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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03. 2022

공자는 통곡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르침을 준다.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자에 한해서만.

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 曰: “有慟乎? 非夫人之爲慟而誰爲?”
顔淵이 죽자, 孔子께서 곡하시기를 너무 애통해하셨다. 從者가 말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너무 애통해하십니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너무 애통함이 있었느냐? 저 사람〔夫人〕을 위해 애통해하지 않고 누구를 위해 애통해하겠는가.”
안묘의 제위

이 장 역시 연이어 안연의 죽음을 맞이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현대어에서 흔히 사용하는 ‘통곡(慟哭)’이라는 한자어는 고문에서 통(慟)과 곡(哭)으로 나뉘는데, 의례적으로 ‘아이고~ 아이고~’하며 장례식에서 하는 것을 ‘곡(哭)’이라 하고, 정말로 슬픔에 겨워 꺼이꺼이 울며 오열하는 것을 ‘통(慟)’이라고 한다. 그것을 구분해주기 위해 주자는 주석에서 ‘慟(통)’을 해설하며, ‘ 슬퍼함이 지나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게 형식적인 곡을 하지 않고 너무 슬픔에 오열하는 모습을 보이자, 평소에 그런 감정이 절제되지 않은 모습을 보지 못했던 제자들이 쑤군대기 시작했다. 스승이 이렇게 이성을 잃을 정도의 오열하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거니와 그렇게까지 슬퍼하는 모습이 자칫 칠순이 훌쩍 넘은 스승의 몸이나 감정을 너무 상하게 하여 혹여 잘못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래서 스승에게 다가가 제자들이 너무 애통해하시는 듯하여 걱정이 된다고 말하자, 공자가 말한다.


“내가 그렇게 애통하게 정신을 놓고 오열했던가보구나.”


이 대답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아, 왜 공자가 이렇게 말했는지를 설명한다.


슬퍼하고 상심함이 지극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신 것이다.


<논어>가 있었던 일을 묘사하는 소설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금 이런 표현처럼 굳이 공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묘사하듯이 상세히 세부적인 것까지 언급하는 것은 그 언행을 통해 배우는 자들이 무언가를 느끼라고 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하며 그다음 공자의 대답에 주목해본다.


“저 사람〔夫人〕을 위해 애통해하지 않고 누구를 위해 애통해하겠는가.”


오열하다 말고 제자들이 걱정스러워하자 다시 정신을 차린 공자가 눈물을 훔치며 제자들에게 왜 자신이 그랬는지에 대해서 차분히 설명하는 부분이다. 공자의 이 대답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로 의미를 부연한다.


‘夫人(부인)’은 안연(顏淵)을 이른다. 그의 죽음이 애석해할 만하여 곡함에 마땅히 애통해야 하니, 다른 사람에 견줄 바가 아님을 말씀한 것이다.


늘 공자는 형식보다 내용에, 그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본래의 감정을 갈무리하거나 원래의 마음이 그렇지 않은데 그냥 예법이라는 형식에 맞춰 그런 척을 하는 것이 가장 의미 없는 짓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핵심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식 이상으로 아끼던 제자의 죽음에 그저 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열하며 슬퍼하여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혹여 잘못되지나 않을까 제자들이 걱정할 정도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이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을 기억하는 제자가 논어에 남길만한 가르침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안묘(안회의 묘)

수많은 <논어>의 현대 해설서에서 이미 당시 칠순이 넘은 공자가 절제력을 잃었다거나 정말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따위의 잘못된, 혹은 피상적인 해석 따위로 본질을 호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공자는 자신이 배우고 익히고 가르친 그대로 자신의 슬픔을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충실하게 보여주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교과서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내가 지금 설명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했던 호씨(胡寅(호인))는 이 부분에 대해 배우는 자들 중에서도 고급자들은 알아들을 것이라 여겼는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애통하고 애석해함이 지극함에 베푼 것이 옳음에 마땅하셨으니, 이는 모두 성정의 올바름이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아이들의 특권이다. 아이들이 거짓이 없고 솔직하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공자가 가르치는 것은 어린아이의 성정을 그대로 가지고 따라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본연의 성정을 가지고는 있되,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감정에 충실하겠다고 하는 것은 예법을 알고서 본성을 유지하는 것과는 다르다. 즉, 예법을 배우고 익힌 후에도 자신의 감정을 형식적인 것에 치중하지 않고 그 상황에 맞는 감정에 충실하라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다.


이 장에서의 장례에서처럼 가까운 이의 죽음을 슬퍼함에 있어 의례적인 곡을 하며 장례에 참석하는 요식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슬픔을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예라고 본 것이다.


물론 공자의 위의 설명처럼 모든 이의 장례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겠지만, 진정 슬퍼해야만 하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예를 갖춘다는 명분 하에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것 또한 예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이 심해, 몸을 상하게 만들거나 감정이 지나치게 상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슬퍼해야 할 장례에서 그저 대사를 읊듯이 ‘아이고~ 아이고’만 하는 것이나 제사를 지내면서 돌아가신 분에 대한 추모하는 마음을 진정으로 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제사 대행업체에서 나와 형식에 맞춰 음식을 차리고 몇 번을 절하고 어떻게 술을 올리고 하는 따위의 형식에만 신경을 쓰는 것은 진정한 예가 아니라고 공자는 끊임없이 가르쳐왔다.


아이가 그저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공자가 말하는 예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닌 것을 내가 설명할 때 자주 사례로 드는 인물이 바로 피카소이다. 피카소의 추상화를 보면 대부분의 그림에 조예가 없는 일반인들은 어린아이가 낙서를 한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렇지만 미술을 전공한 화가들의 입장에서 그의 그림을 보면, 그것은 단순한 어린아이의 그림이 아닌 어린아이의 그림과 같이 보일 뿐이라는 것으로 그 격을 설명한다.

피카소, <주전자와 사과가 있는 정물>, 1919년.

다시 말해, 피카소는 아주 정밀한 사진 같은 수준의 스케치에서부터 시작하여 화가로서 갖춰야 할 재능과 노력을 정점까지 이르고 난 뒤에 그 어린아이가 그린 것과 같아 보이는 그림으로 천재의 격을 보여주는 것이니, 결코 그 그림이 어린아이들이 그린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아주 기본적인 감정에 있어 그것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아프면 그냥 그 자리에서 울고, 배고프면 배가 고프다고 울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 그 기쁨에 자신도 모르게 덩실덩실 춤사위를 보이며 춤을 춘다. 그것은 인간이 애초에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한편, 어른들에게 어떤 것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고, 또래 집단에서 눈치를 통해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 본성을 바꿔나가게 된다. 그것을 ‘세상에 물들어간다’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고, ‘세상의 때가 묻어 오염되어 가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이도 있다.


공자는 그렇기 때문에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가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는 것의 연장선상에서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를 규정한 것이 예법이다.


하지만, 예법의 본질은 결국 그 상황에 맞는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는 지극히 간단명료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본래의 그 상황이 아닌 여러 복잡한 관계와 정치 역학적인 부분을 가미하여 본질이 되어야 할 그 감정을 갈무리하거나 실제로 그런 마음이나 감정이 아닌 상태에서 그런 ‘척’을 하는 모습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야말로 공자가 경계하고 비판했던 예의가 아닌 행위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대부가 군자가 받아야 할 예를 자신이 권력자라는 이유로 버젓이 행하고 누리는 것에 대해서 공자는 ‘참람되다’라는 표현으로 그들의 예의에서 벗어난 행동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왜 이러한 설명이, 이 장에서 진정으로 슬퍼하는 공자의 모습과 연결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고개를 갸웃하는 학도들이 없기를 바란다.


공자가 그렇게 강조했던 ‘예(禮)’는 결국 그렇게 정치적인 것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자칫 예의나 예법이라는 것을 조선시대 정치적인 이유로 성리학을 곡학아세(曲學阿世)의 도구로 사용했던 썩은 양반이라는 것들의 조작된 정의 때문에 오해하고 오독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제 그 차이를 확실하게 공부하기 시작할 때인 듯하다.


공자는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비질을 깨끗이 하고 웃어른을 제대로 맞이하는 아주 사소한 ‘쇄소응대(灑掃應對)’에서 시작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제까지 <논어>를 공부하면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공자는 예법을 강조하면서 정작 그 안에서 갖춰야 할 상황에 맞는 진정성을 빼먹고 형식이나 포장에만 신경 쓰고 정작 그 본질을 망각하고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결국 사회질서를 흔드는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예법을 배우지 못해 잘 알지 못하는 이가 예법을 어기는 것보다 예법을 배웠답시고 잘 모르는 백성들을 이끌어야만 할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사욕(私慾)을 위해서 적당히 그것을 어기고 자신들의 구미(口味)에 맞게 재단하는 것을 참람된 것으로 훨씬 더 안 좋은 것이라고 보고 비판했던 것이었다.




뽑는 자들은 전혀 관심이 없지만, 뽑히고 싶은 자들만 관심이 철철 넘치던 지방선거가 끝이 났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결국 대선 끝에 이어진 선거는 두 당간의 싸움으로 뒤엉킨 개싸움이 되어버려 어떤 정책을 마련했는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내용을 가진 정책 선거가 아닌, ‘이전에 믿고 맡겨줬더니 개판 쳐버렸지 않은가? 그러니 이제는 다른 놈으로 갈아보자!’로 온통 오물통을 뒤집어쓰는 개싸움으로 되어 버렸다.


아무리 동상이몽이라 하지만, 선거에 한 번도 뽑혀본 적이 없는 새파란 빨간당의 대표는 자신들을 믿고 국민들이 맡겨준 거라는 아무 말 대잔치로 지방선거의 결과를 자평했다. 어이가 없다. 그야말로, ‘저 놈이 더 미워 이 놈을 뽑아준다’는 어부지리(漁父之利)로 대권을 잡더니, 지방선거에서 당연한 결과를 얻은 것을 가지고 자신들의 세계가 왔다고 착각한다.


같은 침대를 쓰는 분이 몇 년 전엔가 한국어를 한국사람만큼이나 잘하며 한국을 이해하는 한 미국인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면서 이번 선거의 결과를 그 친구의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평가로 대신해주었다.

“대한민국은 세계 10위에 해당하는 경제대국인데, 정치나 외교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 수준은 그보다 훨씬 더 못한 것 같아요.”


그 미국인 친구가 워낙 영민한 친구라 방송에도 자주 얼굴을 내밀며 한국에 대해 쓴소리를 하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이 말만큼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들의 인식 수준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꼬집는 말은 없었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먹고살만하다고 다 똑같은 수준의 사람이 아니다.’라는 촌철살인을 아주 완곡하게 설명한 말에 다름 아니다. 지금의 그 어느 누구도 반박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일 것이다.


공자가 왜 천하를 주유한 끝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제자들을 양성하고 책을 저술하는 것에 남은 여생을 쏟아부었는지에 대해 해석은 다양하다.


말 그대로 이것저것 직접 해보려고 하다가 포기했다는 해석도 있고, 결국 자신 혼자서 발탁되어 한 나라를 통해 세상을 경영하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천하를 주유하고 대중들을 만나면서 결국 그들을 움직이는 것이 교육밖에 없다고 여겨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들과 위정자를 바꿀 수 있는 다양한 제자들을 양성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에 그렇게 했다는 해석도 있다.


어느 해석이 맞는지에 대해서 지금 공자에게 물어보고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만년에 공자는 교육과 저술을 정리하는 것에 온 힘을 쏟은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위에서 대한민국을 분석한 젊은 미국인 친구의 말과 맞춰보자면,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광화문에 나와 성조기를 흔들고 경례를 붙인 법비출신의 정치꾼을 선거를 통해 무대에서 내려놓고는 다시 그 근처를 얼쩡거리는 자를 도지사라고 뽑아준 민중들을 그저 개돼지라서 그렇다고 비난만 하는 것은 배운 자가 할 도리가 아니라 생각한다.


먼저 당신이 제대로 배우고 익혀 주변의 그렇지 못한 이들을 일깨워 함께 변화시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 이 사회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거기서 거기인 놈들 반대편으로 찍어준다고 당신의 삶이, 우리 사회가 정말로 바뀌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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