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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11. 2022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무보수 지원해도 거부당했지만 -1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 기부를 통해 10위로 스스로 내려앉다.

220번째 대가의 이야기.


1930년 8월 30일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사업가이자 정치인이던 아버지의 삼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하워드는 그가 여섯 살 때 주식 통장을 선물해 경제 감각을 갖도록 키웠다. 그런 아버지의 피를 받아서였을까? 어릴 때부터 숫자, 계산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돈에 관심이 많았고, 할아버지의 슈퍼마켓에서 코카콜라나 껌을 사 팔았다. 또 7살 때 오마하 공립 도서관에서 빌려온 <One Thousand Ways to Make $1000(1000달러를 버는 1000가지 방법)>이라는 책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열 살을 갓 넘은 1941년, 아버지 하워드와 같은 사무실을 쓰는 ‘해리 스어 팜 주식 중개회사’에서 시세판에 주가 적는 일, 차트 작성하는 일 등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누나 도리스와 함께 생애 첫 주식으로 시티즈 서비스 우선주 6주를 주당 38달러에 구입한다. 주가가 27달러로 떨어졌다가 다시 40달러로 오르자 주식을 팔아 순수익 5달러를 남겼다. 그러나 얼마 후 시티즈 서비스 주가는 200달러까지 치솟았고, 이 일로 그는 장기투자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1942년 그는 할아버지의 식품점에서 일을 했는데 놀랍게도 이때 이후 그의 파트너가 되는 찰리 밍거 역시 다른 요일에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1943년 아버지가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면서 그의 가족은 워싱턴으로 이주한다. 그는 자신이 30세가 될 때까지 백만장자가 되지 못하면 오마하의 가장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호언장담했다고 전한다.

미국의 기업인이자 투자가로, 뛰어난 투자실력과 기부활동으로 인해 흔히 ‘오마하의 현인’이라고 불리는, 세계적인 부자로 늘 꼽히는 워렌 에드워드 버핏(Warren Edward Buffett)의 이야기이다.


2010년 기준으로, <포브스> 지는 버핏 회장을 세계에서 3번째 부자로 선정하였으나, 2020년 기준으로 29억 달러(약 3조 5,000억 원) 상당의 버크셔 해서웨이 주식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면서 실질적 자산이 감소하며 다소 순위가 떨어졌다.


물론 떨어졌다고 해도 세계 10위이다. 1958년 당시 3만 1500달러를 주고 산 집에서 아직도 살고 있고, 매일 아침은 3달러가 조금 넘는 맥도널드 아침 메뉴로 해결한다. 검소한 삶을 살지만 자선재단을 설립해 막대한 돈을 기부하고 있고, 소득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부자증세를 주장한다.

1945년 신문배달사업으로 2,000달러까지 저축한 버핏은 1,200달러를 투자하여 네브래스카 농지를 사들였고 소작농을 두어 매달 돈을 벌어들인다. 그는 고등학생 친구와 함께 핀볼 게임기를 샀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둘은 이 게임기를 이발소에 설치했고, 더 많은 게임기들을 살 수 있는 충분한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추가로 마련한 게임기들은 다른 상점들에 설치했다.


버핏과 그의 친구는 훗날 1200달러 이윤을 남기고 게임기들을 모두 팔아치웠다. 그들은 그 사업체를 참전 용사에게 팔았다고 한다. 1947년 우드로 윌슨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워렌은 신문배달과 핀볼기 대여사업, 네브래스카 소작농을 통해 이미 5,000달러 이상을 모은 상태였다.


버핏은 대학에 진학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강요로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와튼 금융 산업 학교에 진학한다. 버핏은 교수님보다 자신이 더 많이 안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당시 사교클럽의 회원이던 리처드 켄들은 이후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버핏은 와튼스쿨에서 배울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제대로 된 판단이었다.”


버핏은 학교 잡지인 모범적인 미식축구 팬으로 선정돼 <펜픽스(Penn Pics)>의 표지모델로 나오기도 했다. 네스래스카대로 학교를 편입한 버핏은 하버드 대학원에 낙방한 뒤 뒤에 자신의 평생 멘토가 된 벤저민 그레이엄이 교수로 있던 뉴욕의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벤자민 그레이엄이 개척한 가치투자 개념을 중심으로 투자철학을 구상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입학을 거절당한 버핏은 컬럼비아경영대학원에 들어간다, 여기서 영원한 스승이자 전설적인 투자자 벤저민 그레이엄의 수업을 듣게 된다. 1950년 그레이엄에게는 스무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워런보다 나이가 많았고 이미 월스트리트에서 일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레이엄은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을 자주 사용했는데 오마하 출신의 청년 워런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번쩍 들어 올렸고, 그레이엄은 좀처럼 워런의 대답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그레이엄 교수로부터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은 것은 워렌이 유일하다.


대학원 졸업 후 그는 당당하게 그레이엄의 투자회사인 그레이엄-뉴면에서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단박에 거절당하고 만다. 이유는 의외의 구석에 있었다. 당시 그리스도교들이 설립한 월스트리트의 기업들은 유대인을 고용하지 않았고, 이에 거부반응을 보인 그레이엄은 가능하면 유대인을 고용하려고 애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오마하로 돌아가 아버지 회사인 버핏-스클레니카&컴퍼니에서 주식중매인으로 일하는 동안 데일 카네기 대중연설 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수전 톰슨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1952년 수전과 결혼하여 월세 65달러를 주고 방 세 개가 딸린 아파트를 빌려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1956년 가족과 함께

오래된 집이라 밤이면 쥐들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매우 검소하게 생활한 워런은 딸 수지 주니어가 태어났을 때는 옷장 안에 잠자리를 만들어줄 정도였다.


데일 카네기 강좌에서 연설 과정을 이수한 21살의 버핏은 오마하 대학에서 투자원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버핏은 여러 학기 동안 강의를 했는데 주로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의 <현명한 투자자>에 초점을 맞췄다.


1954년 그레이엄은 버핏에게 전화를 걸어 일자리를 약속한다. 버핏은 봉급 등 제반 사안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바로 비행기에 오른다. 뮤추얼펀드인 그레이엄-뉴먼은 몇 가지 원칙에 따라 주식을 매수했다. 그레이엄이 가장 좋아하는 원칙은 기업의 운전자본보다 3분의 1이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주식을 찾는 것이었다. 그레이엄-뉴면에서 버핏은 모든 일에 매우 빨리 적응했다.


당시 함께 일했던 하워드 뉴먼은 ‘워런은 총명했지만 절대 잘난 척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레이엄과 비슷했죠.’라고 그를 평가했다. 그레이엄은 버핏이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며 자신과 버핏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레이엄은 많은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100만 달러 이상을 소유한 채 죽는 사람은 바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버핏은 그레이엄의 주위에 일종의 장벽이 있었다고 느꼈다. 모두가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며 주위를 맴돌았지만 그와 친해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일에 있어 회의감이 온 버핏은 전철 승강장에 서서 뉴욕의 수많은 통근자를 바라보며 ‘내가 원했던 삶은 이런 게 아니야.’라고 생각하곤 다시 오마하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1956년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마음이 없었던 버핏은 오마하에 돌아오자마자 가족과 친구들로 구성된 조합을 결성했다. 그는 조합의 이름을 ‘Buffett Associates Limited’이라고 지었다. 1959년 오마하에서 평생을 함께할 사업 파트너이자 훗날 버크셔의 부회장이 되는 찰리 멍거를 만났다. 버핏은 투자자들을 모아 펀드에 투자할 것을 권유하며 비밀주의를 고수했는데 정보 누설을 막는 것은 물론 간섭을 방지해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5년간 버핏의 조합이 251%의 누적수익률에 달한 반면 다우 지수는 74% 상승했다. 버핏은 그레이엄의 인맥으로부터도 자금을 조달했다. 10만 5,1000달러의 자금으로 시작한 버핏 투자조합은 1962년이 되자 자본금이 720만 달러나 됐고 그중에서 100만 달러가 버핏의 몫이었다.


7명이었던 투자자는 90명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캘리포니아에서 버몬트까지 다양한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키윗플라자에 사무실을 낸 버핏은 섬유 제조업체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식을 주당 7.6달러에 조금씩 매수하기 시작했다.


1963년, 버핏은 뎀프스터를 매각해 230만 달러의 순이익을 올렸으며 이로써 투자 금액은 세 배 넘게 증가했다. 그리고 이듬해 샐러드유 사건으로 폭락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매수하기로 결정했다. 꾸준히 버크셔 주식을 적극적으로 사들여 1965년도에는 49%를 보유하여 버크셔의 경영권을 장악한다.


이때부터 버크셔는 그의 투자회사로 변신한다. 1963년에 39%라는 놀라운 수익을 거뒀으며 1964년에는 28%의 수익을 올렸다. 당시 2,200만 달러를 운용하고 있던 버핏의 개인 순자산은 400만 달러에 육박했고 이미 꽤 큰 부자가 돼 있었다.

1965년 버핏의 투자조합은 다우지수보다 33퍼센트나 높은 수익을 올렸다. 이듬해에 버핏은 다우지수보다 무려 36퍼센트나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10년간의 다우지수가 122% 상승할 때 버핏 투자 조합의 누적수익은 1,156%에 달했다. 1966년 조합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더 이상 조합원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힌다.


1967년 초 버핏은 조합원들에게 새로 설립된 일부 뮤추얼펀드의 실적이 자신의 투자조합보다 더 좋다고 말했다. 워렌은 연간 다우지수를 10퍼센트 앞서겠다는 목표를 낮췄지만 1967년 다우지수를 17% 앞질렀다. 수익 중 많은 부분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서 나왔다. 월트 디즈니에서도 55%의 수익을 올렸다.


1968년 상승장이 힘을 잃었을 때에도 버핏 투자조합은 59%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1969년 상승장의 정점에서 빠져나오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한 버핏은 투자조합을 그만두겠다고 발표했다.


버크셔 해서웨이와 다이버시파이드레테일링, 두 건의 투자만 제외하고 모두 현금화하여 조합원들에게 투자자금을 돌려주었다. 이 두 건에 대해서는 주식으로 지분을 소유할지 현금화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게 했으며, 버핏은 주식을 택했다. 혹스차이들 콘을 매각하고 얼마 후 버크셔를 지주회사로 탈바꿈시켰다.


투자조합을 운영한 마지막 해인 1969년에 버핏은 7%의 수익을 올렸다. 5월까지 1,000 근처에서 맴돌던 다우지수는 1969년 말 800으로 폐장했다. 1970년도 버크셔 주식의 29%를 소유한 버핏은 회장이 되었고, 처음으로 연례보고서를 발표하고 주주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기 시작했다.


1973년 그의 우려대로 활황기의 주식시장이 대폭락, 애널리스트들은 해고당했으며 니프티 피프티마저 무너진다. 이때 버핏은 마치 상품진열대에서 물건을 쓸어 담듯 주식을 매수한다. 그렇게 다시 본격적인 투자를 선언하며 워렌이 어린 시절 배달하던 신문 워싱턴 포스트의 주식을 매입하여 가장 큰 사외 투자자가 됐다.

1977년 블루칩 스탬프스 이름으로 이브닝 뉴스 주식을 매입, 쿠리어-익스프레스와 신문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 이 무렵 아내 수전은 자신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떠나지만 2004년 사망할 때까지 공식적인 아내 역할과 버크셔의 이사로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고 버핏은 부인 수전의 소개로 훗날 두 번째 부인이 되는 애스트리드 맨크스를 만나게 된다.


1979년 약세장임에도 버핏 주식의 주가는 상승, 버크셔는 주당 290달러였고 버핏의 재산은 장부상 1억 4,000만 달러가 됐다. 하지만 버크셔에서 받는 연봉 5만 달러로만 생활했기 때문에 먹고 살기가 빠듯했으며, 그럼에도 버크셔 주식은 단 한 주도 팔지 않았다.

1982년 보유재산 2억 5,000만 달러로 <포브스>지 선정, 미국 부호 82위에 이름이 오르며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983년 5.68달러로 사들인 워싱턴포스트의 주식은 73달러로 치솟고, 버크셔의 주가도 주당 1,310달러까지 오르면서 버핏의 자산은 6억 2,000만 달러가 됐다. 버크셔 주식분할 압력을 받지만 파이를 조각낸다고 가치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라며 단호히 거부한다. 퍼니처 마트를 인수하여 섬유공장 인수의 실수를 만회했다.


1985년 ABC와 캐피털 시티즈의 합병을 성사시키고, 월드북으로 유명한 스콧 펫처를 매입했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적은 수익을 이유로 섬유사업에서 철수하게 되는데 이는 버핏이 손실을 경험한 몇 안 되는 거래로 기록됐다. 1987년 10월 19일, 이른바 ‘검은 월요일’로 불리는 주식 대폭락으로 매도 주문이 시장을 마비시켰다. 이 해 버핏은 살로먼 브라더스에 7억 달러를 투자하는데 그때까지 그가 한 투자 중에 가장 큰 금액이었다.


1988년 불경기에 대한 우려가 만연했으나 개의치 않고 다시 주식투자에 나선다.


버크셔는 10억 2,000만 달러어치, 즉 코카콜라 전체 주식의 7퍼센트를 매입했다. 3년 후 코카콜라 지분은 37억 5,000만 달러로 치솟는다. 1989년 버크셔의 주가가 주당 4,800달러에서 6개월 만에 66퍼센트 상승해 8,000달러에 이른다. 이로써 버핏은 39억 달러 가치의 자산을 보유하게 됐다. 1990년 보유재산 42억 달러로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 부호 2위에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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