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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03. 2022

외교에서 갖춰야 할 기본은 무엇인가?

예가 고리타분한 것이 아닌 가장 실용적이라는 증거.

執圭, 鞠躬如也, 如不勝. 上如揖, 下如授. 勃如戰色, 足蹜蹜如有循. 享禮, 有容色. 私覿, 愉愉如也.
命圭를 잡으시되 몸을 굽히시어 이기지(감당하지) 못하는 듯이 하셨으며, 〈命圭를 잡는 위치는 〉 위로는 서로 揖할 때와 같게 하시고 아래로는 물건을 줄 때와 같게 하시며, 낯빛을 변하여 두려워하는 빛을 띠시며, 발걸음을 좁고 낮게 떼시어 물건을 따르듯이 하셨다. 燕享하는 禮席에서는 온화한 낯빛이 있으셨다. 사사로이 만나보실 적에는 화평하게 하셨다.

이 장에서는 앞서 군주를 대신해서 외교 사절을 맞이했던 것과는 반대로, 군주를 대표하여 해외에 외교사절로 이웃나라를 방문했을 때의 공자를 묘사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역시 어떤 사림으로 어떤 몸가짐을 보였는지를 주로 묘사하고 있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앞에서 공부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행동의 하나하나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장에서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대개 현대 논어 해설서들을 보면, ‘향당편(鄕黨篇)’에 대한 설명이 껍데기에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거나 그 본질에 대해서 논하지 않은 채 대강 묘사한 내용에 대해서 훑고 지나가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공부하는 방식이 깊이있게 배우지 못한 이들이 특별히 아는 척을 할만한 구석이 없다고 느끼는 사실적 묘사에 그 행간의 의미를 읽는 노력 자체를 해본 적이 없어 벌어진 참사에 해당한다.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주자의 주석에서부터 꼼꼼히 살펴보기로 한다.


‘圭(규)’는 제후의 명규이니, 이웃나라에 빙문하게 되면 대부로 하여금 이것을 잡아서 신(信)을 통하는 것이다. ‘이기지 못하는 듯이 하는 것’은 군주의 기물을 잡음에 가벼운 것을 잡아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니, 공경하고 삼감이 지극한 것이다. ‘上如揖(상여읍) · 下如授(하여수)’는 규를 잡는 것이 평형을 이루어 손이 심장 부위와 가지런해서, 높아도 읍할 때의 위치를 지나지 않고 낮아도 물건을 줄 때의 위치를 지나지 않는 것이다. ‘戰色(전색)’은 조심하여 얼굴빛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蹜蹜(축축)’은 발걸음을 좁게 떼는 것이다. ‘如有循(여유순)’은 《禮記(예기)》에 이른바 “발을 들되 발꿈치를 끈다.”는 것이니, 걸음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마치 물건을 따르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여기서 중국 대하 역사 드라마나 혹여 한국의 사극에서 아주 드물게 당신이 보았던 듯 하는 ‘圭(규)’라는 물건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설명을 할 필요가 있겠다. 이 물건은 옥으로 만든 홀(笏)이다. 홀(笏)이란, 옛 관리가 조복(朝服) ·제복(祭服) ·공복(公服)에 소지하여 교명(敎命)이나 아뢸 것이 있으면 잊지 않도록 백필(白筆)로 적어 두는 수판(手板)을 의미한다.

상아(象牙) 또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후세에 와서는 이것이 한낱 의례용(儀禮用)이 되어 복식의 일부가 되면서 품계를 나타내는 표지가 되었다. 또 규는 황제 ·왕후가 면복(冕服) 및 통천관(通天冠) 강사포(絳紗袍)나 원유관(遠遊冠) 강사포에 소지하여 부신(符信)으로서 상서로움을 징험(徵驗)하는 부서(符瑞)로 삼아 옥으로 만들었다.


종류를 보면 고대 중국에는 황제에게 대규(大圭)와 진규(鎭圭)가 있었고, 공작(公爵)에게는 환규(桓圭), 후작(侯爵)에게는 신규(信圭), 백작(伯爵)에게는 궁규(躬圭), 자작(子爵)에게는 곡벽(穀璧), 남작(男爵)에게는 포벽(蒲璧)이 있었다. 대규는 정(珽)이라고도 하여 직구(織具)의 하나인 북, 곧 저(杼)와 같은 모양에 위는 뾰족한 것으로 길이 3자였으며, 황제가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낼 때 대구면(大裘冕)에 이를 꽂고 진규를 들게 되어 있었다.


조금 복잡할 수는 있지만, 이 장에서 알아둬야 할 것은 그 ‘圭(규)’라는 물건이 본래 군주의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말해, 이 물건은 군주를 대신하는 군주의 물건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을 이해하면 왜 공자가 이것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조심스럽고 삼가는 태도를 보였는지를 궁금증을 해소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은 물건이 무겁거나 깨질까봐 조심스러워하는 것도 아닌데 공자가 지극히 예의를 갖춰 ‘이기지 못하는 듯이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군주를 공경하고 삼감이 지극한 것이다.


같은 이유로 이 물건을 계속 쥐고 있으면서 읍하고, 물건을 건낼 때도 가지고 있는데 그 많은 움직임을 하는 동작을 상세히 묘사하면서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바로 ‘圭(규)’의 높이이다. 손이 심장 부위와 가지런해 져서, 너무 높지도 않지만 너무 낮지도 않은 그 높이를 유지하는 것이 예법의 관건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공식 일정으로 군주의 뜻을 방문한 이웃나라 군주에게 전하는 역할이었다면 역시 외교의 꽃은 뒷풀이에 있다. 그 자리는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태도와 언행이 완전히 달랐음을 이 장에서 역시 강조하고 있다.


앞서 공부에서 몇 차례 패턴을 익혔으니 알겠지만, 한 장소에서도 어떤 행위를 하는가에 따라 얼굴빛에서부터 언행과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 어떤 기준에 의한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주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享(향)’은 물건을 드림이니, 聘問(빙문)이 끝나고 燕享(연향)을 베풀 적에 규벽을 사용하고 뜰에 각종 예물을 진열해 놓는다. ‘容色(용색)이 있다’는 것은 얼굴이 온화함이니, 《儀禮(의례)》에 이르기를 “〈燕享(연향)할 때에는〉기운을 펴 화기가 얼굴에 가득하게 한다.” 하였다.


공식적인 행사가 군주로부터의 서신 따위의 문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면, 뒷풀이의 핵심은 이웃나라의 군주에게 전할 선물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선물을 전하는 것에 무슨 예법이 따로 있을까 싶은데, 그것이 이 장에서 방점을 찍는 부분이다. 원문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군주의 선물을 전하는데 얼굴색을 온화하게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엄숙함을 강조하다가 선물을 전달하면서는 반드시 온화한 기색을 얼굴에 띠어야 한다고 했을까?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외교적으로 사람을 만나는데 웃는 표정을 하는 것은 예절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조차도 공식적인 외교 협상 테이블에서 웃으며 협상하는 정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식협상이나 정상회담이 끝나고나서는 언제나 밝고 화사하게 웃는 것은 지금 이 장의 의도와 같다. 그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선물을 전달하는 근본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태도와 언행을 보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누군가에게 우호의 의미로 선물을 주면서 굳은 얼굴인 사람은 없다. 선물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선물을 확인하는 상대의 모습을 가늠하는 것따위도 이후의 일이다. 선물을 전달하는 것, 특히 그것은 말그대로 자신이 주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우호의 뜻을 담아 ‘전달’하라고 자신을 대신해서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선물의 의미를 얼굴과 분위기에 담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뒷풀이로 이어지면서 공식적인 만남과는 달리, 주연(酒宴)을 통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 이제 군주가 시킨 공식적인 문건을 전달하였고, 선물을 전달하고난 뒤의 사신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군주의 대신이라기보다 자신의 신분으로 이웃나라의 군주를 대하게 되는 사적인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私覿(사적)’은 사사로운(비공식적인) 예로만나 보는 것이다. ‘愉愉(유유)’는 더욱 온화한 것이다.


사적인 자리라는 것은, 온전히 대표성을 거둬낸 자신의 모습으로 이웃나라 군주를 대하는 것이다. 물론 격의없이 예의없는 모습을 보일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사적인 감정, 특히 기쁘고 반가움의 솔직한 표현이 중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예의 기본이 되는 것은 예라는 것이 특별하고 일반인의 삶과 유리되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다시말해, 사적인 자리에서 경직되어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했던 모습 그대로 대한다면 이웃나라 군주는 물론이고 신하들에 이르기까지 그들 역시 편하게 대할 수 없다.


이 장의 시작에서 말했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던 손님을 마주할 때의 상황과 손님의 입장이 되어 이웃나라를 방문했을 때는 또 그 경우가 다르기 마련이다. 객이 되었을 때는 언제나 객이 먼저 무언가를 하게 된다. 솔직담백한 감정을 표현하되 기쁘고 상대에게 배려하는 모습을 먼저 열어보이는 것은 객이 먼저 하게 되는 것이 예의라는 것이다.

음식을 먹기 시작해도 음식을 차린 주인이 먼저 먹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먼저 음식을 맛보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모든 예의 출발은 객에게서 먼저 출발한다는 기본이 감정에서도 예외이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리고 외교에 있어 공식적인 만남과 비공식적인 만남이 있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수천년전 공자의 시대에도 이미 자리가 잡혀 있던 것인데, 만약 공식적인 만남과 비공식적인 뒤풀이에서 동일한 표정과 태도에 언행이라면 자리를 구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밥을 먹을 때와 잠을 잘 때, 일을 할 때가 복장이 다르고 태도가 다르며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하는가에 대한 마음가짐이 다르다는 것을 공자는 이 장에서도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을을 알 수 있다.


이 상황은 가상한 상황이 아니라 실제 공자에게 있었던 실례를 기록한 것임을 조씨(晁說之(조설지))가 주석을 통해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한다.


“공자께서 정공 9년에 노나라에서 벼슬하시고, 13년에 이르러 제나라에 가셨으니, 그 사이에 조회하거나 聘問(빙문)하여 타국에 왕래하신 일이 전혀 없다. 의심컨대 擯(빈) · 相(상)이 되고 명규를 잡는 두 조항은 다만 공자께서 일찍이 그 예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듯하다.”


참고로 조씨의 이 주석은 이후 고증학자들에게 오류라고 지적을 받게 되는데, 실제로 정공 13년에 공자는 제나라에 간 것이 아니라 위나라에 갔다. 세심한 고증으로 유명한 다산(정약용)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간과했는지 특별한 언급이 없어 여기서 간략하게 정리해둔다.




우리나라의 외교부라는 곳이 얼마나 복마전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에 간략하게나마 설명한 바와 같다. 그곳의 수장은 당연히 국가의 대외적인 대표를 하는 곳의 수장이다. 5년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외교 경력은 일천했던 영어통역이나 하던 백발 여인을 상징적인 수장으로 임명하였으나 그 밑의 외무고시 출신이던 국장과 대사급들은 그녀를 얼굴마담취급하며 조직의 부정과 비리와 성비위사고에 이르기까지 종합선물세트로서의 복마전이 갖는 진면모를 명불허전 보여주었고, 그녀가 수장으로 있는 내내 그 조직의 부패는 전혀 일소되지 못했다.

어제 새정부의 외교부장관으로 지명된 자의 청문회가 열렸다. 종로를 지역구로 하여 국회의원을 했던 그 사람은, 이전에 잠깐 설명했던 것처럼 경성제대 법대 출신이다. 경성제대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패스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동문들에게 멸시의 꼬리표가 원래 붙는다.


더군다나 그들의 시대에는 그것이 심했다. 이전 총리였던 이낙연도 그것이 콤플렉스가 되어 신문기자를 하는 내내 동문 네트워크를 활용하면서도 불편해하던 부분이 있었다. 지금 외교부장관으로 지명된 사람도 강남의 삐뚤어진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종로에서 밀려 강남에 깃발을 꽂고 국회의원일 또 되긴 했지만, 이미 이전에 뇌물 수수혐의로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는 외무고시를 치르고 외교부 공무원으로 사회에 발을 내딛었다. 앞서 이낙연 전대표와 같은 이유로, 그 역시 콤플렉스가 작동했던 것인지 외교부 공무원으로서 일을 했던 10년 남짓의 기간보다 그 직을 이용하여 유학을 가서 자연스럽게 그 동문네트워크를 타고 학력을 채워서 정계에 진출한 케이스이다.


청와대 대통령 비서관으로 공보비서와 정무비서를 지냈고, 청와대에서 나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하는 요즘 일반인들에게도 ‘고액 전관대접’으로 유명해진 ‘김앤장 고문’으로 회전문 인사를 통해 빨간당에 스며들어간 인물이다.

굳이 내가 그의 간략한 이력을 설명한 이유는 하나이다. 누구나 공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그 조직의 장이 되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꿈꾼다. 그가 원했던 것은 경기고를 나와 경성제대 법대를 들어간 동문들처럼 멋지게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법비가 되는 것이었겠으나 그는 거기에 미치지도 못하고 외교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제 결과적으로 그는 돌고돌아 자신이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그 조직의 장의 후보로 청문회장까지 걸어들어간 것이다. 청문회는 요식행위로 그저 지나갈 뿐이라고 말하듯이 이미 장관으로서의 일정을 조율중이라는 참람된 말도 청문회장에서 스스럼없이 뱉어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청문회 이전부터 논쟁이 되었던 그의 아들 논쟁이었다. 요즘 유행은 못난 부모의 부정에 그것을 압도하는 자식의 비위가 집안을 비롯해서 나라를 말아먹는 ‘망진자(亡秦者)는 호야(胡也)’로 압축되는 그것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자식이 저지른 비위 때문에 부모에게 책임을 물어 그것으로 인해 장관을 못한다거나 그를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조국 전 장관이 욕을 먹고 형사재판에 줄줄이 이어져 있고, 그의 아내가 실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것이 단순히 자식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제 그의 청문회에서 그가 보인 언행이, 돈을 걸고 하는 온라인 포커가 넓게 보면 게임이지 도박이 아니라고 당당히 말하는 그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문제가 되는 회사에서 문제가 되는 돈벌이를 하는 자식만의 비위가 아닌 그의 비위로 지적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문제에 대해서 그가 한번도 아닌 여러번의 거짓해명을 통해 그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 아닌 감추고자했다는 것이다.

이 장의 가르침에서 보이는 TPO는 상황과 그 때에 맞춘 가장 적합한 ‘예’의 본질을 갖추라는 것이지, 상황에 맞춰 때마다 다르게 매번 거짓말을 해서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자로 낙인찍힐만한 짓거리를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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