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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25. 2022

스승은 왜 가르치면서 더 많이 배우게 되는가?

큰 스승을 만드는 것은 결국 제대로 된 제자인 셈이다.

子曰: “回也非助我者也, 於吾言無所不說.”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顔回는 나를 돕는 자가 아니로다. 나의 말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 것이 없구나.”

이 장은 처음 읽는 이들에게는 공자가 변태 선생님인가 싶을 정도로 공자식의 극찬이 표현된 복잡하기 그지없는 장이다. 물론 여러 현대 해설서에서는 이 장을 너무도 간단명료하게 공자가 자신의 애제자였던 안회를 칭찬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논어>에서 공자가 보여준 논법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다른 세계의 것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복잡다단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예컨대,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라는 말로 ‘out’을 말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장에 대한 현대 해설서들의 설명은 대개, ‘제자 안회가 공자의 모든 말을 이해하고 좋아한 나머지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공자의 자기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야기한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왜 내가 이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맞다고 긍정해줄 수도 없는지 그 본연의 의미를 한번 찾아보기로 하자. 먼저 주자의 해설을 통해 그 의미에 접근해보기로 한다.


‘助我(조아;나를 돕는다)’는 ‘자하(子夏)가 나를 흥기 시킨다’는 것과 같으니, 의문으로 인하여 〈학문이〉 서로 진전됨이 있는 것이다. 안자(顔子)는 성인의 말씀에 대해 묵묵히 알고 마음으로 통하여 의문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니, 그 말씀은 유감이 있는 듯하나 실제는 바로 깊이 기뻐하신 것이다.


먼저 나를 돕는다는 말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또 다른 제자 자하(子夏)의 사례를 들었다. 스승의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서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공부했던 바에서 막힌 부분을 해결하여 일취월장함은 물론이고 제자를 가르치면서 그들이 어떤 부분에서 의문을 갖는지 또 그 의문을 개개인의 특성에 맞춰 어떻게 풀어주면 좋을지에 대한 연구를 하게 만드니 말 그대로 교학상장(敎學相長)을 해준다고 칭찬했던 내용을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안회는 스승 공자의 가르침에 그저 웃고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할 뿐 어떤 의문이나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다. 그것을 주석에서처럼 주자는 ‘묵묵히 알고 마음으로 통하여 의문하는 바가 없었다.’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공자가 원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나를 돕는 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인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이다. 왜 그것이 탓한 것이 아니라 극찬한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어설프게 공부한 현대 해설서 작가들은 제자가 똑똑하여 그 모든 것을 이해하였으니 제자를 칭찬한 것이네라는 식으로 뭉뚱그려 설명하고 마는데, 그런 설명은 초급자는 그런가 보다 끄덕일지는 몰라도 중급자 이상만 돼도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라며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구석이 생길 수밖에 없는 해석이다.


그래서 혹시나 배우는 자들이 그와 같은 의문이 생길까 싶었던 것을 걱정한 호씨(胡寅(호인))가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夫子(부자)께서 안회에 대해 어찌 참으로 자신을 돕기를 바라셨겠는가. 이는 성인의 겸손한 덕이요, 또 안 씨를 깊이 칭찬하려고 하신 것일 뿐이다.”


호씨의 힌트는 ‘공자가 자신을 돕기를 바라지 않았다’라는 설명으로 끝난다. 이러한 주석 때문에 적당히 주석들을 짜깁기하는 현대 해설서의 작가라고 하는 이들은 뭉뚱그려 설명할 수밖에 없었을는지도 모른다는 측은지심을 갖게 된다.


자고로 배우는 자는 의문이 들면 그것의 뜻이 통할 때까지 끊임없이 읽고 그 행간의 의미를 길어 올릴 수 있을 때까지 궁구 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찬찬히 다시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배우는 학생일 때의 입장보다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면 배우는 것이 더 많아지고 더 체계적이며 배울 때는 그렇게까지 명료하지 못했던 것들이 확실하게 잡히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직업이 선생인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하지만, 굳이 선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공부했던 것을 가르치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런데 앞서 주자의 주석에서도 말했지만,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질문을 하거나 얼토당토않은 내용으로 궤변을 펴면서 스승의 권위에 도전하는 엉뚱한 녀석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문과 토론은 그 과정을 더욱 다채롭게 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부분을 건드려 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발전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안회의 경우가 왜 그냥 칭찬이 아니고 극찬이라 하였는지에 대해서 더욱 미궁에 빠져든다. 왜냐하면 아무 말도 안 하고 묵묵히 웃고만 있는 학생은 선생의 입장에서 그 녀석이 과연 정말로 이해를 해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를 하지 못하면서 그저 모두 아는 척 끄덕이는 것인지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눈을 반짝이며 늘 노트 필기도 열심히 하고 아이컨택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모두 알아듣는 것처럼 끄덕이던 녀석이 정작 시험을 보거나 간단한 질문에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헛다리를 짚어 황당하게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일단 가장 기본적인 사실관계 체크부터 할 필요가 있다. 현대 해설서에서 대강 설명한 것처럼 안회가 그 모든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의문이 없었다는 것을 공자는 어떻게 알았을까? 과연 확인을 하고 나서 의문이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고서 칭찬한 것일까에 대한 의문을 먼저 해결할 필요가 있다.

문제의 단서는 늘 강조하지만, 원문에 다 있다. 공자의 논법 자체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언제나 공자는 모든 것을 설명한 후이고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문제가 있을 뿐이다. 위 첫 번째 의문에 대해 공자는 원문에서 ‘說(열;기뻐하다)’라는 표현으로 그 모든 해답을 이미 제시하였다.


그냥 아는 척 끄덕이거나 눈을 반짝이며 아이컨택을 했다고 쓰지 않고 저 한 글자로 안회의 학문이 성취단계에 이르었음을 공자가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 확인했음을 설명해준다. 그 글자가 갖는 본연의 의미는 단순히 기분이 좋거나 기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무엇을 알았을 때 느껴지는 말 그대로 ‘깨달음의 희열’을 의미한다.


공자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마라. 공부 안 해본 자들은 죽을 때까지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공자가 그 단계를 거쳐왔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확인 과정을 우리는 앞에서 이미 공부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장의 심오함은 단순히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앞서 말했지만, 여기서 끝나면 현대 해설서에서 아는 척을 하며 제자의 높은 성취에 극찬한 것 정도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원문을 자세히 보라. 안회가 그 희열을 느낀 것이 혼자서 공부하다가 그랬던 것인가? 혼자서 성현들의 가르침을 책으로 읽다가 느낀 것인가? 아니다.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닌, ‘스승 공자의 말씀에 대해서’ 기뻐하지 않은 바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스승인 공자가 극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서 배웠던 '위정 편'의 8장에서 공자가 제자 안회를 하루 종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말에 반문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없어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다면서 그가 물러나고 난 후에 관찰하였다는 일화가 나온다. 결국 공자는 ‘안회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라고 결론짓는다. 그 내용은 바로 이 장과 맞닿아 있다.


스승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반대 의견을 내놓아 격론을 벌여 서로 발전하는 단계를 이미 안회와 스승 공자는 넘어선 것이다. 거기서 더 중요한 점. 바로 안회가 공부하지 않을 때 행동을 스승 공자가 관찰했을 때 그가 스승의 말이 가진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는 설명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스승 공자에게 아주 큰 의미를 부여한다.


무슨 말인지 얼른 와닿지 않는가? 이미 자신이 거쳐왔던 그 정점의 단계에 이른 제자가 지금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어떠한 의문과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까지 하는 완성형을 보여준다. 그것은 스승에게 자신이 펼치는 가르침에 확신을 갖게 해주는 지침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해를 하든 못하든 스승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사리분별을 명확히 하고 시비가 분명할 정도로 공부를 한 제자가 스승이 가르치는 내용에 대해 보이는 절대적인 신뢰에서 스승은 자신이 이제까지 배우고 가르쳐온 인생을 허여(인정) 받은 것이다.

이것이 공자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 것은 천하를 주유하며 모든 군주란 군자는 다 만나고 위정자들을 만나면서도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고 담을만한 그릇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던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 가치는 빛날 수밖에 없다.


자로고 학자라면 자신의 학문을 인정받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학계에서 최고의 수준에 달하는 학자임을 인정받는 방식이, 그저 자신의 유명세를 보고 자신이 쓴 저서를 가지고 와서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사인해달라고 하는 일반인들에게서 얻는 가짜 학자들이 워낙 많은 시대이다.


하지만, 공자와 같은 성인 수준에 이르른 사람이라면 그 갈증은 당연히 더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봐도 그 성장의 속도나 이해의 깊이가 남다른 제자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도 흐뭇한데 그 제자가 이제 일취월장 성장하여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에 묵묵히 웃으며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공자는 자신의 신념이 그리고 그 가르침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보람과 확신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A급 학자에게 인정을 받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진정한 인정을 줄 수 있던 제자를 곁에 둘 수 있음에 공자는 자신의 방식으로 극찬을 안회에게 허여한 것이다.


진정으로 그 경지를 인정하고 인간적으로 존숭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난 안회는 안회대로 그 행복함을 느끼며 이런 스승을 모시고 끝없이 공부하고 배워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마음 깊이 기뻐했겠는가?


스승 공자는 공자대로 이렇게 영민한 제자를 얻은 것도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하여 기뻤는데 어느덧 자신이 성취했던 그 정점에 이르러 자신이 강조하는 배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해 보이는 삶에 초점을 맞추는 제자를 곁에 두고서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고 든든했었겠는가?


이 장은 이제까지 설명한 그 미묘하면서도 최고 경지에 이르른 학자들만이 교감만으로 공감할 수 있는 그 경지의 그림을 그대로 몇 글자 안 되는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다.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이 장의 행간에는 단순히 제자에 대한 지극한 스승의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스승에 대한 제자의 존숭과 공경, 그리고 무엇보다 성인 공자의 지극한 도를 보일 듯 보일 듯 언뜻언뜻 그 형체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거대한 의미를 모두 담아낸 가르침을 단순히 스승의 말귀를 잘 알아듣는 제자에 대한 칭찬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어찌 옳게 해설해냈다고 평가하여 인정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그리고 스승의 날이 있는 가정의 달, 5월에 이 장을 읽는다는 것은 의미가 새롭다. 스승과 제자이지만, 부자간이라고도 보이는 그 모습에서 아무런 미사여구를 넣지 않고서도 가만히 스승이 책을 읽어 내려가면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며 미소 짓는 그들의 모습이 눈앞에 금세 등장하기라도 할 것만 같다.


이른바 ‘라떼’는 집안이 가난하여 월사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공부 열심히 하는 제자를 위해 박봉을 털어 대신 학비를 내주는 스승도 있었고, 도시락을 싸올 형편이 안되어 수돗가에 가서 수돗물로 빈 배를 채우는 제자가 안쓰러워 자신은 속이 안 좋아서 못 먹는다면 꼬르륵거리는 배를 감추고 자기 도시락을 슬쩍 건네주는 스승도 있었다.

그 스승들이 모두 어디에 가버렸는지, 버젓이 '강남 8 학군이니까'라고 강조하면서 학부모에게 명품백을 받아 챙긴 정신 나간 아줌마부터 학폭이 일어났는데, 피의자에 해당하는 것들의 부모가 전문직에 재벌가라면서 피해학생에게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조용히 덮고 넘어가자면서 전학을 종용하는 쓰레기들이 스승의 날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달라고 가슴을 내미는 시대로 바뀌었다.


교권의 추락이니 진정한 교육의 부실이니 하는 것은 결국 스승이 가르쳐줘야만 하는 것이고 그 가르침은 그 가벼운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임을 다시 한번 가슴에 되새기라 공자와 안연은 눈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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