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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02. 2022

공자, 제자의 죽음에 하늘을 향해 울부짖다!

진정한 성군과 스승의 완성은 후계자의 안착으로 판가름 난다.

      顔淵死, 子曰: “噫! 天喪予! 天喪予!”
顔淵이 죽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구나.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구나.”

이 장은 연속되는 안연의 죽음에 대한 상황을 그린 장으로 아주 간결하기 그지없게, 하지만 아주 비통하게 공자의 울부짖음만이 담겨 있다. 늘 논어를 강독하면서 강조하지만, <논어>에서 의미 없이 들어간 장은 단 한 장도 없다. 그리고 공자의 언행에 있어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언행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장에서 왜 그렇게 제자 안연의 죽음에 비통해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으로 가르침을 주는 것과 상반되게 굳이 이 장을 넣어 공자의 애절함을 표현한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당신이 지금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어떠한 현대 해설서에도 그 의문을 시원하게 해소해주는 설명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해답은 원문에 있다는 만고의 진리를 마음에 담은 채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이 부분에 대해 생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부분을 주자는 주석을 통해 넌지시 다음과 같이 제시해주고 있다.


‘噫(희)’는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소리이다. 도가 전해지지 못함을 서글퍼하여 마치 하늘이 자신을 망하게 한 것처럼 여기신 것이다.


공자가 단순히 제자의 죽음이 안타까운 정도를 넘어서서 자신의 뒤를 이어 도를 세상에 전할 도통(道統)이 끊긴 것이라고 하늘을 원망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여러 현대 해설서에서 대강 설명하듯, 단순히 자신의 후계자를 잃은 낙담과 절망의 표현을 훌쩍 뛰어넘어서고 있음을 그냥 봐도 알 수 있다.


먼저 하늘을 언급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자는 절대자나 조물주를 신봉하거나 그것에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에서는 하늘을 대놓고 원망하는 듯한 모습으로 오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울부짖음은 단순한 슬픔이나 애통함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공자가 자신의 의지를 담보하고 있던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하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정도의 동요를 보여준다. 이 장이야말로 우리가 이제까지 인간의 경지와는 근접 비교조차 할 수 없다고 여겼던 성인 공자가, 우리와 유리된 절대성인의 모습이 아닌 동일한 한 사람의 인간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하늘을 신봉하거나 조물주나 절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공자라고는 하지만, 공자에게 있어,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하늘은 나의 존재를 떠받쳐주고 있다는 암묵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종교적인 색채를 띤 것과는 또 다른 어떤 본능에 가까운 절대적 진리에 대한 막연하지만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계기나 사건으로 인해 그 믿음이 흔들릴 정도의 동요가 오게 될 경우, 인간은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된다.


완전한 좌절과 포기로 이어지거나, 오히려 그러한 동요를 통해 이제까지 자신이 본능적이거나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던 강렬하면서도 절대적인 믿음을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되고, 그 절대적인 믿음을 실체하는 것으로 인지하게 되면서 자신에 대한 겸허와 동시에 순응해야 할 불가지한 것에 대한 부분을 인정하게 된다. 도저히 인간으로 어떻게 해도 바꾸지 못할 그 무언가에 대한 절대 선을 가서 만지고 오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장에서 공자는 구체적으로 ‘하늘’을 언급하며 절규하고 오열하며 원망하는 것은 바로 그 과정을 오롯이 원테이크로 담아내어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제 자연스럽게 그렇게까지 공자를 격정과 동요하게 만든 슬픔의 원인이 단순히 그가 아끼고 아끼던 제자가 죽어서였는가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진다.


이전 장에서도 공부한 바 있지만, 실제로 자신의 아들 백어를 먼저 보냈고, 이후 자로(子路)의 비참한 죽음이라던가 여러 제자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경우도 있지만, 이 장에서 보이는 안연의 죽음을 슬퍼하는 공자의 언급 외에 다른 어떤 이의 죽음에 대한 애도도 이처럼 처절하게 묘사된 부분은 논어의 그 어디에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 실마리는 역시 원문에서 찾을 수 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다.’는 행간의 의미에 담긴 뜻이 그 의문을 푸는 가장 주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공자가 말한, ‘자신을 망하게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공자의 계획을 망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계획이 무엇이었는가를 거슬러 곱씹어보자. 그저 천재적인 능력을 갖춘 자신의 가르침을 모두 알아듣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정도의 이해력을 갖춘 제자와 재미있게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 공자의 계획이었나?


아니다. 공자가 제자를 키우는 것에 비중을 더 크게 두기 시작한 그 시점은, 자신이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을 들어서 쓸만한 그릇의 위정자가 없다는 것을 직접 자신의 발로 뛰며 확인하였기 때문이고, 그렇게 수년간을 천하를 떠돌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가 제자를 키우는데 집중한 것은 할 것이 없어서 제자 양성이나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세상의 그릇됨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제자를 양성해내는 것임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본래 의도였던 세상을 바로 세우고 도를 찾아오는 일을 본인이 하겠다고 뜻을 펼치고 싶었으나 그것이 외재적인 이유에서건 다른 어떤 이유에서만 막히고 나자 저마다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인재들을 받아들여 그들에 맞게 맞춤 교육을 하여 또 다른 자신을 클론처럼 만들어내어 자신이 하지 못했던, 세상을 바로잡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연은, 그 제자들 중에서도 자신을 대신하여 세상을 바로잡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릇이고, 도량이었다. 그는 공자 자신 이상으로 자기가 죽은 후 이 난세를 올바른 세상으로 만들 비범한 교육가이자 사상가였으며 철학자였던 것이다.


내가 언제 어떻게 되더라도 나보다 더 나은 업적으로 내가 이제까지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후계자가 마련되어 있는 것만큼 든든한 것도 없다.


그렇게 믿고 의지하고 기대에 마지않던 후계자가 갑작스럽게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이쯤 되면 내가 세상에 내놓아 내 분신과도 같은 자식의 죽음도 장이 끊어지는 아픔으로 죽을 것 같을진대, 그보다 더 큰 대승적인 차원에서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배움과 실천을 밑바탕으로 삼으며 제자를 양성하고 후계자를 삼을만한 이를 마련해두었다고 든든해했던 공자의 입장에서는 어찌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몇 해전, 다혈질의 성격 때문에 죽음을 맞았던 제자 자로가 죽었을 때도 “아, 슬프다! 하늘이 나를 망쳐버렸다(天祝予)”라고 한 것이나, 노나라 서쪽의 사냥에서 기린이 잡히자 “나의 도가 궁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던 것이 모두 이와 같은 간절함에서 나온 탄식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장은, 단순히 사랑하는 애제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인간적인 스승의 면모를 기본으로 하여, 보다 더 높은 단계의 세상에 도를 바로잡을 계획을 꿈꾸었던 공자의 큰 야망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린,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도모해야 할지 모를 정도의 엄청난 좌절과 시련을 마주한 공자의 절규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로 공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접었지만 오로지 한 가지, 세상의 잘못된 것을 가르침을 통해 양성한 제자들로 바꿔나가겠다는 큰 그림을 언뜻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다못해, 가업이라는 회사의 경영을 하면서도 후계자를 누구를 두느냐에 따라 그 기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지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해나가는지에 국면을 맞이하고는 한다.


어떻게 경영자 한 사람이 바뀌는 것만으로 그렇게 될 수 있겠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화성에 가서 살겠다고 우주선을 띄우는 지금의 현실에서조차 동양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닌 미국이나 유럽의 회사들에도 창업자에 이은 후계자가 누가 되는가에 따라 그 기업의 운명이 바뀌는 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왕위를 세습하던 중세 봉건제도상에서는 그 나라의 운명이 누가 왕이 되느냐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기업의 성패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중대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 살아 있을 때 다음 후계자인 태자를 누구로 낙점하는가는 중요한 문제였고, 그것을 정하는 데 있어 신하들의 의견도 적지 않게 반영되었다.


그들이 섬겨야 할 군주였으며 그들의 운명은 물론이고 나라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은 아주 중요한 결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훌륭한 성군으로 성장할만한 태자를 책봉하고 나서도 ‘제왕학’이라고 하여 왕이 죽어 급하게 불가피한 계승이 아니라면 미리 성군이 될만한 훈련과 공부를 끊임없이 준비하도록 하였다.

<정관정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그렇게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문제는 터졌고, 그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국가는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 원인은 언제나 잘못도니 후계자의 계승이었다.


제대로 된 후계자가 지정되었을 경우, 문제가 된 국가는 단 한 국가도 없다. 즉, 후계자가 성군인데, 어쩔 수 없이 반란이 일어나 제거되었다던가 다른 나라에게 침공당해 전쟁에 져서 사라져 버렸다던가 하는 일은 역사에서 찾기 보기 어렵다.


제대로 된 미래를 만들고, 과거에 저지른 실수를 두 번다시 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정리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믿었던 공자는 실제로 그렇게 역사를 정리하였고 공부했으며 그 이념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며 실제에 적용해왔다.


그런 입장에서 공자가 자신의 후계라고 생각할 정도로 허여 했던 후계자 안연은 마흔이 갓 넘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다른 문헌에서 32세에 세상을 떴다고 언급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 이후 고증학자들의 정리에 의하면 마흔을 갓 넘기면서 죽은 것이 사실에 가깝다는 연구들로 인해 사실관계가 정리된 바 있다.)


그래서 봉건제나 가족경영체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현대의 경영학에서는 ‘전문경영인 제도’라는 것이 어느 사이엔가 등장했다. 전문경영인이라는 것은, 이른바 가족경영이라는 이름으로 봉건제의 왕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혈족인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방식에 의존했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본능에 의존한 계승 방식이었다.

그게 반해 ‘전문경영인 제도’라는 것은 인류가 경제학적 이성에 의거하여 가장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경영을 맡긴다는 냉철한 이성과 경험을 토대로 나온 합리적인 대안이었다.


하지만, 전문경영인을 고용한다고 해서 무조건 죽어가던 회사가 다시 부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잘 나가던 회사가 전문경영인을 잘못 들이면서 악화일로로 나락에 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을 보면, 단순히 아들을 후계자로 지정하고 후계자 교육을 시켰던 봉건제의 방식과 결과를 비교해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앞서 봉건제를 언급하며 친족 계승을 하는 것이 마치 중세 시대의 전유물인양 말한 것은 일반적인 사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인간들에 대한 것이었다. 공자의 가르침에 있어 역사 속에서 성인에 해당하는 도통(道統)을 계승한 인물들은 모두 자기 자식에게 왕위를 계승하지 않았다.


우리가 <논어>를 통해 앞서 공부했던 것처럼, 공자가 따르고자 하는 시대의 성인들은 이미 전문경영인을 통해 국가를 경영하도록 하였다. 우리가 앞서 배운 요임금과 순임금이 그러하였고 이후 우임금이 또한 그러하였다.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는 유학이 이미 초기에 성인이라고 일컫는 인물들을 통해 왕위의 계승 과정을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는 것은 대단하다고 여긴 것은 바로 이러한 현대 경영학에서 뒤늦게 구체화된 것일 뿐 이미 완성된 형태로 실천된 바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자기 자식에게 계승한다고 해서 잘못되는 것만도 아니고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준다고 해서 잘되는 것도 아님은 왜인가? 이 이야기에 대한 해답과 생각할 거리가 바로 이 장에서 공자의 계획이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자신의 도를 이어나가 더 확장시킬 수 있는 인재중 하나로 안연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장에 보이는 공자의 좌절은 진정한 자신의 학문과 세상을 바로잡는 큰 그림의 완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맞다. 공자가 생각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그림의 완성은 자신만이 완벽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평생의 공부를 통해 이미 확인한 터였다. 모든 성군들의 완성은 자신의 후계자를 통해 자신이 일궈낸 바탕을 온전히 완성시킬 수 있는 후계자로 이어지는 것까지가 완전한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음을 공자는 역사를 통해 알았고, 자신의 천하 주유를 통해 확인했던 바, 그 완성을 맺지 못하게 되었기에, 하늘이 자신을 망친다고 오열했던 것이다.

그래서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인정받는 피터 드러커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성공한 CEO가 치러야 할 마지막 시험이 하나 있다. 그 시험은 후계자의 적절한 선택이다. 그리고 후계자가 기업을 잘 경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적기에 권한을 위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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