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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31. 2022

애제자가 죽었다고 해서 원칙의 예외를 두진 않는다.

원칙을 깨는 순간, 기준은 사라지고 만다.

顔淵死, 顔路請子之車以爲之槨. 子曰: "才不才, 亦各言其子也. 鯉也死, 有棺而無槨, 吾不徒行以爲之槨. 以吾從大夫之後, 不可徒行也."
顔淵이 죽자 顔路가 孔子의 수레를 팔아 槨(외관)을 사기를 청하니,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재주가 있거나 재주가 없거나 또한 각각 자기 아들이라고 말한다. 〈내 아들〉 鯉가 죽었을 적에 棺만 있고 槨은 없었으니, 내가 〈수레를 팔아〉 徒步로 걸어 다녀 槨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은 내가 大夫의 뒤를 따르기 때문에 도보로 걸어 다닐 수 없어서이다.”
이른바 '안묘'라고 불리는 안회의 묘 입구에 있는 복성묘방

이 장은 앞에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안연이 죽고 난 직후에 벌어진 일화를 보여주는 장이다. 집안에 가난하기 그지없던 안연이 죽어 장례를 치르려고 하는데 돈이 없어 槨(외관)을 구할 수 없자, 안연의 아버지가 공자를 찾아와 공자의 수레를 팔아서 애제자였던 자기 아들의 槨(외관)을 사달라고 요청한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안로(顔路)는 안연의 아버지이니, 이름이 無繇(무요)이다. 공자보다 6세가 적으니, 공자께서 처음 가르칠 적에 수학하였다. ‘槨(곽)’은 외관이다. 곽을 만들 것을 청함은 수레를 팔아 곽을 사려고 한 것이다.


안연의 아버지 역시 초기에 공자에게 학문을 수학했던 제자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제자였던 사람의 입장에서 아무리 자신의 아들이 요절한 슬픔이 있다 하더라도 이런 행동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완곡하게 둘러서 비판한 것이다.


굳이 이 내용과 함께 나이가 공자보다 6살이나 어렸다는 것을 설명한 이유는, 공자가 뒤이은 대답을 통해서 보인 언행이 결코 연배가 위인 사람에 대해 참람되이 군 행동이라는 오해를 미연에 불식하고자 함이다.


아들의 槨(외관)을 사게 스승인 공자에게 수레를 팔아달라는 요구를 했던 것을 보면 안연의 아버지였던 안로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전에 공부할 때도 설명한 바 있지만 당시 수레는 상당한 고가의 물건이자, 궁을 갈 때 필요로 한 필수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관을 덮는 덮개역할을 하는 곽

아들이 죽은 것도 슬픈데, 그 아비가 아무리 연배가 아래이고 제자였던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에게 잘못을 지적하고 가르치는 것까지는 고지식한 공자라 하더라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단칼이 그 부탁을 거절한다. 거절하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꾸짖는 대신에 에둘러 역시 자신도 먼저 보낸 아들이 죽었을 때의 상황을 빗대서 설명하면서 원칙상 안 되는 것을 요구한 안로의 잘못된 생각을 넌지시 교정하는 가르침을 구사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여 공자가 왜 갑자기 죽은 자기 아들의 이야기를 꺼내고 도보로 걸어 다닐 수 없어 수레를 팔 수 없다는 핑계(?)를 댔던 것인지 설명해준다.


鯉(리)는 공자의 아들 백어이니,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鯉(리)의 재주가 비록 안연에게 미치지 못하나 자신과 안로가 아버지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두 자식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공자가 이때 이미 致仕(치사, 벼슬을 내놓음)하셨으나 아직도 대부의 반열을 따랐는데, 뒤라고 말씀한 것은 겸사이다.


주자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 공자는 벼슬을 내놓기는 했지만, 마지막 대부의 대접을 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노나라의 군주가 부르기라도 하면 당장 걸어서 궁에 입궐할 수 없는 입장이기는 했다. 게다가 가장 먼저 이야기했던 것이 자신의 아들이 죽었을 때도 槨(외관)을 해주지 못했다는 설명으로 감정적이었을 안로에게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공감을 불러내는 방식을 드러낸다.


원문에서 말했던 ‘재주가 있던 없던 똑같은 자식’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안로의 자식인 안연과 자신의 아들 백어를 비유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애제자이자 안로의 아들 안연을 높여준 것이다.

1331년에 세워진 원가봉연복성공제사비(元加封兗複星公制詞碑)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아버지인 안로만큼이나 더 자신이 슬퍼하고 있음을 안로에게 전달하며 위로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안연이지만 재주 없고 부족한 자기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형편이 여의치 않아 수레를 팔아가면서까지 槨(외관)을 마련해주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그런 요구에 응하여 마련해준다는 것은 형평성의 원칙에도 안 맞는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 첫째이고, 두 번째로 수레를 갖추고 있는 것이 사치품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기 위해 그러했다는 것을 설명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는 이들이 혹시나 그 행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할까 싶었는지 호씨(胡寅(호인))가 이 장의 행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해주고 있다.


“공자께서 옛 여관 주인의 喪(상)을 만나자, 일찍이 驂馬(참마, 곁말)를 벗겨서 부의하셨다. 그런데 지금 안로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으심은 어째서인가? 이번 장례에는 외관이 없어도 되고 곁말은 벗겼다가 다시 구할 수도 있으며, 대부는 도보로 걸어 다닐 수 없고 〈군주가 하사한〉 명차는 남에게 주어 시장에서 팔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내가 알고 있는 궁핍한 자가 나의 은덕을 고맙게 여김을 위해 억지로 그 뜻에 부응한다면 어찌 진실된 마음이며 곧은 도리이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군자는 예를 행함에 자신의 있고 없음을 살펴볼 뿐이다.’ 하였다. 그러나 군자가 재물을 씀에는 의리의 옳고 그름을 보는 것이니, 어찌 다만 있고 없음만을 볼뿐이겠는가.”


호씨의 주석에 따르면, 공자가 이전에 인연이 있던 여관 주인이 상을 당했을 때, 자신이 타고 다니던 말을 벗겨서 부의하라고 주었다는 사례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을 굳이 먼저 언급한 것은, 왜 그때는 그렇게까지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에 대한 시중(時中;그 때의 상황에 도의에 맞춰 행동하는 것)의 진의(眞意)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 기꺼이 부의했던 곁말은 예의를 갖춤에 있어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이다. 즉,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제대로 장례를 지내지 못하던 이를 위해서 내놓은 것이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번 장의 경우에는 안연의 아버지 안로가 굳이 공자의 수레라도 팔아서 槨(외관)을 해달라는 다소 무리한 구체적인 요구를 하였다. 그런데 그 수레가 없으면 기본적인 예를 갖추지 못하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공자의 설명은 단순히 대부의 높은 신분에 어떻게 자신이 뚜벅이로 다닐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수레 자체가 군주가 부르면 언제든 예를 갖춰 오라며 하사한 물건이었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준 것이다.


다시 말해, 안연이 죽었을 당시의 공자의 상황도 여의치 않았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만약 공자의 학원 재정상태나 공자가 당시 여유가 있었다면 굳이 안로가 공자에게 수레를 팔아서 槨(외관)을 마련해달라는 요구자체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정을 구체적인 사실로 뒷받침해준 것이다.


하지만 사실적으로 해줄 수 없었기 때문에 단순히 해주지 않은 것이라면 이 장은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안연의 죽음이 있었던 당시의 사실관계만을 묘사하는 글에 지나지 않았기에 논어의 한 장으로서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러한 사실관계를 기본에 깔고 정작 공자가 말하고자 했던 행간에 대해 뒷부분에 설명한다.


‘내가 알고 있는 궁핍한 자가 나의 은덕을 고맙게 여김을 위해 억지로 그 뜻에 부응한다면 어찌 진실된 마음이며 곧은 도리이겠는가.’


아! 사실 호씨의 이 주석은 앞서 주자가 그대로 흉내 냈던 공자의 이 장 원문의 해설 방식을 그대로 모사해낸 것이다.


공자가 차마 안로에게 차갑게 거절하며 그래도 한 때 자신의 문하에서 예를 배웠다고 하는 자가 아무리 자식을 잃었다고 하여도 그런 참람된 요구를 한다는 것인지 꾸짖는 대신에, 자신이 자식을 잃었을 당신의 사실을 통해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감정에 의지하여 설명을 시작하고, 그 뒤에는 수레가 자신의 것이 아니며, 그 역할이 없애도 괜찮을만한 것이 아님을 겸사까지 넣어가며 설명한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앞에서는 사실관계로 그럴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을 통해 설명하고 난 뒤, 진정한 의미에서 공자가 말하고자 했던 행간을 강조하여 해설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안묘에 있는 복성전 안의 안회 상

‘혹자’의 말을 인용하며 ‘군자는 예를 행함에 자신의 있고 없음을 살펴볼 뿐이다.’이라는 말을 남긴 것도 역시 공자의 말하는 방식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원래 전고가 있지 않고 ‘혹자’라고 인용하는 경우는 은자(隱者)의 가르침을 언급할 때 공자가 사용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 인용한 내용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공자의 가르침이 그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방식임을 자신의 해설을 통해 호씨는 확장하고 강조한다.


혹자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를 행함에 있어 있으면 하는 것이지만 없으면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의거하여 당장 재물이 넉넉하지 못해 槨(외관)을 살 수 없는 상황임에 그것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도 아닌데, 굳이 군주가 내려준 수레까지 팔아가면서 마련해달라고 했던 안로의 비례(非禮)를 질정하는 것과 동시에 공자의 완곡한 거절을 통한 가르침이 그것을 보고 듣고 있던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일깨움을 준다는 것을 설명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형편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재산을 팔아가면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혹자의 가르침을 뛰어넘어 성인 공자의 가르침을 ‘군자가 재물을 씀에는 의리의 옳고 그름을 보는 것이니, 어찌 다만 있고 없음만을 볼뿐이겠는가.’라고 행간에서 길어낸다.

즉, 단지 형편이 여의치 않고 재물이 넉넉하지 않아서 안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보다 훨씬 우선되어야 할 기준, 주석에서 호씨는 ‘의리’라고 표현했지만 결국 그것은 공자가 늘 가르치고 했던 지켜야 하고 넘지 말아야 할 바로 그 ‘도(道)’임을 밝혀 3단계 설명의 정점을 보여주며 울림의 여운을 배우는 자들에게 준다.


이것이 바로 앞선 길을 간 선배 학자들의 진정한 공부 방식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논어>를 읽으면서 내가 ‘주자집주(朱子集註)’를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자가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선배 학자들이 내놓은 공부 노트를 총망라하여 그 내용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것들을 추려서 편집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주자에 이어 호씨가 보여주는 주석의 방식은 왜 ‘주자집주(朱子集註)’를 통해서 <논어>를 공부하며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선배 학자들과 마치 한 교실에서 수업을 하며 함께 지도받는 느낌을 갖게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취지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고전,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며 장사속으로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자들이 지식 마케팅을 하며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분야를 전공한 대학교수라는 이마저도 방송 매체나 출판물을 통해 잘못된 줄도 모르고 버젓이 떠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식을 포장해서 파는 것이 과연 인문학이고 고전일까, 하는 회의는 여전히 떨쳐버리리가 어렵다.

지금 우리가 매일 아침마다 공부하는 동양고전의 대표적인 필독서라고 하는 <논어>도 그러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양철학 원서도 그러하고, 제대로 원서의 행간을 읽고 해독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들에게 직접 배웠던 제자에서부터 그들의 의미를 수세기에 걸쳐 연구하고 공부했던 선배들의 노작들이 참으로 큰 도움이 된다.


하다못해 허접한 대학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치르는 데에도 잘 정리된 노트와 족보가 필수적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저 고명한 인문학 고전을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랴.


동서양의 고전을 원전으로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내가 터득한 것은, 일단 그 언어로 작성한 성현들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원문을 해독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을 공부하는 대가 중에서 희랍어와 라틴어를 할 줄 모르는 이가 없는 것처럼 양고전을 언급하면서 한문의 문리(文理)도 트이지 않은 자들이 그 의미를 올바로 읽어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언어들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이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에 더욱 공부하려는 이들이 적고, 그 공부는 한두해 적당히 공부해서 문리(文理)가 나는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하려는 이들도 적거니와 시작하더라도 그 끝을 보는 이들이 거의 없기 마련이다.


그런데, 삶은 그렇지 않던가?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던가? 진정 가치 있는 것을 얻는 것이 그리 쉽고, 아무런 노력을 들이지 않고 단시간 내에 얻을 수 있다면 누가 꾸준히 노력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갈 것이란 말인가?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하는 기본을 이루는 원칙은, 누군가 정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을 수양하다 보면 어디를 넘어서는 안되는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가 더욱 명료해질 뿐이니 부러 그것을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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