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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27. 2022

겸손이 아니다. 당신이 해야 할 도리를 할 뿐이다.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 침묵하는 당신의 고무줄 정의를 꼬집다.

孔子於鄕黨, 恂恂如也, 似不能言者. 其在宗廟朝廷, 便便言, 唯謹爾.
孔子께서 鄕黨(지방)에 계실 적에는 信實하게 하시어 말씀을 잘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셨다. 孔子께서 宗廟와 朝廷에 계실 적에는 말씀을 잘하시되 다만 삼가셨다.

이 장은 향당편(鄕黨篇)의 첫 장이다. ‘향당편(鄕黨篇)’은 주로 공자의 평상시 생활을 묘사하는 부분이 많이 등장하는 편인데, 그래서 묘사하는 형용사들이 많고 ‘如(~인 것 같다)’라는 표현으로 인상비평 같은 느낌을 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이런 묘사가 위주인 고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용사나 그 의태하는 용어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주로 왜 그런 표현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미를 찾아 핵심을 파악해내는 것이 더 주요한 키포인트로 작용한다.


이 장에서도 공자가 향당(鄕黨)에 있을 때와 宗廟혹은 朝廷에 있을 때를 비교하여 완전히 다른 행실을 보였음을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 장의 첫 글자로 나왔기 때문에 이 장의 편명이기도 한 향당(鄕黨)의 뜻부터 명확하게 새길 필요가 있겠다. 향당(鄕黨)이란, 그냥 시골이라는 의미가 아닌, 고향에 해당하는 부형(父兄)과 종친(宗親)이 계신 곳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왜 그 향당(鄕黨)에서는 ‘信實하게 하시어 말씀을 잘하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을까?


주자는 그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으니 살펴보기로 하자.


‘恂恂(순순)’은 신실한 모양이다. ‘말씀을 잘하지 못하는 것처럼 한다.’는 것은 겸손하고 온순하여 지혜로써 남에게 앞서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향당은 부형과 종족이 계신 곳이므로 공자께서 거하실 적에 그 용모와 말씀이 이와 같으셨던 것이다.


아무리 천하의 공자라고 하더라도 친족이 계신 마을에서는 나이 많은 어른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예의였음을 기본으로 삼았다는 전제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평소에도 겸손하고 온순하며 지혜로서 다른 사람의 우위에 있다는 것을 나대면서 아는 척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에 있어 당연히 있을 수 없는 행동이고 해서는 안될 경거망동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특히나 여기서 향당(鄕黨)을 특정 지어 宗廟와 朝廷에 대비한 위치에 설정하여 묘사한 것은 의미하는 바가 명확히 있다는 것임을 예상하게 한다.


비교와 대조의 구조를 취하고 있을 때, 한 가지 방향의 설명이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으면, 취하는 방법은 당연히 반대쪽에 있는 묘사와 설명을 통해 말하는 이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宗廟와 朝廷에서는 왜 말을 그렇게 잘하는지, 그러면서도 왜 삼갔는지에 대한 부분을 주자의 주석을 통해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便便(편편)’은 말을 잘하는 것이다. ‘宗廟(종묘)’는 예법이 있는 곳이요 ‘朝廷(조정)’은 정사가 나오는 곳이니, 말을 명확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자세히 묻고 극진히 말씀하되 다만 삼가서 함부로 하지 않으셨을 뿐이다.


주자가 꼽은 핵심 한 가지. 宗廟와 朝廷이 뭘 하는 곳인지에 대해서 핵심을 설명하고 난 뒤, 말을 명확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장소임을 다시 역설한다. 명확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불가피성에 대한 설명은 그것이 전례와 법규를 명확하게 따라야 하는 장소이고 일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고, 무엇보다 그 자리에서 수행해야 할 의무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그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주자의 해석을 그저 그렇게 고개만 끄덕이고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은미하게 핵심을 행간에 깔아 두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본문에서도 나왔지만, 말을 명확하게 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삼갔다’는 것은 사실 이 장의 방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자도 주석의 마지막 구절에 ‘반드시 자세히 묻고 극진히 말씀하되 다만 삼가서 함부로 하지 않으셨을 뿐이다.’이었다는 설명으로 마무리를 한다.

말을 잘했다는 것이 자신의 주장을 주로 하거나 자신이 나대면서 아는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묻고 극진히 말씀했다는 것은, 잘못되어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될만한 부분에 대해 질문의 형태로 지적을 하였고, 행여 다른 사람들이 그 부분에 대해 잘못된 것이 아닌지에 대해 되려 질문을 하였을 때 그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히 설명해주었다는 것을 상세히 설명한 대목이다.


즉, 삼가는 방식이 그저 말을 할 때는 잘했지만, 가능하면 말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정도의 겸손의 의미로 오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을 때는 주저하지 않고 그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하고 질문하여 그 잘못을 바로잡았으며, 상대가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이 있어 잘못이 아니냐고 따져오거나 했을 때는 또한 명확하게 그것이 왜 문제가 되지 않는지에 대해 상대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명료하게 설명하여 자신이 宗廟와 朝廷에서 해야 할 역할과 의무에 대해서 충실하게 이행한 것이 바로 말을 잘해야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양쪽을 비교하고 나니 이제 뜻이 조금 명확하게 드러나서 이해가 되는가? 이 장은 현대 해설서에서 오독하여 제멋대로 포장하듯, 단순히 그렇게 똑똑한 성인 공자의 겸손한 생활을 나타내는 따위의 표현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 수 있겠는가?


맞다. 이 장이 가리키는 핵심은 자신이 있는 위치를 때와 장소에 맞게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시중(時中)’이라는 개념을 행간 저 깊숙이 담아두고 있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요 며칠 전에 배웠던 ‘권(權;저울질하다)’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시중(時中)’이라는 개념은 성인의 가르침에 지향하는 목표점 중에 하나이다.


사전적인 의미는 ‘때에 맞추다’ 정도의 의미인데, 단순히 타이밍의 문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이른바 TPO, 즉, 시간, 상황, 장소에 맞게 행동해야 함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래서 마지막 주석에서는 이 장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한 줄로 요약한다.


이 한 절은 공자께서 향당과 종묘와 조정에 계실 때의 언어와 용모가 똑같지 않음을 기록한 것이다.


많이 배우고 성인이고 모두에게 존경받는 입장이라면 고향에 가서도 거들먹거리며 말 한마디를 해도 무게 있게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며 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공자 당시를 비롯해서 2500여 년이 지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구는 종자들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이 장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참람된 것인가를 지적한다. 고향에 내려가서 성인의 위치와 성인의 역할은 가문에서 가장 막내이고 그 말에서 코 찔찔이로 뛰어놀던 꼬맹이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 어르신들 앞에서 이제 내가 성인으로 추앙받는 대학자이니 나한테 함부로 굴어서는 안 되며 내가 몇 마디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소이다,라고 구는 것이 얼마나 참람된 행동인지에 대해서 우회적으로 그렇지만 훨씬 더 따끔하고 아픈 죽비를 후려치고 있다.


한편, 조정의 관리가 되어 어느 정도 그 위치를 수행해야만 할 위치에 올랐으면서도 오히려 자신보다 위에 있는 관리들이나 권력자의 눈치를 보면서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당대와 2500여 년 이후의 이들에게 같은 기준으로 일침을 가하고 있다.


앞서 공부하면서 설명한 적이 있지만, 공자가 노나라에 절망하고 조국을 떠나면서 천하를 주유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노나라 정공(定公) 9년, 그러니까 공자의 나이 51세에 중도(中都)의 읍재(邑宰)로 임명된다. 군주의 직할 하에 있었으므로 정공이 직접 공자를 그 읍재(邑宰)로 삼은 것이다. 공자는 중도재(中都宰)로 취임하게 되자, 곧 백성들의 생활 방식과 장례 절차를 정해서 그 법규와 규율에 맞게 실시해 나가도록 독려하였다.


그 결과 1년 만에 중도읍은 질서와 안정을 찾게 되었고, 민심이 순후해졌으며 사방의 제후들이 공자의 방법을 본받아 시행하였다고 기록에 전한다. 작은 읍재를 1년 만에 변화시킨 공자의 능력을 확인한 정공은 다음 해 당시 권력을 휘두르던 대부들인, 삼환가(三桓家)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공자를 사공(司空)에 임명한다.


사공(司空)이란 물과 토지를 관할하는 관직의 장관으로 현재의 건설부나 농림수산부를 총괄하는 관직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직책 역시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자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다시 대사구(大司寇)라는 중직에 임명된다. 대사구(大司寇)는 한 나라의 옥송(獄訟)과 형벌을 주관하는 장관으로 지금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중임이다.


이쯤 되면 공자에 의해 이제 노나라의 사법개혁이 이루어지고 모든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설 수 있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아름답게 공자의 개혁을 완성시켜주지 않았다. 군주보다 더한 권력으로 자신들이 해 먹는 방식에 저해가 될 것이라고 심한 견제를 하던 삼환가(三桓家)와 노나라가 공자에 의해 강대국이 될 것을 우려했던 제(齊) 나라의 견제로 결국 공자는 정공 13년, 그의 나이 55세에 쫓겨나듯 벼슬을 그만두고 자신의 조국을 떠나게 된다. 이 당시의 상황은 뒤에 공부하게 될 ‘미자 편(微子篇)’ 4장에서 나오니 그때 다시 상술하기로 하자.


내가 굳이 공자의 짧지만 굵었던 잘 나갈 뻔했던 그 시기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공자는 자신이 있었던 자리에서 그 본분과 의무를 다 하는 것으로 모든 이들의 추앙을 받는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뭔가 대단한 것을 했다기보다 그는 그가 맡았던 자리에서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만으로 그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임을 설명하고자 함이다.


공자가 마지막 관리직이던, 현대의 법무부 장관의 자리에 오르자 극렬하게 린치하고 음모까지 꾸며 공자를 낙마시켰던 이들은 두 세력이었다.


내부에서는 자신들이 군주를 무시하며 제멋대로 살아가던 삼환가(三桓家)였고, 밖으로는 노나라가 사법개혁에 성공하게 되면 훨씬 더 강대한 나라가 될 것을 우려한 인접 경제국이었던 제나라였다.


법무부 장관이라고 하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지 않은가? 사법개혁이라고 하니 굉장히 익숙한 용어 아닌가?


최소한 2500여 년 전 법무부장관직에 올라 사법개혁을 하려던 공자를 견제하던 이들은 백성(국민)들이 힘겨워질 거라는 같잖은 명분은 들이대지 않았다.


하긴, 가장 먼저 핵심부터 논해야겠다. 공자는 자기 자식을 로스쿨이나 의전원에 넣으려고 주변의 동료 교수들에게 품앗이를 하지 않았고, 법인카드 같은 공금으로 골프 치러 다니고 자기 돈으로는 절대 가지 않을 비싼 곳에 가서 밥 먹고 술 먹고 해 놓고서는 그것이 관례라고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는 내로남불 따위를 하지 않았다.

국민들에게는 다소 실생활과는 다소 멀어 보이는 ‘사법개혁’, 일반 국민 대다수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검수완박’ 따위의 단어가 정국의 헤게모니가 되어 있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국민은 극히 드물 것이다. 물론 ‘사법개혁’은 공자 당시에나 지금이나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개혁’이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그 단어는 현재의 상황이 다 뜯어고쳐야 할 정도로 썩어 있음을 전제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개혁을 하자고 했을 때, 개혁을 하자고 하는 이들이 내로남불로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포장해서 그렇게 하고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뭔가를 끌고 가려는 꼼수가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복잡한 정치공학적인 셈법은 일반 국민인 당신이 알 필요도 없고, 법학이나 정치에 혜안을 가지지 못한 비전공자인 당신이 알리도 없다. 하지만 당신도 알 수 있는 아주 명확하고 단순하며 수천 년을 가로지른 명쾌한 논리가 한 가지 있다.


잘못된 것이 있으니 개혁을 하자고 했을 때, 그것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삼환가(三桓家)와 나라 같은 것들이 나쁜 놈이라는 것이다. 개혁을 했을 때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당하고 이제까지 자신들이 멋대로 했던 것에 저해가 오고, 그것으로 인해 그 사회와 나라가 정돈되었을 때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느끼는 것들이 극렬한 반대와 음모와 견제를 하는 것임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단 말이다.


공자 당시에 그러했고 지금도 변치 않고 그러하듯 ‘사법개혁’은 잘못된 것이 없다. 그 취지가 좋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자는 것이며, 지금 그것을 전횡하여 자신의 이익으로 삼고 무기로 삼았던 자들에게 그래서는 안된다고 명확하게 일침을 가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말자고 하고, 그나마 눈치 보면서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천천히 조금씩 바꿔가자고 하고 그렇게 하자고 국회에서 합의한 후, 다시 말을 바꾸고 하는 따위의 행위는 결국 그렇게 되면 불편해지는 자들이 하는 언행이란 말이다.

물론 사법개혁이라고 적고서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끌고 가려는 자들이 있는 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별개의 문제이다. 특히, 사법개혁을 하겠다고 하는 이들이 그것에 극렬히 반대하는 자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도덕적 흠결과 심각한 모럴 헤저드에 빠져 그놈이 그 놈인 상황이라면 참으로 심각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임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난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향당편의 첫 장은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이미 수천 년 전에 내놓고 있다. 당신이 서 있는 그곳, 지금, 그 상황에서 본래 해야 할 도리에 맞게 행동하고 말하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전에 당신이 그만한 위치에 어울릴만한 지식과 실천할만한 능력을 갖췄다는 전제는 기본이 되어야 한다.


당신이 착각하고 있을까 봐 명확하게 다시 말해준다. 당신이 자신은 올바르게 살고 있는 착실한 가장이고 엄마이며 착실한 자식이고 부모라는 자기 최면 따위로 자위하지 마라. 당신이 단 한 번이라도 주변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한 적이 있던가? 그 간단한 전화 한 통, SNS에 공유하고 다른 이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행동에도 동참하지 않으면서 당신이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소시민 인양 포장하지 말란 말이다.


아래 글을 다시 한번 읽고서 당신의 양심에게 물어보라. 당신이 지금 무슨 작은 실천이라고 보이면서 그런 변명을 하고 있는지.

https://brunch.co.kr/@ahura/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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