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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25. 2022

혼자 하는 것도 어렵지만 함께는 더 어렵다.

독야청청만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

子曰: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더불어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함께 道에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道에 나아갈 수는 있어도 함께 설 수는 없으며, 함께 설 수는 있어도 함께 權道를 행할 수는 없다.”

이 장에서는, 공자의 가르침이 지향하는 최종점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최종점까지 가는데 있어서 어떤 과정들을 거쳐 단계별 경지에 오르게 되는지를 아주 간략하지만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고문의 문법적으로는 점층의 수법을 사용하여 서로 맞물려 상위 단계로 확장해가는 설명 구조를 택하고 있는데, 네 가지 개념을 풀어 설명하여 共學, 適道, 與立, 與權이라는 용어를 푸는 방식이다.


주자는 이 장의 주석으로 아주 간략하게 아래의 한 문장만을 남겼다.


‘可與(가여)’는 더불어 함께 이 일을 할만함을 말한다.


여기서 이제 <논어> 9장까지 10개월이 넘게 공부해온 자라면 당연히 의문을 가져야 한다. 주자가 굳이 이 한 단어가 어려워서 주석을 달았을까? 눈치챘겠지만, 물론 그것은 아니다. 이전에 설명한 바 있지만, 주자 역시 고문을 공부하고 <논어>의 주석을 비교하고 자신의 의견을 단 교재용 해설서를 만들면서 공자만의 독특한 문법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고 있다.


즉, 이 주석은 이 장에서 가장 눈여겨볼만한 부분이라고 강조된 설명의 방식을 대신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 부분은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니 이 장의 내용을 모두 다루면서 다시 한번 언급하기로 하고, 이 장의 논리 확장 구조에 대해 배우는 자들을 위해 상세하게 설명한 정자(伊川(이천))의 주석부터 살펴보며 그 행간의 의미를 파악해보기로 하자.


“‘더불어 함께 배운다.’는 것은 구할 바를 아는 것이요, ‘함께 道(도)에 나아간다.’는 것은 나아갈 바를 아는 것이요, ‘함께 선다.’는 것은 뜻을 독실히 하고 굳게 지켜 변하지 않는 것이다. ‘權(권)’은 저울의 추이니, 물건을 저울질하여 경중(輕重)을 아는 것이다. ‘함께 權道(권도)를 행한다.’는 것은 일의 경중을 저울질하여 의리에 합하게 함을 이른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장은 共學, 適道, 與立, 與權의 네 가지 개념을 가지고 학문의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인 共學은, ‘구할 바를 아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구할 바를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찾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식을 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에 대해 일깨워줄 스승을 찾는 행위도 포함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시비(是非)를 구분하기 위해 제대로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그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 할 단어는 ‘共(함께)’라는 의미이다. 공부는 혼자서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굳이 두 글자로 동사+명사 구조를 취하는 4개의 개념에서 앞에 ‘共(함께)’라는 단어를 붙였는지 잘 기억하고 다음 글을 보자.


두 번째 단계로 제시한 것은 ‘나아갈 바를 아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동사의 자리에 ‘適(나아가다)’라고 하였는데 정자의 주석에 보면 이것 역시 ‘함께’ 나아간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정자의 이해가 어떤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단어를 넣었는지 역시 하나의 맥락으로 인지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나아갈 바를 안다는 것은 배워서 익혀 얻게 된 道로 학문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에 대한 부분을 콕 짚어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세 번째 단계의 ‘與立(함께 선다)’는 개념을 해설하며 ‘뜻을 독실히 하고 굳게 지켜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푼 것이다. 배우고 익혀 얻은 지식이자 그 道를 독실하게 굳게 지킨다는 것은 그대로 머리에 간직하고 있는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배울 때의 의미를 실제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즉, 배운 것과 실제의 적용이 다른 것으로 변질되거나 사욕(私慾)을 위해 곡학아세(曲學阿世) 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단계로 드디어 ‘權(권)’이라는 의미가 등장한다. 주석에서 설명하다시피 이것은 본래 ‘저울의 추’라는 의미인데, 물건을 저울질하여 경중(輕重)을 아는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말은 전성되어 고문에서 사용되면 ‘權道(권도)’라는 말로 새기게 되는데, 이 의미는 정자가 주석에서 설명하였다시피 ‘일의 경중을 저울질하여 의리에 합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눈에 그 의미가 쏙 들어오지는 않는다. 예컨대, 왜 ‘함께’라는 용어를 사용했는가 등에 대한 의문이 나올 것을 예상하여 양씨(楊時(양시))가 다음과 같은 해설을 해준다.


“자신을 위한 학문〔爲己之學(위기지학)〕을 안다면 더불어 함께 배울 수 있는 것이요, 학문이 충분히 善(선)을 밝게 알 수 있은 뒤에야 함께 道(도)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요, 도에 대한 믿음이 돈독한 뒤에야 함께 설 수 있는 것이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조처할 줄을 안 뒤에야 함께 權道(권도)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정자의 해설이 단계의 설명에 중점을 두었다면 양 씨의 해설은 조금 더 유기적인 그 단계별로 연결되는 고리에 중점을 두고 전체적인 과정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함께 배운다는 것은 처음부터가 아님을 설명하면서 자신을 위한 배움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다른 배우는 자들과 그 뜻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의미를 새긴 후, 배움을 통해 시비(是非)를 가릴 수 있는 안목을 갖추게 되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도(道)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기에 제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고, 그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도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게 서 있어야 함께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사용하는 ‘서다’의 의미를 다시 한번 명확하게 짚어준다. 공자는 이미 <논어>에서 이 ‘서다’라는 개념어를 자신만의 해석으로 수차례 언급한 바 있다. 앞서 ‘태백(泰伯) 편’의 8장의 ‘立於禮’가 그러하고, 뒤에 배울 ‘계씨(季氏) 편’ 13장에서 ‘不學禮無以立(예를 배우지 않으면 바로 설 수가 없다)’이 그러하며, <논어>의 가장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요왈(堯曰) 편’의 3장에서도 같은 의미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즉, 공자에게 있어 ‘서다’라는 개념은 ‘예를 제대로 알고서 확고하게 뜻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최종단계에 대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조처한다’라는 표현을 權道(권도)의 앞 단계로 설명한다. 이것은 본문에서 언급되지 않은 부분은 행간에서 끌어올린 것으로 공자가 최상위 단계라 여긴 ‘변통(變通)의 단계’를 의미한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지식을 응용하여 자유자재로 융통할 수 있는 독창성의 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고난 뒤에야 權道(권도)를 행할 수 있다고 못 박는다.


아까 주자가 단 한 줄의 주석을 달며 말했던 ‘可與(가여; 더불어 함께)’는 바로 이러한 모든 과정을 거쳐 마지막 단계를 달성하고나서야 ‘겨우’ 권도(權道)를 함께 할만하다고 설명한 것이다. 이 함께를 강조하려는 전체적 조화를 위해 맨 앞에 ‘공학(共學)’이라는 조어도 맞춰진 것이다.

최종단계로 지정하고 있는 그 ‘권도(權道)’의 개념에 대해 배우는 자들이 지금의 당신처럼 영 감을 못 잡을까 싶어 홍씨(洪興祖(홍흥조))가 나서 그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周易(주역)>의 아홉 卦(괘)가 ‘巽(손)으로 권도(權道)를 행한다.’는 말로 끝마쳤으니, 권도(權道)는 聖人(성인)의 큰 用(용)이다. 능히(제대로) 서지 못하면서 권도(權道)를 말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서지도 못하면서 걷고자 하는 것과 같아서 넘어지지 않는 자가 드물다.”


홍 씨는 여기서 센스 있게 앞에서 설명한 ‘서다’의 개념을 받는 것으로 학문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밟아 올라가야지, 엽등(躐等;단계를 건너뛰는 것으로 유학에서 최악으로 여기는 짓)해서는 안된다는 경계까지 함께 담아내고 있다.


정자(伊川(이천))가 혹여 그 의미를 또 오독할까 싶어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까지 상세히 곁들인다.


“한(漢) 나라 儒者(유자)들은 經道(경도; 常道)를 뒤집어 도에 합하는 것을 권도(權道)라고 하였다. 이러므로 權變(권변) · 權術(권술, 권모술수)의 말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잘못이다. 권도(權道)는 다만 경도(經道) 일뿐이니, 漢(한) 나라 이후로 權(권) 자의 뜻을 안 사람이 없었다.”


이는 고증학적인 관점에서 이전 시대의 학자들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명확하게 잘못을 지적하고 설명한 것으로, 그와 동일한 실수를 하지 말라고 콕 집어준 것에 다름 아니다. 잘못한 해설에 대해서 일침을 가하는 것은 정자역시 살벌하기 그지없는 말을 너무도 가볍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고증학적 지적에 대해 주자 역시 이 장을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은 주석을 통해 이전 선배 학자들의 잘못을 정리하되, 자신의 의견을 살짝 더 얹는 고급 수법으로 마무리한다.


내가 살펴보건대, 先儒(선유)들이 잘못하여 이 장을 아래의 ‘偏其反而’와 연결시켜서 한 장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경도(經道)를 뒤집어 도에 합한다.’는 말이 있게 되었으니, 정자가 이를 잘못이라 하신 것이 옳다. 그러나 <孟子(맹자)>에서 ‘嫂(수, 형수와 제수)가 물에 빠졌을 경우에는 손을 잡아서라도 구원해준다.’는 뜻으로 미루어 본다면 권도(權道)와 경도(經道)는 또한 마땅히 분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에 <맹자>의 구절을 예로 든 것은, 권도(權道)가 가진 본질인 상황에 따라 때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임시변통의 최고 단계를 적실하게 설명하기 위함이다.


평상시에는 교통법규를 잘 지켜야 하지만, 임신한 아내가 차에서 갑자기 양수가 터졌는데 119를 부르는 것보다 당장 비상등을 켜고 교통법규를 무시하고서라도 응급실을 달려가야 한다는 교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저 빨리 가기 위해 늘 습관적으로 교통법규를 어기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차이를 이해하고 운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대로 교통법규를 융통성 없이 지켜야 한다고만 하는 이들의 수준을 넘어서야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 네 가지 개념은 순서이고 과정임과 동시에 단계별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배우지 않으면 어떤 것이 도인지 알 수 없을 것이고, 겨우 그 도를 알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익히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예에 맞게 세울 수 없다면 실제 생활에서 적용하는 것은 요원해진다.


그렇게 하고 난 이후에서야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그에 맞게 적용하여 실천할 수 있는 것이고 반드시 필요한 때에 맞춰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권(權)’인 것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며 구독자 수나 라이킷이 포켓몬빵에 들어있는 띠부띠부씰이라고 착각하며 모으고 심지어 그것이 자신의 레벨이라도 된다고 착각을 넘어서 왜 자신의 글을 출판사에서 안 받아주는지, 혹은 왜 출판사들이 자신에게 출간하자고 하지 않는지 헛된 망상을 품는 자들을 적잖게 보게 된다.

처음엔 자신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을 터인데 어느 순간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망상에 빠져 자신이 정말로 ‘작가’ 수준이라도 된 것이라 자기 최면을 강하게 건 것을 보고 있자면 어이가 없다.


그나마 그 단계에 가지 않고 자신의 주제를 알고 찬찬히 소박하게 배워가는 글쓰기를 하며 잘 쓰인 글을 보며 수양을 해나가겠다는 초심자들은 그나마 기특하기라도 한데 정신 차리지 못하고 망상을 넘어선 이들을 보고 있자니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토요일에 드디어 <함께하는 매거진>의 돛을 올렸다.

https://brunch.co.kr/@ahura/1052


마치 일부러 그것에 인용하기 위해 시기를 맞추기라도 한 듯 이 장이 이렇게 월요일 아침에 그 내용의 증거로 우뚝 나타나 주었다.


내가 현재 연재하는 다양한 장르의 글 중에서 가장 분량이 짧은 것이 A4 4장짜리인 이 <논어 읽기>이다. A4 4장도 길다고 버벅대거나 대강 훑거나 아예 읽지 않고 넘어가버리는 이들이 대다수인 브런치인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심지어 A4 7~8장이나 되는 글까지 올리는 것인가?


누군가 댓글에 달았다. 다른 이들이 하는 것처럼 차라리 몇 회로 나눠서 올리시면 읽기도 편하고 사람들도 더 많이 클릭하고 많은 양을 연재하는 부담도 적을 텐데, 라며 말이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는 목적이, 그 정신 나간 망상 환자들과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글이라는 것이 읽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갖춰야 할 가장 효과적인 형식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생애를 오롯이 돋보기를 들여다보며 읽고 그 인생을 통해 그리고 그 실패를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통해 공부하는 마음을 움직이는데, 흐름을 3일 차로 끊으면 온전히 생각이 전달될까?


지금은 잠수를 타고 잠적해버린 발검 스쿨의 전 반장이 자신이 구독하는 사람을 50명을 넘기지 않는 이유를 말한 것이 떠오른다.


“저는 새벽마다 제가 구독하는 50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의 평온한 하루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그들의 글이 발행되면 정성을 다해 읽습니다. 50명이 제 한계입니다. 50명이 넘으면 최선을 다할 수 없습니다.”


이 장의 가르침대로 나는 더불어 함께 배운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한다.

30년 전에 이룬 출간 작가의 쓸모없는 이름이나 이미 100여 권 출간해서 책을 내는 게 꿈인 입장도 아니기에 나는 ‘더불어 권도(權道)를 행할 이들’을 구할 뿐이다.


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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