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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26. 2022

마음이 없으니 멀다고, 어렵다고 말하는구나.

뭔가 행하고 나서 어렵다고, 멀다고 말하려무나.

“唐棣之華, 偏其反而! 豈不爾思? 室是遠而!” 子曰: “未之思也, 夫何遠之有?”
唐棣(산사나무)의 꽃이여! 바람에 흔들리는구나. 어찌 너를 생각하지 않으리오마는 집이 멀기 때문이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어찌 멂이 있겠는가.”

이 장은 앞에 뜬금없는 한 편의 시구가 등장하여 해석에 혼선을 자아낸다. 이 시는 출전이 밝혀져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남아 있지 않다. 그저 그 내용을 공자가 인용한 것이다. 즉, 공자가 평하는 직전까지의 전반부는 모두 어디선가 들었던 시이다.


그 시에 대한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唐棣(당체)’는 郁李(욱리, 산앵두나무)이다. ‘偏(편)’은 《晉書(진서)》에는 翩(편)으로 되어 있으니, 그렇다면 ‘反(반)’도 또한 마땅히 翻(번)과 같아야 할 것이다. 이는, 꽃의 흔들림(되침)을 말한 것이다. ‘而(이)’는 어조사이다. 이 시는 逸詩(일시)이니, 六義(육의)에 있어 興(흥)에 속한다. 앞의 두 句(구)는 뜻이 없고, 다만 아래 두 구의 말을 일으켰을 뿐이다. 여기에 이른바 ‘너’란 것은 또한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다.


주석에서 주자도 곤란해했던 것처럼, 이 시가 어디에서 인용된 시인지도 모르고 심지어 4구절 중에서 앞의 두 구는 날아가버린 채 뒤의 두 구절만 인용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게다가 정확하게 시인이 ‘너’라고 지칭한 것에 대한 정체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에도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한다.


결국 이 시를 인용하고 평가한 공자의 시평(詩評)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공자가 인용한 단 두 구의 시 내용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나무에 핀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며, 집에 있는 누구(무언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집이 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한탄하는 내용이다.


그저 애정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공자가 인용했고 그 시평을 보면 그렇게 간단하게 덮고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공자는 이 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어찌 멂이 있겠는가.”라고 시의 내용을 반박하고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서 생각하지 않는 이유를 집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부분은, 반대로 비틀어 집이 먼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본질을 콕 집어낸 것이다.


그래서 시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주석을 달았던 주자는 공자의 의중을 읽는 것에는 명쾌하게 다음과 같이 주석을 붙였다.


夫子(부자)께서 시(詩)의 말을 빌어 반박하신 것이니, 이는 앞 篇(편)에 “仁(인)이 멀리 있는가?”라는 뜻이다.


주자는 인용된 시에서 시인이 지칭한 ‘너’의 정체는 파악할 수 없었으나 최소한 이제까지 행간까지 파악할 수 있었던 공자가 이 시를 인용하며 말하고자 했던 내용의 핵심이 ‘仁’에 있음은 확신을 한 것 같다. 앞서 공부했던 술이(述而) 편’ 30장에서 “인이 멀리 있단 말인가? 내가 인을 바라면 인은 곧 나에게로 다가온다.”를 인용하며 공자가 지적하려 했던 당대의 세태를 바로 짚어낸다.


즉, 마음만 먹으면 인(仁)이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자기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기고 아예 이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릇된 세태를 풍자했다고 해설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 정자(伊川(이천))가 동의하며 배우는 자들을 위해 조금 더 상세히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을 해준다.


“聖人(성인)은 일찍이 쉬움을 말씀하여 사람들의 뜻(마음)을 교만하게 하지도 않고, 또한 어려움을 말씀하여 사람들의 진전을 가로막지도 않는다. 다만 말씀하시기를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어찌 멂이 있겠는가.’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이 지극히 함축성이 있어서 뜻이 深遠(심원)하다.”


이것은 공자의 가르침과 설파의 방식에 대한 총괄적인 해설이다. 바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너무 완곡하게 이야기하여 전혀 다른 이야기로 오독하게 하지도 않는 방식. 너무 쉬운 것이니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라 가르쳐서 교만하게 달려들지 않게 하며, 또 너무 대단한 것이라고 어려움을 강조하여 감히 일반인은 범접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고 여겨 지레 포기하게 하게 만들지도 않는 그 적절선을 유지하는, 절묘한 가르침과 설파의 방식을 극찬하고 있다.


이 장에서의 그 짧은 평가가 그러한 공자의 가르침과 말하기 방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정자는 느꼈던 것 같다.



내가 전공으로 삼는 것에서부터 나는 내가 배웠던 모든 것을 가르치는 단계까지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 골치 아픈 성향 탓에 전혀 나와 무관할 것 같은 것들을 꽤 많이 가르쳐왔다. 무예가 그러했고, 운동이 그러했으며, 아침마다 공부하는 고문이 그러했고, 그림이 그러했고, 음악이 그러했다.


그런데 그렇게 배워나가고 어느 순간 제자들을 두고 가르치게 되면서 그 분야는 저마다 달랐지만, 내게 가르침을 주었던 선생님들을 통해서도 그러하고 내가 가르쳤던 제자들을 통해서도 그러하고 내가 배우고 내 배움을 정리하고 내 배움을 더욱 높은 경지의 것으로 바꾸는데 그 모든 과정을 어느 하나 필수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이 모두 다 내 맘 같지 않으며 한 명 한 명이 저마다 개성이 다른 관계로 그들에게 맞춤 교육을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공자식 맞춤 교육은 일단 가르치는 사람의 능력을 넘어선 어마어마한 노력과 관찰력을 넘어서는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에게 가르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며 왜 그것을 배우려 하고 그의 부모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환경에서 자라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을 조사나 수사를 하지 않고 그가 배우는 과정에서 파악해내야만 진정한 공자식 개별 교육이 완성된다.


자기가 가르치는 제자의 이름이나 어디 출신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어, 어’하면서 인사를 받는 선생들이 발에 차이는 세태에서는 초능력에 해당한다고 숭앙받을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학교수에 해당하는 문제이지 유치원 선생이나 초중고 교사들은 최소한 자기 반 아이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고 변명하고 싶은가?

아니. 심각한 문제는 그들에게서부터 배태된다.

그들이 학적부라는 이름으로 대강 파악하고 있는 편린에 해당하는 사실들은 진정한 통찰력에 의해 습득된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그러한 껍데기 정보는 그들의 선입견을 만들기에 딱 좋다.


선생이라 불리는 자가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에 대해 스스로 여러 가지 통찰력을 통한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들을 읽어내는 것은 그렇기에 맞춤 교육에 더더욱 필요하다. 현행 교사들이나 대학교수들에게 그런 것을 요구한다면 그들은 혀를 내두르며 자기 자식도 그렇게 열심히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후안무치한 대답을 버젓이 내놓을 것이다.


갑자기 공자가 당대를 비판한 내용을 공부하다 말고 왜 쓸데없는 자신의 초능력을 자랑하느냐고 말하고 싶은가? 어제 내가 발검 스쿨의 전 반장이 왜 브런치에서 구독을 50명으로 한정하는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 바 있다.


브런치가 다음카카오에서 허접한 글판 하나 벌여놓고 얼마나 많은 개인정보와 다양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돈으로 환산하려는 의도인지에 대해서는 내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알 바도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이른바 ‘작가’라고 부르고 불리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는 당신들이다.


나는 내가 구독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내 글을 한 번이라도 읽고 라이킷을 찍거나 댓글을 단 이들의 글을 하나하나 꼼꼼히 다 읽는다. 그리고 그 행간에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한다. 수사하거나 조사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몸에 밴 행동일 뿐이고, 내 글을 정성 들여 읽어주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에 그것은 내게 있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내게 당연한 것이 다른 이들에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정말 큰코다치게 된다. 내가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지고 박살 나며 당혹스러웠던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브런치는 익명성을 담보하고 있다. 나 역시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글을 쓰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글은 지문보다 더, DNA보다 더 그의 사상과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물론 행간의 지문과 DNA를 판독할 수 있는 이들에 한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쉽다고도 할 수 없겠으나 도저히 불가능한 초능력은 당연히 아니다.


논어를 강독해나가던 작년 초창기에 지금은 멀찍이 도망가버린 몇몇의 가깝던 발검 스쿨 학도들이 ‘仁’이라는 개념이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불만 아닌 질문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왜 그들이 그렇게 ‘仁’을 어려워했을까?


이 장에서 공자는 ‘仁’을 이야기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공자는 표면에 단 한마디도 ‘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논어>를 공부하는 학도들은 모두 그것이 ‘仁’이라고 매직아이처럼 행간에서 떠오르는 그 글자를 인식한다.


고문을 제대로 읽지 못하지만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동양고전 공부의 시작은 역시 <논어>가 정수라며 아침마다 이 글을 읽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왜 그들은 어렵다고 여기는 ‘仁’을 다른 선배 학자들은 ‘仁’이 언급되지도 않은 이 장에서 ‘仁’을 떠올렸던 것일까?


먼저 앞에서 뜬금없이 화두로 제시했던 공자의 개별적 교육방식을 위한 스승이 갖춰야 할 능력에 대해 왜 그 이야기를 꺼냈던 것인지부터 이제 설명해줘야 할 것 같다. 스승에게 뭔가를 우는 자는 자신이 배우기 전이기 때문에 배워야 할 것에 대한 지식이나 예비 상식이 전혀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 안다면 취사선택하거나 혼자서 공부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의 가르침은 개별적 특수성을 강조한다. 누군가는 더 알고, 다른 누군가는 더 적게 알 수 있으며, 서로 틀리는 부분이 저마다 다르고, 이해하는 폭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최고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학생이 노력할 것이 아니라 그 학생의 스타일을 모두 읽고 파악한 스승이 그것에 맞춰 이해하기 쉽게 맞춰 잠재된 능력을 일깨워주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자의 가르침은 앞서 발검 스쿨 학도들같은 초심자들에게는 어려운 개념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거기에 큰 간극이 있다. <논어>는 최소한의 말귀는 알아들을 수준에 오른 자들이 배우는 고문이다. 아침마다 내가 이렇게 해제를 붙여가며 해설해주어도 어렵고 이해하지 못하는 초심자들에게는 어려운 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서를 차근히 밟아온 사람들에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신에게 맞춤과 같이 들리는 마법을 선사해준다. 이유는 다양한 군상이던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다양한 맞춤 질문과 답변이 모두 담겨 있어 비교하고 분석하여 나에게 맞출 수 있도록 편집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더 큰 함정이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무리 학생들을 면밀히 파악하고 브런치의 글을 통해 그 사람을 모두 읽어내고 심지어 그 사람 자신도 모르는 심리 내면의 자아까지 읽어냈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것을 통해 더 발전하고 싶어 하거나 더 나아가고자 하는 열의와 성의를 가지고 가르침을 구하지 않는다면 내가 파악한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여러 나라를 대표하는 유수한 대학에서 다양한 나라의 학생들을 가르쳐보면서 나는 그 나라의 미래를 본다. 그들이 결국 그 나라를 구성하고 이끌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면 이후 10년 뒤 그 나라의 미래가 보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자신들은 노력하지 않으면서 교수는 최선의 것을 줘야 한다고 뻔뻔하게 요구하는 것들의 미래는 당연히 없다. 암담하다고 표현하지 않고 ‘없다’라고 표현한 것은 아주 적실한 표현임을 실제로 그들의 행보를 통해 확인하곤 한다. 자신들이 충실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서도 상대가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온갖 난리를 부리는 이들에게 미래라는 것이 주어질 리 없기 때문이다.


브런치의 당신들은 그렇지 않은가? 아침에 생각을 정리한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곱씹는 것도 아니고 대강 스크롤 쓱쓱 내려가며 자신이 뭘 오독했고 뭘 제대로 파악했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아침마다 논어 한 장씩을 읽는 지식인 입네, 스스로를 자위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말이다. 당신이 모르는 것을 한 번이라도 사전을 찾아가면서 검증해보았나?


다른 책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레퍼런스를 뒤져본 적이 있던가? 아니, 맨 앞에 나오는 한자는 어차피 알아먹지 못할 것이라며 한번 써보는 것은 고사하고 읽지도 않고 그냥 해설 부분부터 당연히 읽어놓고는 읽었다고 자부하지는 않았느냔 말이다.

다 좋다. 가장 중요한 것. 그렇게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개발된 마음이 움직여진 그것을 실천에 옮겨본 일이 있던가? 무예를 닦으러 온 제자들에게 무예를 가르치다가 묻는다.


“길을 가다가 연약한 아가씨를 괴롭히는 양아치들을 보면 너희는 어떻게 하느냐?”


그들은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을 보았다.


당신이 매일 아침 논어 공부를 하면서, 그리고 내 다른 매거진에서 사회의 부조리한 것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저 대리만족으로 통쾌하기만을 느끼려 한다면 당신의 공부는 잘못되었어도 한참이 잘못된 것이다.


올바른 것이 무엇임을 아는 것, 그것을 생활에 실천해 보이지도 못하면서 라이킷 품앗이나 하고 공허한 낙서만을 발행하는 것이 당신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드디어 <논어>의 ‘자한(子罕) 편’이 끝났습니다. 9편까지 달려왔으니 분량면에서는 절반에 근접하였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시작한 공부를 실행해보자는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매거진으로 론칭시키고 마음이 조금 급해져 글에 너무 날이 서있는 것은 아니었나 하는 반성이 듭니다.


다정한 학도의 댓글처럼, 아직 서툴고 처음이라 어떻게 실천에 옮겨야 할지, 마음부터 몸까지 더디 움직이는 것을 멀찍이 바라보는 제 마음이 괜스레 혼자서 달려가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학도의 말처럼, 조금씩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의감에 마음이 무젖어 가는 것을 느낀 것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할 일인데 말입니다.


제가 조바심을 내는 것은, 공부가 공염불이 되지 않기 위해, 그 어려운 첫걸음을 떼어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도와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남을 돕는 게 아니라 자신을 완성시키고, 잘못된 환경을 바로잡는 것, 그것이 배운 자의 도리이고 나아갈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 이해하기 어렵다는 ‘仁’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일부터는 <논어> 10편인 ‘향당편(鄕黨篇)’으로 들어갑니다.


늘 그렇듯이 내일 아침에도 먼저 와서 책 펼치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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