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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26. 2022

전설적인 농구스타에서 에이즈 환자로 추락했지만 - 1

다시 제2의 인생을 불살라 존경받는 기업가로 우뚝서다.

226번째 대가의 이야기.


1959년 다복한 6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이미 아주 어렸을 때부터 농구에 꽂혀 하루종일 연습을 했는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렸을 때 모두 농구를 했던 이른바 ‘선출(선수출신)’이었기에 이미 농구 집안에서 태어난 우월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그는 그 당시 농구로 유명했던 (게다가 흑인들 위주였던) 섹스톤 고등학교로 가고 싶어했지만 사정상 백인이 많은 에버렛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여전히 인종차별이 심할 때라 처음에 그역시 마음에 두고 있던 섹스톤 학교에 가지 못한 걸 후회했으나 인종차별을 견뎌내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농구를 계속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에게 패스조차 안했던 그의 팀원들조차 확고한 운동철학을 가지고 있던 당시 감독이던 조지 폭스의 적극적 개입과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그의 천재적인 농구실력을 받아들여 결국 그가 에버렛 고등학교에서도 주전으로 뛸 수 있게 해주었다. 워낙 사람좋은 성격으로 유명하 유순한 그의 성격을 인정받으면서 백인동료들도 자연스럽게 그를 인정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10학년(고등학교 2학년) 때 한 경기에서 ‘36득점 18리바운드 16어시스트’라는 전무후무한 성적을 기록했고 이후 그를 상징하는 이름처럼 되어버린 ‘매직’이라는 칭호를 <싱스테이트저널>의 프래드 스타브리라는 기자가 별명처럼 붙여준다. 이후에는 베이브 루스의 ‘베이브’처럼 오히려 ‘매직’이 그의 본명인 줄 아는 사람이 대다수일 정도로 굳혀진다.


그는 타고난 재능에 끊임없는 노력과 유순하고 사람들과 잘 섞이는 성격에 마법과 같은 실력을 바탕으로 에버렛 고등학교를 전국 우승으로 이끌게 된다. 그가 일약 고교 농구의 스타로 유명세를 날리게 되면서, 고향 근처에서 살고 싶었던 그는 졸지에 스카우트가 되어 대학을 미시간 주립대로 진학하게 된다.

미국의 NBA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선수로 ‘농구 역사상 마이클 조던보다 위대하다고 논쟁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견없이 역대 최고의 포인트 가드이자 NBA 역사에 꼽히는 올타임 레전드, ‘어빈 매직 존슨 주니어(Earvin "Magic" Johnson Jr.)’의 이야기이다.


현 MLB 야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공동 구단주이자 WNBA 농구 로스앤젤레스 스팍스의 구단주로 기업인으로 화려하게 변신에 성공했다. 간단하게 농구역사상 그가 남긴 기록을 정리해보면, NBA 통산 경기당 평균 어시스트 1위 및 통산 누적 어시스트 6위 기록을 보유하며 NBA 5회 우승, 파이널 MVP 3회, MVP 3회, 어시스트왕 4회, 스틸왕 2회, All-NBA 팀 선정 10회 그리고 올스타 12회 및 올스타전 MVP 2회의 화려한 기록을 보유한 레이커스의 전설적인 프랜차이즈 원 클럽 플레이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마법같은 노룩 패스 플레이로 본명 ‘어빈 존슨’보다 매직이란 닉네임이 더 유명해진 전설적인 포인트 가드로, 1980년대에 사장되어가던 NBA를 래리 버드와 함께 다시 인기스포츠로 끌어올린 일등공신이다. 206cm의 큰 키를 자랑하는 초대형 포인트 가드로, 신장을 이용해 팀이 여의치 않을땐 포워드를 넘어 센터까지도 소화 가능한 멀티플레이어이기도 했다. 10번 이상의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것이 9시즌으로 이 부문 최다 기록 보유자라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1977년 대학에 입학한 후 그는 동기 제이 빈센트와 함께 저드 히드코트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1학년 때부터 선배 그렉 케슬러 등을 따라 17득점 8리바운드 7어시에 해당하는 성적을 거뒀으나, 1978년 NCAA 전국대회 8강에서 릭 로비가 이끄는 켄터키 대학교에게 49-52로 아쉽게 탈락하고 만다. 


그리고 1978-79 시즌에 1년간 칼을 간 미시간 주립대는 2학년이 된 매직을 바탕으로 동기 빈센트, 상급생인 케슬러 등의 새로운 포진으로 무패 행진을 이어나갔고, 결국 1979년 4월에 현재까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본 대학경기라고 불리는 결승전에 진출하게 된다. 이 결승전에서 농구 역사상 최고 라이벌이라고 여겨지는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당시 4학년)가 처음 맞붙게 된다.

물론, 이 전설의 경기에서 최종 승리한 이는 매직이었다. 당시 경쟁자였던 인디애나 주립대는 거의 버드의 원맨팀이었기 때문에 미시간 주립대는 버드에게 더블팀, 트리플 팀의 집중경기를 했고 이로 인해 버드는 평상시보다 훨씬 저조한 경기를 펼칠 수 밖에 없었기에 이 둘 사이의 라이벌전에서 첫 승은 매직이 가져가게 된다.


미시간 주립대를 우승으로 이끈 매직은 대학 농구의 MVP에 해당하는 ‘Most Outstanding Player 상’을 받았고, 1979 드래프트에 신청하게 된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의해서 첫번째 픽으로 뽑히게 된 매직은 가세하자마자 레이커스를 우승후보로 만들어놓는 기염을 토했다. 사실 당시 레이커스가 전체 1순위를 가진 것은 행운에 가까운 일이었다. 원래 이 픽은 그해 꼴찌인 뉴올리언스 재즈의 것인데, 이 픽을 행사하기 3년전인 1976년 레이커스의 슈퍼스타 가드이자 UCLA의 레전드인 게일 굿리치가 자유계약선수로 재즈와 계약하면서 그때 있었던 베테랑 FA 보상 제도로 인해 굿리치를 잃은 대신 재즈의 신인 지명권을 받아오는 공을 들인 것이었다.


1979년 1라운드 픽을 가져오는데 그해 재즈가 전체 꼴찌를 하고, 동부지구 꼴찌를 했던 시카고 불스와 동전 던지기를 해서 최종적으로 1번 픽을 얻게 되어 우여곡절 끝에 매직 존슨을 얻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굿리치는 이적 첫해인 1975-76 시즌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시즌 2/3을 날렸고 굿리치는 이전부터 자신이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억지로 뛰게 했다는 사유로 레이커스에 소송까지 제기했다. 이미 굿리치는 레이커스의 마지막 시즌 때 아킬레스건 부상을 달고 뛰었으며 이때문에 프리시즌 훈련캠프를 빠졌다고 무려 15만 달러의 벌금을 내야했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은 갈 때까지 간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매직은 자신의 길을 갔다. 루키 시즌에 결승에 진출해 Dr. J 줄리어스 어빙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식서스와 붙었을 때, 2승 2패로 동률이던 상황에서 센터이자 주장인 카림 압둘자바가 발목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투혼을 보여주며 5차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결국 압둘자바가 부상으로 뛸 수 없게 되자 모두들 ‘아 이젠 끝이구나!’하고 좌절해 있는데 매직 혼자서 당당하게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매직이 있습니다!”라고 과감한 선언을 하고는, 경기 시작 전 코치를 찾아가 “제가 센터를 해보겠습니다.!”라고 나선다. 매직의 뜬금없는 제안에 뻥진 웃음을 터트린 코치에게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이 아니라며 해명아닌 해명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 매직은 6차전에서 센터로 시작해 가드와 포워드 역할까지 수행했다.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당시의 압둘자바처럼 골밑을 철저히 지키는 교과서식 센터로 플레이한 것이 아닌, 가드와 포워드를 오가는 평상시의 플레이에 가까운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농구를 본 이들에게는 포스트업을 자주하니 센터 역할을 한 게 아니냐고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매직 존슨은 원래 포스트업에 이은 골밑 마무리와 훅슛으로 주로 득점하는 스타일의 선수이다. 

때문에 오히려 중거리에서 약한데 점프슛이 없고 세트슛으로 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신의 플레이스타일 때문에 매직은 외곽에서 게임리딩을 하다가 패스를 하고 포스트업으로 쭉쭉 밀고 들어가다가 본인이 마무리하거나 오픈된 동료에게 패스하는 파워포워드에 어울리는 플레이를 구현하던 선수였다. 


그렇게 결국 6차전에서는 ‘42점 15리바운드 7어시스트’라는 경이적인 활약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결국 파이널 MVP는 압둘자바가 아닌 매직에게 돌아갔고, 이는 최연소 파이널 MVP(만 20세)이자 신인이 받은 첫번째이자 지금까지도 아무도 기록을 깨지 못한 파이널 MVP였다.


당시 압둘자바는 리그 MVP였고 당연히 팀 내 독보적인 에이스였다. 그런데 갑툭튀한 신인이 한 시리즈 잘했다고 MVP와 모든 주목을 독차지하게 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때 매직은 21.5점 11.2리바운드 8.7어시스트 2.7스틸로 트리플 더블에 가까웠으나 압둘자바는 무려 33.4점 13.6리바운드 3.2어시스트 4.6블럭을 기록하며 가장 압도적인 활약을 했다. 게다가 압둘자바는 어차피 6차전을 질 거라고 생각하고 홈에서 열리는 7차전을 준비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가지도 않은 채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당시 압둘 자바

90년대 이후에는 NBA팀들이 전세기나 전용기로 이동하고 온갖 호화시설을 사용하지만 당시는 그럴만한 환경이 조성되지도 않았고 미국의 끝에서 끝인 필라델피아 - 로스앤젤레스 왕복비행을 하느니 컨디션 조절하면서 7차전 준비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원정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졸지에 팀의 에이스가 팀이 우승하는 자리에 빠져있는 꼴이 되버렸다. 당시만 해도 상위시드팀 홈-하위시드팀 홈에서 번갈아가며 하는 경기수를 2-2-1-1-1로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만 8번 결승에 올라간 레이커스가 서부의 끝에 위치했었고, 디트로이트가 강팀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매번 파이널에 올라가던 필라델피아, 보스턴이 모두 동부연안 도시 연고팀들이라 이동거리가 선수들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길어지자 86년 파이널부터 2-3-2 시스템으로 바꿨다. 물론 이렇게 되면 상위시드팀에 불리하다는 지적에 이젠 전용기도 있다는 이유로, 2014년부터 다시 2-2-1-1-1 시스템으로 돌아오게 된다.


성공적인 루키 시즌을 거뒀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신인상은 래리 버드가 가져갔다. 이때 매직은 자신도 충분히 신인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현실은 버드에게 완전히 밀려 자신이 신인상을 받지 못해 실망했다고 회상했다.

압둘 자바와 매직 존슨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당시 MVP나 신인왕 투표 기록을 보면 알지만 신인시절 둘은 레벨자체가 하늘과 땅차이였다. 워낙 둘의 나이 차이가 있어서 버드가 훨씬 완성된 상태로 데뷔했기 때문에 이제 스무살도 안된 매직이 그와 비교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버드는 이 해에 전 시즌에 29승을 거둔 팀을 혼자 힘으로 리그 전체1위인 61승으로 이끌며 MVP투표에서도 4위에 오르며 올 NBA퍼스트팀에 올랐다. 반면 매직은 좋은 활약을 보이고 올스타에 선정되긴 했으나 MVP 투표에서 한 표도 못 얻고, 퍼스트팀은 커녕 세컨팀에도 선정되지 못했다. 이 정도 차이가 나니 버드가 신인왕을 차지하는 건 당연한 거였고 투표에서도 버드는 63표를 얻은 반면 매직은 3표에 그쳤다. 둘의 커리어를 보면 초창기는 더 완성되었던 버드의 우세(매직은 4년차가 되어서야 퍼스트팀에 올랐다)였고, 중반기는 용호상박, 그리고 버드가 몸이 망가지고 난 이후 후반기는 매직의 확연한 우세였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래리 버드와 함께

실제로 버드가 1984-85~1985-86 시즌 MVP를 차지한 이후 1986-87 시즌, 1988-89 시즌, 1989-90 시즌에 매직이 MVP에 올랐다. 그러나 매직의 팀성적이 더 우세했기 때문에 개인기량은 백중세였음에도 커리어 상으로 매직이 더 높게 평가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신인상을 받지 못한 것을 서운해했다는 매직의 이 발언을 언급한 것은 이유가 있다.(이 발언은 공식적으로 HBO에서 방영한 ‘A Courtship of Rivals Basketball’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한 것이다.) 누가봐도 객관적으로 실력 차이가 났었음에도 불구하고 막 우승을 거두고 루키로써도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던 매직이 버드가 받는 주목에 자극을 받아 자신을 불태우는 동기를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음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이때부터 최소한 매직에게는 둘 사이의 라이벌전이 이미 시작된 것이었음을 의미했다. 버드 또한 1980-81 시즌에 파이널에 올라 휴스턴 로켓츠를 꺾고 첫 우승을 차지해 매직과 동률을 이루었다. 이후 레이커스는 1982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으로 훗날 큰 경기에 강한 선수로 거듭날 제임스 워디를 지명했고, 시즌 초반에 7승 4패를 기록중이던 폴 웨스트헤드 감독이 경질되고 팻 라일리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라일리의 부임과 함께 레이커스는 승승장구하면서 1982년에 필라델피아 76ers를 상대로 우승을 거두며 매직은 두번째 우승과 두번째 파이널 MVP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1984년에 다시 한 번 결승전에 진출했고 드디어 버드의 보스턴 셀틱스와 만나게 된다. 1차전을 잡으며 이기나 했지만 2차전과 4차전에서 매직이 실수를 저지르면서 결국 7차전에서 셀틱스에 무너졌고 버드에게 복수당했다. 매직은 이때의 패배가 그를 바꿔놓았다고 회고한다.

라이벌간의 광고

1985년에 지난 패배를 설욕하겠노라고 칼을 갈고 다시 결승에 진출했으며 이번에는 절치부심한 레이커스 멤버(특히 압둘자바)들과 성공적으로 셀틱스에게 승리함으로서 작년의 복수를 확실하게 한다. 그 다음해에는 아쉽게 휴스턴에 패배하면서 결승에 못 오르게 된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1987년)에 기다리던 버드와 또 만나게 되는데 이번에도 매직이 이기게 된다. 특히 4차전에 그 유명한 매직의 훅샷이 (그가 스스로 ‘쥬니어 훅샷’이라 이름지은) 나오게 되었는데 이 게임에서 완성을 이루며 우승까지 하게 된다. 

이후에 버드가 건강상의 이유로 셀틱스가 부진하게 되며 매직과 버드는 다시 재회하지 못하게 되어 이 시리즈가 그 둘의 마지막 시리즈가 된다. 그리고 매직은 이 시리즈에서 그의 마지막이자 세번째인 파이널 MVP를 얻게 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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