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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28. 2022

윗사람에게 웃으며 바른 소리를 하는 법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이유를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朝, 與下大夫言, 侃侃如也; 與上大夫言, 誾誾如也. 君在, 踧踖如也, 與與如也.
朝廷에서 下大夫와 말씀하실 적에는 剛直하게 하셨으며, 上大夫와 말씀하실 적에는 和樂하게 하셨다. 군주가 계시거든 공경하여 편안치 않은 모습이셨고, 위의가 알맞은 모습이셨다.

앞서 이 편의 첫 장에서는 향당에서와 조정에서 공자가 언행을 달리 했던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번 장에서는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조정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조정이라는 것은 벼슬을 하는 관리의 입장에서 사무실에 갔을 때의 상황이니 공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위 원문에서 조정(朝廷)이라 번역하였지만,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이 단어는 물론 중국의 관습에서 유래한 단어로, 신하들은 해가 뜨기 전에 궁에 출근해야만 했다. 그렇게 궁에 출근해서 군주가 출어(出御)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조정(朝廷)의 ‘조(朝)’라는 의미는 출근해서 신하들이 아침에 모이는 뜰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들은 출근해서 군주가 나오기 전까지 군주를 기다리며 나름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예비 회의를 웅성거리며 하는 것이다. 이 상황은 상대부와 하대부 모두가 함께 모이는 자리이니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당연히 처신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상식을 인지해둔 상태에서 이 장에 대해 주자가 뭐라고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이것은 군주가 조회를 보지 않을 때이다. 《禮記(예기)》〈王制(왕제)〉에는 “제후의 상대부는 경이요, 하대부는 다섯 사람이다.” 하였다. 허씨(허신)의 《說文解字(설문해자)》에 “‘侃(간)’은 강직함이요, ‘誾(은)’은 화열하면서 간하는 것이다.” 하였다.


사실 이 상황을 보면, 당시 하대부의 벼슬에 해당하던 대사구 벼슬을 하던 공자의 입장에서 하대부는 동료 혹은 조금 밑의 사람일 수 있고, 상대부는 당연히 자신보다 윗 상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해석의 논란이 좀 있기는 하다.


위의 주석에서처럼 주자는 《說文解字(설문해자)》를 근거로 하여 같은 하대부들과는 좀 깐깐하게 굴었다는 식으로 해석하였는데, 일부 학자들은 주자의 해설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서 간간(侃侃)만 쓰면 말투가 강직한 것을 의미하지만, 간간여(侃侃如)라고 쓰면 화락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같은 신분에 해당하는 이들에게 강직하고 꼬장꼬장하게 했다고 풀이하지 않고 분위기가 부드러웠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공자가 상대의 신분에 맞춰 언행을 분명히 다르게 하였다는 점이 방점이 있다는 의미에는 큰 변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현대의 의미로 해석하여 자신보다 비슷하거나 아랫사람에게는 꼬장꼬장하게 굴었고, 자신보다 상관에게는 온화하게 굴었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공자가 사회생활을 아주 슬기롭게(?) 현대식으로 했구나,라고 오독하며 흐뭇하게 웃는 자가 없기를 바란다.


다음 이어지는 내용에서 나오다시피 군주가 나와 정식 회의를 주재할 때는 당연히 가장 높여야 할 군주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언행에 각별히 주의했다는 묘사가 나온다. 이것은 군자가 없어 정식 회의가 시작하게 전에 신하들끼리 모여있을 때의 상황에서도 명백하게 신분의 구분이 지어져 있어 자신의 의견을 밝혀도 되는 상대에게는 강직하게 할 말을 다했고, 직분상 윗사람들에게는 예법에 따랐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지, 윗사람에게 아부하는 태도를 취했고, 아랫사람에게는 막 굴었다는 현대식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래서 군주가 나와 정식 회의를 주재할 때의 상황을 묘사할 때는 공경함이 지극하여 결코 편안치 않은 모습이셨고, 위의가 알맞은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인다.


‘君在(군재)’는 군주가 조회를 볼 때이다. ‘踧踖(축적)’은 조심하여 편안치 않은 모양이고, ‘與與(여여)’는 위의가 알맞은 모양이다. 張子(장자, 장횡거)는 “‘與與(여여)’는 군주에게 향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또한 통한다.


그렇다면 이 장에서는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이 공자가 조정에 있을 때, 윗사람을 섬기고 아랫사람을 대함에 있어 똑같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일 뿐이다. 왜 이 단순한 내용을 굳이 이렇게 상세히 기록하여 남겼을까? 이 장에서의 숨겨진 행간은 바로 상대부와의 대화에 있다.


앞서 현대에 이 장을 읽는 사람들이 오해하기 좋게, 상사인 윗사람에게는 왜 평화롭고 기쁜 자세로 굴었다고 표현했는가에 대한 부분이 갖는 의미가 바로 이 장에서 공자가 가진 특별함을 파헤치라고 실마리를 남겨둔 것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

원문에서 ‘誾(은)’이라는 의미에 대해 주자는 주석을 통해, ‘和悅而諍(화열하면서 간하는 것)’이라는 해석으로 풀어준 바 있다. 정식 회의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군주와의 정식 회의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자신의 상사에 해당하는 상대부들에게 평화롭고 기쁜 자세로 정직하게 잘못된 점을 고치도록 간쟁하였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이상하다는 의미는 정말로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이라면 취할 수 없는 태도이기 때문에 쓴 표현이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현대적인 의미로 보더라도 웃으면서 기쁜 자세를 취하며 자신의 상사에게 업무상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기분 상하지 않게 자기가 할 말을 하는 간 큰 부하직원은 없다.


더더욱 일반 회사도 아니고 공직을 수행하는 서열이 엄격하게 강조되는 공무원 사회에서 웃으면서 기쁜 마음으로 좋은 분위기로 상사의 잘못에 대해서 지적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 어려운 것을 공자가 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어렵다고는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감정적으로 싸우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업무에 대해서 잘못된 부분을 상대가 기분 상하지 않게 말하는 것은 그렇게까지 어려운 것도 아니다.


다만 정작 어려운 것은 그럴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인가 하는 부분이다. 무슨 말인지 이미 임원급까지 조직 관리를 해본 사람이라면 감이 왔을 것이다. 즉, 밑의 사람 입장에서 위의 책임자에 해당하는 상사에게 뭔가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조건이 확실하게 갖춰져 있어야만 한다.

첫째, 그 일에 대해서 지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하게 업무를 파악하고 그 누구도 그 지적에 반박할 수 없는 논리와 노련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즉, 부하직원이지만 이 지적을 뭐라고 반박할 수 없는 명확한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것이 감정적인 것으로 흘러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대안까지 마련된 상태에서 꺼내야 한다. 이러한 대안이 있으니 이 방향으로 업무 협조 혹은 업무 방향을 위에서 끌어주십사 한다라는 협박성이긴 하지만 웃으며 찌를 수 있는 은미함이 갖춰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해당 업무와는 상관없이 다른 트집을 잡을만한 흠결이 없어야 한다. 이른바 내로남불이라 하여 일은 정작 자신이 맡은 일은 개판으로 한다던가 뒤로는 말도 안 되는 부정을 해가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며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코미디일 수밖에 없으며 듣는 상사의 입장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뭐 묻은 개가 감히 기어오르겠다고 트집을 잡으며 시비를 거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번째 조건은 상당히 클리어하기 어렵다. 이 이유 때문에 현대의 회사원과 공무원들이 감히 상사에게 웃으며 지적하는 것이 미션 임파서블이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똑같은 말이라도 그 분위기에 맞게, 타이밍이 절묘하게 절대 화내거나 거부하게 할 수 없는 센스와 화술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장에서의 공자가 구사한 일반인은 감히 흉내 낼 수 없었던 이 묘사는 바로 이 세 번째가 구사되었음을 실증하기 위해 안배된 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좋은 지적이나 아무리 좋은 의견의 제시도 상대가 그것을 고깝게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산통을 깨지고 만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조(朝)’라는 특수한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내가 이 장을 시작하기 전에 그 중국의 오래된 전통을 설명한 것도 바로 거기에 있다.

매일같이 해가 뜨기 전에 출근하여 정식 회의를 하기 전에 예비회의처럼 신하들끼리만 모여 웅성웅성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상황은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당히 고급화된 실무 책임자급의 의사 조절을 위한 사전 안배의 장인 것이다. 당장 그날 정식 회의에서는 군주의 결제를 받아야 할 회의를 앞두고 있다.


그렇다면 최종 결제 이전에 중간 관리자 및 간부에 해당하는 이들끼리의 사전 협의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 자리야말로 자연스럽게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 어떤 애로사항이 있고, 실행하는 데에는 어떤 문제점이 발견되었으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상사인 윗사람의 어떤 조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장소와 상황과 타이밍이 마련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하대부라는 신분임에도 그 TPO(시간, 장소, 상황)를 최대한 활용하여 업무의 효율을 높이는데 활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앞서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기에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지금 이 장의 내용은 공자가 훌륭하다는 것을 찬미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그 은미한 방식을 보고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라고 하는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무엇이 부족한지를 스스로 생각해보고 가다듬으라는 가르침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화열이쟁(和悅而諍)’의 대표적인 사례로 고전에서는 흔히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와 임연(任延)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꼽는다. 임연을 서쪽의 교통 요지 무위(武威) 태수로 임명하는 자리에서 광무제는 너무도 당연하게(?)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상관을 잘 섬기어 명예를 잃지 않도록 하라(善事上官 無失名譽)”


여기서 끝났다면 이 일화는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당부의 말을 내린 군주에게 임연은 다음과 같이 답을 올린다.


“충신(忠臣)은 사정(私情)에 얽매이지 않고, 사정에 매이는 신하는 불충(不忠)이며, 바른 것을 이행하고 공정함을 받드는 것(履正奉公)이 신하의 도리요, 상관과 부하가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것은 폐하의 복이 아니오니, 상관을 잘 섬기라는 분부를 신은 따를 수 없습니다”


옳은 말이라고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임연은 황제의 명을 거역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역시 황제가 될 그릇은 달랐을까? 그의 이러한 다소 황당한 대답에 광무제는 탄식하며 “그대의 말이 옳소”라며 수긍해주었다고 한다.


감히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바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 있는 것이 황제 앞에서의 언행이다. 이 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상사에게도 편안하게 바른 소리를 하던 공자조차도 편안하지 못할 정도로 예의를 갖췄다는 설명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 황제의 앞에서까지도 그저 당당한 옳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상대에게 이해가 되도록 전하는 자세가 진정한 화열이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반대로 제왕학에서는 이 ‘간쟁’이라는 것을 중시했다. 중국 황제는 해마다 동지(冬至)에 베이징 천단(天壇)을 찾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루 전 목욕재계 한 뒤 재궁(齋宮)에 머물렀다. 재궁에는 ‘재계동인정(齋戒銅人亭)’이란 정자를 세웠다.


그곳은 바로 간언하는 신하의 동상을 모시던 곳이다. 그것을 일종의 제왕으로서의 마음가짐을 그곳을 바라보며 다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 번도 국민의 선택을 받아본 적도 없어, 여의도 배지조차 달아보지 못하고 SNS에서 말장난이나 하며 자신이 2030 남성표를 쥐고 있는 진짜 당대표인양 착각하는 어린아이의 방약무인에, 대항마로 삼겠다며 어디서 지잡대를 갓 졸업한 혈기방장한 여자애를 꼭두각시로 세운 꼴이 참으로 우습다.


왜 학벌이나 나이 가지고 그 아이를 무시하냐며 내게 대거리를 하고 싶은가? 내가 그저 늙은이 꼰데라서 아무런 근거 없이 사람을 폄하하는 자로 보였던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까지 1년여 아침마다 논어를 읽어준 선생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으니 일단 초등학교 국어책을 다시 읽으며 문해력부터 키우고 오도록 해라.


내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민초라고 하는 우리들의 힘으로 바꿔보자고 하며 경찰의 부조리, 검찰의 부조리, 사이비 기독교의 부조리를 바로잡아보자고, 현역 목사 아동학대 사건을 첫 케이스로 삼았다.


민주당의 3선이나 되는 행안위원장에게 사실을 알리고 동참의사를 구했다. 무시당했다. 그 당의 최연소이자 소방관 출신으로 정의를 감히 입에 올리는 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도와줄 듯 연락을 하다가 연락을 끊고 꼬리 자르고 도망가버렸다.

공동 비대위원장을 하며 회의장에 옷자락만 왔다 갔다 거리는 지잡대 어린 여자애? 불꽃단인지 뭔지를 해서 이메일이 있어 연락을 취했다. 요즘 공사다망한 지 맑은 아침 7시에 이메일을 읽었더라. 그리고 씹혔다.


그녀는 그저 일회용 꼭두각시일 뿐 썩은 기득권 정치 선배라는 것들에게 간언 자체가 불가한 상황인 것이다. 구조적 문제가 아닌, 그들의 의지가 없는 것이 더 문제인 것이다.


https://brunch.co.kr/@ahura/1052


지난 토요일에 이 사실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함께 움직여보자고 사발통문을 날렸다. 판타지 소설을 신나게 매일 탐독하고, 술 이야기를 여유롭게 읽고 현대판 위인전을 읽으며 라이킷 정도 누르던 자들이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침묵하고 있다. 아침마다 남이 다 씹어 넘겨주는 논어를 는 것만으로 당신이 깨어있는 지성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안일함이, 당신들이 개돼지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라고,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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