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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13. 2022

아버지를 잃고 대학을 다섯 군데나 옮겨야만 했어도,

전공하지도 않은 사진으로 포토저널리스트의 전설이 되다.

221번째 대가의 이야기.


1904년 미국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폴란드계 유태인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여행을 즐겼고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딸에게 사진에 대한 흥미를 심어주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는 아버지를 매우 존경했는데, 그녀가 콜롬비아 대학에 다니던 시절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그녀는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타계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그녀는 학비를 벌기 위해서 사진을 찍어 학교 교지나 학생들에게 팔며 겨우겨우 생활을 유지해나갔다. 이 무렵 그녀는 클레런스 화이트(Clarence H.White)를 만나게 되면서 그에게 사진을 배워 정식으로 사진계에 입문하게 된다.


파충류 연구를 위해서였는지 장학금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두 가지 모두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미시간 대학으로 옮겨 장학금을 받고 파충류에 대해 공부하게 된다. 이 때도 그녀는 대학 연보에 실을 사진을 찍는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이 무렵 그녀는 같은 대학의 대학원생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 정착하는 듯했지만, 1년 만에 인연이 아님을 확인하고 이혼하고 말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여류 사진작가이자 사진기자로 손꼽히는 최초의 여성 전쟁 특파원이자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지역에 처음으로 출입이 허용되었던 여성 기자인 마가렛 버크 화이트(Margaret Bourke-White)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이른바 유일한 여성 포토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주요 시기는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이다. 이 시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변화와 전쟁이 있었던 시기였다. 그 격동의 시기에 그녀는 사진기 하나 둘러메고 역사의 현장마다 함께 했다. 


여자라면 아무도 바지를 입지 않던 시절에 바지를 입고 세계 전쟁터를 누빈 그녀는 누구보다 대담했으며 현장에 충실했고 때로는 미학적이었기에 단순히 사진기자가 아닌 작가로도 인정받고 활동했다.

1935년 뉴욕 크라이슬러 빌딩의 위험한 난간에 올라 촬영을 시도하는 모습.

이후 집이 있는 뉴욕으로 돌아와 가까운 코넬 대학으로 학적을 다시 옮겨 겨우(?) 학업을 마친 마거릿 버크 화이트는 원래 수많은 대학을 전전하며 공부했던 전공을 살려 박물관의 파충류 콜렉터로 근무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찍기 시작한 그녀의 사진은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이미 유명해진 터였다. 그래서 그녀의 재능을 아까워한 친구의 권유로 전문 사진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클리블랜드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연 마거릿은 처음에는 광고 사진을 찍기 시작해서 점차 자신이 흥미 있어하던 건축물과 산업시설을 찍어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여자라는 이유를 핑계 삼아 몸을 사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당시 카메라는 지금처럼 가벼운 장비도 아니었기에 여성이 혼자서 짊어지고 다니기에는 무게가 제법 나가던 시기였음에도 그녀는 그 카메라를 짊어지고 어떤 여성도 입지 않는 바지를 입고서 뜨거운 쇳물이 튀어 오르는 제철소나, 매서운 바람이 부는 공장의 높은 첨탑 등에서 카메라 앵글로 현장을 담아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가지 못할 곳은 없다고 선언한 사람처럼 어떤 두려움도 없이 피사체들을 그대로 자신의 카메라에 담아냈다.

사진이라면 풍경 사진이나 인물 사진만이 대부분이던 당시, 사진을 전공하지도 않은 그녀가 찍어내는 인공적인 시설물에 대한 사진은 상당히 참신한 것으로 사진계에 충격을 전해주었다. 그녀의 새로운 시도는 그렇게 사진계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곧이어 전문 사진작가로서 명성과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29년, 마거릿 버크 화이트는 <타임(Time)>을 창간한 헨리 루스(Henry Luce)가 만든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의 전문 사진가 겸 부편집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본격적으로 보도사진 일에 뛰어들면서 사진기자로서의 경력을 만들기 시작한다.

<포춘>스카우트된 지 불과 1년 만에, 마거릿은 소련의 1차 경제 5개년 계획을 촬영하기 위해 1930년 소련을 방문하였다. 그녀는 소련의 산업현장을 돌면서 사진들을 찍어 <포춘>에 연재했다. 이 사진으로 그녀는 소련의 산업현장을 찍은 최초의 외국 기자가 되었고, 그녀의 사진들은 산업분야 사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녀는 이때의 사진들을 모아 1931년 <러시아 견문(Eyes on russia)>이라는 사진집을 펴내기도 하였다.


1936년 11월에 헨리 루스(Henry Luce) 그가 다시 사진 중심의 시사지 <라이프(Life)>지를 창간하면서 마거릿 버크 화이트는 첫 번째 직원이자 사진작가로서 <포춘>을 나와 프리랜서 사진작가라는 조건을 달며 <라이프>의 창간에 참여하였다. <라이프>의 창간은 사진의 역할 중에서 보도 분야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뉴스를 활자로 읽는 것뿐만 아니라 사진을 통해 현장을 볼 수 있게 함으로써 보다 생생한 정보를 대중에게 전달한 것이다. 이러한 보도 사진의 확장은 제판술(製版術)의 발전으로 사진 인쇄가 대량으로 가능해진 시대적 변화의 덕분도 컸다.

<라이프>는 창간호 표지에는 마거릿 버크 화이트가 찍은 ‘포트 펙 댐(Fort Peck Dam)’ 사진이 실리며 그녀가 그 잡지의 대표 사진작가임을 명확하게 하였다. 포트 펙 댐은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의 뉴딜정책에 의해 지어진 댐이었는데, 그 효율성 등을 두고 여러 가지 논쟁거리가 많은 시설물이었다. 마거릿 버크 화이트는 그 댐의 현장에 가서 댐 시설물을 비롯하여 댐과 관련한 사람들, 노동자와 마을 사람들의 모습 등을 일련의 연작물로 찍어 왔다.


<라이프>는 창간호에 이 포트 펙 댐을 커버 사진으로 실었고, 관련하여 마거릿이 찍어온 여러 장의 사진을 9페이지에 걸쳐 게재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포토 에세이 형식이었지만, 사진을 연결하여 보면 분명 사진작가 마거릿 버크 화이트의 관점과 주장이 명확하게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이것은 보도사진의 새로운 장르를 연 것이었다. 사진이 사실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진작가가 하나의 주제 의식을 가지고 사진으로 표현하는 포토 저널리즘의 세계가 열린 것이었다.

<라이프(Life)>지 창간호에 실린 포트 펙 댐 사진은 다시 한번 그녀의 진가를 인정받으며 그녀의 격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 사진을 비롯해 9페이지에 걸쳐 게재된 그녀의 사진은 사진작가가 자신의 관점과 주장을 표현한 이른바 ‘포토 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즉, 글로 된 기사 없이도 사진만으로 사람들에게 해당 사실에 대해 전달할 수 있다는 방식을 그녀가 증명해 보인 것이었다.


사진이 단순히 현장 기록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사진으로 기사의 관점을 나타내는 ‘저널’의 단계로 뛰어오르게 된 것은, 그녀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는 말이 나온 것은 바로 이 즈음이었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마거릿 버크 화이트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녀의 성공과 함께 <라이프> 지도 성공을 거두었다. <라이프>지의 발행 부수는 그녀의 인기와 비례하여 급격히 늘어났다.

<라이프>에서 일하던 1941년, 마거릿 버크 화이트는 최초로 스탈린의 얼굴을 찍어 다시 한번 특종을 터뜨렸다. 사진 속의 스탈린이 보여준 싸늘한 미소는 그동안 크렘린 안에만 틀어박혀 세계의 궁금증을 자아냈던 공산권의 지도자에 대한 인상을 확정 지으며 그녀의 사진이 말하는 기술이 한층 더 강화되었고 업그레이드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던 와중에 2차 대전이 터지자 마거릿은 여성 최초로 미공군 종군 사진기자로 활약하면서 그 누구도 찍을 수 없는 사진들을 찍어내기 시작한다. 그녀는 독일군이 공습을 퍼붓던 모스크바의 현장에서 서방 기자 최초로 폭격 사진을 담아냈고, 직접 전투 비행기에 타고서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수많은 살아있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들을 펼쳐냈다.

1945년 <라이프>지 표지를 장식한 유태인 수용소 사진.

마거릿 버크 화이트는 2차 세계대전 내내 유럽 전선에 배치된 미공군의 종군 사진기자로 활약하며 수용소에 갇혀있던 유태인들의 참혹한 모습을 세상에 알렸다.


전쟁 내내 유럽 전선에서 종군한 마거릿 버크 화이트는 독일 본토로 진격해 들어가는 미국의 패튼 장군과 함께 라인강을 건너가, 나치 수용소에 갇혀있던 유태인들의 참혹한 모습을 처음으로 세계에 알렸다. 그녀는 유태인 수용소에 최초로 방문한 사진작가로서 나치에 의해 행해진 인류 최악의 범죄를 고발했다. 

사람들은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의 표정과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제 그녀의 사진은 단순한 사진에 그치지 않는 세계의 여론을 결정짓게 만드는 영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 무렵 마거릿의 이러한 활약을 그린 ‘가장 위대한 사진 기자는 여자였다’라는 특집 기사가 <리얼 팩트 코믹스(Real Fact Comics)>에 실리기도 하였다.


마거릿 버크 화이트의 사진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처음에는 주로 기계와 산업현장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다 산업 사진작가가 아닌 사진기자로서의 사진을 찍으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고, 다시 전쟁을 만나게 되면서 종군기자로서의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츰 사진을 찍어 갈수록 그녀는 현장 이면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담고자 하는 방향으로 진화를 거듭하게 된다.

사실, 그녀가 처음으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씨앗은,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었던 진보적 소설가 콜드웰(Erskine Caldwell)과 함께 미국 남부에서 이루어지는 인종차별과 빈곤의 현장을 취재하면서부터 이미 잉태하고 있었다. 


마거릿은 1930년대 미국 남부 소작인들을 취재하면서 현실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녀는 현장 속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표정을 담아내기 시작했고, 그것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는 과정을 거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마거릿 버크 화이트는 약소국가와 인종차별, 종교 분쟁 등으로 관심 영역을 넓혀갔다. 그녀가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2차 대전 후 막 영국 식민지를 벗어난 인도와 인도를 이끌던 시대의 정신, 간디였다. 

그녀는 간디의 역사의식과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저 겉핥기로 취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통해 간디의 정신세계까지 담아내고 싶어 했다. 온전히 간디의 곁에 가서 그를 제대로 취재하기 위해 버크 화이트는 인도인의 상징인 물레 잣는 법까지 배웠다. 마거릿은 물레 잣는 법까지 배워가며 간디를 이해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노력 끝에 간디의 정신세계까지 사진 속에 담아낼 수 있었다. 


그녀가 찍은 사진 중에는 1948년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그의 집에서 평화롭게 책을 읽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 마지막 간디가 남긴 아래 사진이다.

이때의 경험에 대해 마거릿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물레 잣는 사람을 찍고 싶으면 그가 왜 물레를 잣는지 생각해 보라. 이해한다는 것은 찍는 일만큼 중요하다.”


피사체에 대한 지극한 이해만이 가장 좋은 사진을 얻는 방법임을 마거릿은 깨닫고 있었다. 간디는 마거릿 버크 화이트의 이러한 노력에 감동했고 그녀를 가장 신뢰하는 서방의 기자로 생각했다.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준 간디의 정신세계를 마거릿 버크 화이트는 사진을 통해 완벽히 표현해냈다.


마거릿 버크 화이트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1950년 터진 한국전쟁에까지 이어졌다. 이전에는 전장의 상황을 담아내는 것에만 치중했던 그녀였지만, 한국전쟁에서는 전쟁 속에 고통받는 인간의 표정을 생생히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지리산 격전의 현장에 깊숙이 들어간 마거릿 버크 화이트는 그곳에서 어머니와 아들, 아들을 잃고 흐느끼는 여인의 표정, 전쟁의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사진들을 생생히 찍어내 전쟁이 인간에게 주는 고통을 사진을 통해 세계에 알리며 전쟁의 참상에 대해 소리 없는 비판을 가했다.

1952년 한국전쟁 종군기자로 활약하던 마거릿 버크 화이트는 갑자기 몸이 둔해진 것을 느꼈다. 곧이어 몸의 왼쪽에 마비증세가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전에 잠시 걸렸던 뇌염의 영향이 악화되면서 파킨슨 병의 진단을 받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귀국한 마거릿은 결코 병에 굴복하지 않았다. 파킨슨 병이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한 두 차례의 뇌수술 등 18년간 지속된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사진 찍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투병생활을 하던 1964년의 마거릿 버크화이트.

마거릿은 불편한 몸으로도 할 수 있는 사진 찍기를 찾아냈다. 그녀는 항공사진에 눈을 돌려 하늘을 찍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로 <헬리콥터에서 본 미국>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죽음에 임박하여 거의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조차 손가락으로 타자기를 두드려 자서전을 펴내기도 하였다. 1969년 <라이프> 부사장 직에서 퇴임하면서 현역에서 물러난 마거릿 버크 화이트는 2년 뒤 눈을 감았다. 그녀의 나이 68세였다.

마거릿 버크 화이트는 생전에 11권, 사후에 1권의 책을 남겼다. 주요 작품집으로는 <자유에의 도중(途中)(Halfway to Freedom; a report on the new India)>(1949), <당신들은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You Have Seen Their Faces)>(1937) 등이 있다.




글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사진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한 장의 사진이 때로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그것이 현장에 대한 가장 가감 없는 확연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말과 활자보다 눈으로 단번에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진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언어로 그것을 설명할 필요나 그 언어의 장벽에서 오는 오해를 가질 일이 없다.


그래서 다양한 사진들은 역사를 기록했다. 19세기에 개발된 사진이 보도에 도입된 20세기부터 사진은 보도와 기록의 현장에서 빠질 수 없는 매체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진을 통해 세상을 접했고 그것을 역사에 남겼다. 하지만, 그저 단순한 기록사진이 아닌 사진을 찍는 이의 마음과 의도를 사진에 담는 기술(?), 이른바 포토저널리즘은 그녀에게서 기원하였다.

오늘 그녀의 인생을 촘촘히 살펴보며 그녀가 겪은 실패를 그녀가 어떻게 활용(?)하였는지를 당신에게 그녀의 사진과 함께 보여주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사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카메라를 잡는 법에서부터 카메라를 통해 피사체를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아버지를 대학시절 잃는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파충류에 대한 전공을 끝마치기 위해 무려 다섯 군데의 대학을 전전하며 겨우 학위를 얻어 졸업했지만, 정작 그녀가 나아갈 길로 택했던 것은 생계유지의 수단으로 찍고 팔았던 사진이었다.


그것이 우연이고 운명이라고 오독한 멍청한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싶어 몇 가지 첨언하자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던 아버지에게서 배운 카메라를 매일같이 부둥켜안고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그녀가 그 어떤 공부나 전공이나 다른 일보다 그것과 함께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의 사진이 도구이지 않고 그녀로 환치될 수 있는 계기를 맞을 수 있는 진화를 거듭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고 나는 확신한다.


또 한 가지 특이할만한 점은, 그녀가 ‘최초의 여성’이라는 타이틀에 연연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런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에 혐오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녀는 최초의 저널리스트로서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 ‘최초의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잃고 방황하던 시기 사랑으로 사랑을 잊기 위해 결혼했다가 1년 만에 이혼한 것도 그녀에게 있어 큰 아픔이고 또 다른 방황일 수 있었다. 요즘의 이혼과 당시의 이혼은 비중이 달랐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을 단련하고 수양시켜 나갔다.

지금 워킹맘이랍시고 자신의 일에서 성과를 보이며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를 제대로 키우는 것도 아니며, 그 애를 키우는 보육비용을 덮고도 남을 정도의 충분한 돈을 버는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껍데기 워킹맘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그녀에 대한 모독이므로 감히 그녀들을 이 이야기에 언급하는 것을 사양한다.


당신이 워킹맘이든 아니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싱글이든, 혹은 남자이든 그녀의 삶을 보고 부끄워하고 반성하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여 새롭게 나아갈 방향에 대해 아주 잠시라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계기를 갖길 바란다.


왜냐하면 그녀의 가장 큰 시련은 그녀가 죽기 전 18년, 근 20여 년간을 병마와 싸우는 시기였음을 이미 내가 보여줬기 때문이다. 병을 낫게 하기 위한 수술도 아닌,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두개골을 열고 뇌수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기준으로 끔찍하게 두려운 일이 아니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타이핑을 찍으며 자신의 자서전을 썼고, 하늘을 찍었다. 그것은 그녀의 아집이 아닌, 그녀가 그녀의 삶으로 오롯이 보여준 사진과도 같은 여과되지 않은 진실이었다.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고 다 같은 삶이 아님을 그녀는 그녀의 삶을 통해, 그리고 그녀가 남긴 사진을 통해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삶에 진정으로 최선을 다해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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