 터질 만도 했다.


그렇게 한 달 뒤 1976년 6월 무똥 로칠드는 결국 당시 프랑스 농업장관이었던 자크 시라크에 의하여 1등급에 승급하였고, 이에 감격하여 1973년 빈티지에는 파블로 피카소의 부인에게 허락을 받아 병에 피카소의 그림을 박고 기존에 새겨 넣던 글자도 ‘난 2등이었다가 이젠 1등이 되었다. 무똥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새겨 넣어 자신감을 드러냈다.


다만 바롱 필립 로칠드가 아무리 자신감을 드러낸다고 해도, 이미 결과적으로 그리 콧대가 높던 프랑스 와인이 미국 와인에게 패하고 1위를 빼앗겼다는 사실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미 프랑스의 와인 부심은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이다.


한편, 미국에서는 파리의 심판 이후 2006년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파리의 심판 사건을 캘리포니아의 역사적 사건 중 하나임을 법률로까지 공표하였다. 그뿐 아니라 스미소니언 박물관에는 이 사건을 기리기 위해 레드, 화이트 와인 1위였던 Stag's Leap과 Chateau Montelena의 와인 한 병씩을 영구 소장 물품으로 지정하고 현재도 박물관에 진열하고 있다.

이후 이 사건은 수많은 와인 연구가들의 논쟁 대상이 되긴 하였으나, 전문가들의 결론은 하나같이 ‘당시의 평가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였기에 프랑스는 망가진 자존심을 도저히 회복할 길이 없었다.


‘파리의 심판’을 1979년에도 다시 한번?!

캘리포니아 와인, 진판델

3년 후인 1979년 프랑스의 미식 잡지 <골 밀로>에서 와인 올림픽이라는 행사를 주최하여 33개국에서 330종의 와인을 10개국 62명의 와인 전문가가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게 된다. 하지만 화이트 와인. 레드 와인 부분에서 모두 다시 미국의 제품이 1등을 차지했고 로제 와인 부분에서는 심지어(?) 스페인의 브랜드가 1등을 차지했다.


프랑스는 그렇게 리벤지 매치에서도 실패하게 된다. 7년이 지난 1986년, 동일한 와인으로 비교 시음회를 다시 한번 열면서 7년간의 절치부심한 성과를 보여주고 싶어 했지만, 이때는 아예 1위에서 5위까지를 모두 미국 와인이 차지하는 대참사가 벌어지며 격차를 더 벌렸다는 성적표를 받아야만 했다.


2006년 ‘(30주년 기념) 파리의 심판 Ⅱ’(A.K.A. 치욕의 날)가 열리다.

지금은 고인이 된 스티븐 스퍼리어

상기된 여러 재대결들은 프랑스 와인과 신세계 와인이 맞붙는다는 설정만 같을 뿐, ‘파리의 심판’의 정식 연장전의 형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2006년, 파리의 심판이 터진 지 30년이 지나자 그 사건을 기념하고 다시 재대결을 해보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프랑스 와인 측 주장은 “프랑스(특히 보르도) 와인은 장기숙성형 와인이므로, 오랜 숙성이 지난 와인으로 지금 다시 비교해보면 프랑스가 이길 것이다!”라는 마지막 자존심을 건 시비 아닌 시비였다.


1976년 파리의 심판 행사를 주관했던 스티븐 스퍼리어가 이번 행사도 주관하였기에 정식 파리의 심판 재대결이라고 보아 업계는 다시 술렁였다. 스티븐 스퍼리어 역시 “이번에야말로 보르도 와인이 승리할 것”이라며 재대결을 앞두고 30년 전의 뼈아픈 경험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고 한다.

2006년 5월 24일, 영국 런던의 Berry Bro's and Rudd와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의 Copia 박물관 두 곳에서 정확히 같은 시간에 1976년 심판에서 사용되었던 와인을 그대로 다시 가져와 대결을 펼치는 방식으로 2라운드 리벤지 매치가 열렸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1. Ridge Vineyards Monte Bello 1971 미국

2. Stag’s Leap Wine Cellars 1973 미국

3. Heitz Wine Cellars ‘Martha’s Vineyard’ 1970 미국

4. Mayacamas Vineyards 1971 미국

5. Clos Du Val Winery 1972 미국

6. Chateau Mouton-Rothschild 1970 프랑스

7. Chateau Montrose 1970 프랑스

8. Chateau Haut-Brion 1970 프랑스

9. Chateau Leoville Las Cases 1971 프랑스

10. Freemark Abbey Winery 1967 미국


1976년 당시 그나마 1등만 내주고 2,3,4등을 가져왔던 것과 달리 이번엔 상위 1~5등을 전부 미국에 내주어버린 참혹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보르도 그랑크뤼 가격이 70년대와 달리 천정부지로 치솟아버린 2006년 1등급 와인인 무똥 로칠드와 오브리옹이 가히 1/10~1/5 가격이라고 할 수 있는 와인들에게 더욱 처참하게 박살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와인 측에서 줄곧 주장했던 “장기 숙성이라는 점에서 프랑스 와인의 우수성은 해를 묵혀야 진가가 드러난다”라는 주장이 헛소리임이 증명된 것이었다.

당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유수한 마스터 오브 와인, 마스터 소믈리에가 참가하는 등 내로라하는 세계적 와인 전문가들이 참여하였다. 결국 화려한 부활과 자존심 회복을 하려던 리벤지 매치는 K.O패로 끝이 났다. 그리고 프랑스를 필두로 한 세계의 언론들은 이날을 ‘치욕의 날’이라고 불렀다


이 사건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원제가 다르다.

이 희대의 사건은 2008년에 <와인 미라클>이라는 영화로 제작되었다. 주인공 격인 스티븐 스퍼리어 역은 알란 릭맨이, 1위 와이너리 샤토 몬텔리나의 경영주 아들은 당시 신예 배우(?)였던 크리스 파인이 주연했다. 눈치챘겠지만 영화는 폭망했다. 우선 사실관계를 너무 왜곡한 것이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바렛은 극 중 샤토 몬텔레나 와인을 직접 제조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와이너리를 소유했을 뿐 제조는 다른 와인메이커에게 맡겼고 본업은 변호사이었다고 한다.


아들이자 다른 주인공은 보 바렛은 실제로 서핑에 심취한 히피였긴 했으나 히피 열풍이 꺼진 1970년대부터는 와인 제조와 경영 수업에 박차를 가하였고 1972년부터는 모든 와인 제조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런 식의 망나니는 아니었다는 점도 전혀 영화에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그는 현재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몬텔레나의 소유주이자 수석 와인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다. 당시에 실제로 와인을 만든 와인메이커는 마이크 그리치(Mike Grgich)라는 사람이었는데, 와인 마니아라면 알법한 Grgich Hills 와이너리가 이 사람이 차후 독립하여 창설한 와이너리, 되시겠다.

원래 마이크의 이야기도 영화에 중점적으로 담아내려고 했으나 본인이 사양하는 바람에 마이크의 이야기는 담기지도 않았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1036


매거진의 이전글 생산 지역에 따른 와인(Wine) 분류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