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May 08. 2022

당신의 양심은 안녕하십니까?

당신이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구독해지에 차단까지 한 이유.

내내 궁금하고 또 의아했습니다.


교회에서 십일조 헌금처럼 돈을 내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전교조처럼 자신의 직을 내놓고 목소리를 내라는 것도 아니고, 모 항공사처럼 직을 걸고 얼굴을 내밀고 거리에 뛰어나와 데모를 하자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의를 부르짖고 부정에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목을 쑥 집어넣고 모른 척을 할까?


버젓이 환갑이 넘어서, 허세만 가득한 낙서 수준의 글에 자비 출판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곧 구독자가 네 자리가 된다며 쓸모없는 문자 덩어리를 양산하던 남자의 작가 소개를 봤더랬습니다. 말과 글과 생각으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자라고 버젓이 적혀 있더군요. 댓글로 이 사태에 대해 링크를 하고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는 버젓이 이렇게 답변하더군요.


“다시 공직에 들어서 있다 보니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기 어렵네요.”


한숨이 절로 나오더군요. 그가 어디서 일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더욱 어이가 없었습니다. 누가 들으면 정말로 대단한 공직 정도 되는 줄 착각할만하게  거들먹거리는 핑계를 댔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만약 정말로 그가 과대포장하고 싶은 정말 대단한 공직이었다면 더더욱 사회를 바로 잡는 일에 목소리를 냈어야 할 것이기에 그의 변명은 그야말로 딱했습니다.


지난번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자기 책을 광고하는 것에는 열성이던 의사라고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람이 뜬금없이 ‘저는 피해자를 치료하는 사람이지 피의자를 처벌하는 쪽이 전문이 아니어서요. 그래도 작가님을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구독해지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치더군요.  


당신들이 구독하며 댓글에서, '대단하시네요', '훌륭하십니다', 자화자찬하는 찌질한 브런치 작가들의 민낯이 이런 것일 줄 정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현재 이 사건을 해결하는데 힘을 모으겠다고 모인 단톡방에 들어온 분들이나 개인 사정상 단톡방에는 안 들어왔지만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시고 실천을 피드백해주는 분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내용을 모두 읽고 나서도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내가 나섰다가 나에게 피해가 오는 건 아닐까 하며 말도 안 되는 핑계들을 대다가 이렇게 뒤늦게 합류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30대의 젊은 친구가 장문의 글로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며 이야기를 전해주며 자신의 마음을 빌어 지금 궐기대회 글부터 제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얻어맞는 듯 고통이 느껴져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던 중이었습니다.

나라고 다를까, 나라고 깨끗할까,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생각이 너무 아팠습니다. 선생님 글이 창처럼 꽂힐 때는 예전 선생님의 글을 보며 그 에너지를 희석시키는 작업을 하니 조금 나은 것도 같았습니다.

그렇게 희석시키고 보면 또 날카로운 글을 읽을 힘이 나는데, 막상 읽으면 통증이 느껴지고 그랬습니다.

통증과 혼란, 두려움 등등의 감정이 범벅이 되어 밤새 댓글을 썼다 지웠다 했습니다.

아마도 브런치에서 인기로 스스로의 가치를 가늠하는 이들은 저보다도 더 그런 감정을 느낄 것 같고 그 감정에 머물러 고민하기보다는 빨리 외면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을 듯합니다.


대기업에 일하면서 백혈병으로 죽어간 동료를 위해 회사에 반기를 들라고 하면 고민될 수 있다 싶습니다. 그런 이도 없겠지만 정말로 양심적인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판검사를 기대하고 판검사가 되었는데 주변에 쓰레기밖에 없다며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도 충분히 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걸려있으니 고민할만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역 목사가 아동학대를 벌인 일에 대해, 그 목사를 직접 비난하거나 처벌을 요구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런 사건이 있었으니 경찰에 진상을 제대로 밝혀, 사실이라면 법대로 엄중히 처벌하라는 것에 함께 목소리를 내자는데, 그것도 고작 인터넷에 글 올리고 관련기관에 전화하여 그 의견을 전하는 것뿐인데, 온갖 정의로운 소시민 코스프레는 다하던 사람들이 이 따위로 침묵하다니 도무지 제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같잖게 그 의미도 모르면서 상대적 가치가 어쩌느니 주저리주저리 변명하는 애엄마의 글을 보면서 아, 그래도 사람을 믿고 싶었는데, 이게 그녀의 바닥이구나, 생각하며 맘이 아렸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하지 않는다고.


맞습니다. 나는 주로 민중을, 소시민을 개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 쪽에 속해 지내왔습니다.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나는 아직 사람들을 믿는다고, 사람을 믿지 않으면 어찌 가르칠 것이며 어찌 변화시킬 것이냐고 항변했던 기대를 가진 어리석고 순진한 사람이었습니다.


시장에서 물건 팔면서 드라마 보고 TV의 악역에게 욕지거리하는 아줌마를 비난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스스로 고상한 척, 자신은 깨어있는 척, 그렇다고 진정한 주류에 속해있지도 못하면서 그저 ‘척’ 하고 싶어 하는 자들의 바닥을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2주 전 궐기대회 글을 시작으로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구독자가 824명이었습니다. 이후 새로 구독하신 분들이 30여 명 정도 늘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구독자가 819명입니다. 맞습니다. 도망간 자들이 그만큼 더 많다는 거죠. 이메일까지 보내가며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며, 지금도 다른 브런치 공간에서 난 척하고 싶어 하는 시골의 촌로(村老)부터, 자기 아픔을 알아주고 이해해줘고 고맙다고 했던 싱글맘, 매일같이 그렇게 라이브로 글을 쓰기도 어렵다며 긴 이해의 글을 남긴 작은 회사 사장 등등 뭐가 그렇게 따갑고 아렸는지 차단까지 하며 구독을 해지했더군요.


<술 이야기> 연재를 왜 중단했는지 적어도 일언반구 반응이 없고 그저 발을 끊은 이들부터, 오늘 주말 연재 심리분석 시리즈도 이제 양심 없는 쾌락을 제공하지 않을 거라고 어디 재미있게 읽을거리 없나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 같은 이들에게 경고했더랬습니다.


마지막 양심이 있다면 신의 글에 캠페인 글을 링크하여 여럿에게 알려달라고. 


어느 한 명, 그들의 글에 링크하여 글을 올리지 않으면서 <심리분석 시리즈> 글만큼은 꼬박꼬박 읽고 갔더군요.


그들에게 원한 것은 진실을 외면하고 은폐하려는 자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된다고 그것도 실천인 것이라고 일러준 것뿐인데, 그것조차 하지 못하면서 끝까지 그 간사한 세치 혀로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한 것이지, 강요받는 느낌을 받아서 부담스럽습니다.’라는 말을 담는 것이 부끄럽지 않단 말인가요?


대자보에 매직 냄새 풍기며 가열찬 의견을 실명으로 개진하며 가투에 나가서 쓸 화염병을 만드는 친구들을 보면서 멈칫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자신들은 목숨 걸고 백골단을 피해 뛰어다니는데 전공서적을 들고 도서관을 가는 친구들이 미웠을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당신들에게 함께 하자고 한 것은 분명히 당신이 주저할만한 무언가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글을 올리고 난 이후에도, 아니 지금도, 발행 글에서 버젓이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과 마찬가지이다’라는 DJ의 인용을 쓰고, 그 글을 읽고 나서 마치 대오각성한 사람들인 양 멋지게 댓글을 다는 것으로 당신의 양심이 바로 서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위의 후안무치한 변명 같지도 않은 자들의 말에 길지도 않은 한 마디를 남겼더랬습니다.


“강요? 한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당신이, 당신 자식에게 올바르게 살라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한 부모일 수 있는, 좋을 사회를 만들자고 한 것뿐입니다.”


미국에서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연락해오며 합류하신 중년의 여성이 말하더군요. 그 같잖은 변명을 대는 것들이 차마 그들의 글에서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ㅎ’이라고 담지 않았으면 좋겠다구요.


브런치에 많은 자기 일상이나 아픔을 이야기하는 글들을 봅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큰 상처보다 내 손가락에 박힌 가시 생채기가 더 아픈 법입니다.


인간이 이기적인 것은 본능이니 이타적이 되라고 때려 강요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군대도 아니고, 군바리가 권력을 행사하여 서슬 퍼랬던 군사정권 시절도 아닌데, 양심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을 강요한다는 표현을 입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의 양심은 부끄러움을 안다는 표현임을 그만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얼굴 한번, 아니 전화통화 한번 해보지 못해 목소리도 알지 못하는 서로가 모였습니다. 아동범죄를 담당한 검사실에 탄원서를 등기우편으로 보냈다고, 아니 집 앞이니까 직접 써가지고 들고 가서 접수하겠다고 하는 동참해주시는 분들을 보며, 구독을 해지하고 뭐가 두려운지 차단까지 해가면서 도망가서 꿩처럼 풀섶에 머리만 받고 당신이 눈감으면 당신의 그 비대해져 버린 비양심이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를 수 있습니다.


대단한 무언가를 행동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뜻을, 마음을 모으자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정말 부끄럽다면, 이 사실을 당신의 글에 링크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조차 할 수 없는지 당신의 양심에게 물어봐주시겠습니까?


https://brunch.co.kr/@ahura/1093


당신의 힘겹지만 의미 있을 그 첫걸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전포고 :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