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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07. 2022

백날 배워봐야 실천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배우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顔淵死, 門人欲厚葬之, 子曰: “不可.” 門人厚葬之, 子曰: “回也視予猶父也, 予不得視猶子也. 非我也, 夫二三子也.”
顔淵이 죽자 門人들이 후히 장사 지내려 하니, 孔子께서 “옳지 않다.” 하셨다. 門人들이 후장하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顔回는 나 보기를 아버지처럼 여겼는데, 나는 〈그를〉 자식처럼 보지 못했으니, 내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저들이 한 것이다.”

드디어 이 장은 안연의 죽음과 관련된 마지막 내용을 담고 있는 장이다. 앞서 슬픔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제 다시 냉정한 이성으로 돌아와 그의 장례를 후하고 성대하게 치르고자 하는 제자들의 행동에 대해서 공자가 그것이 옳지 않으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제지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장에서 주요하게 봐야 할 것은 왜 굳이 성대한 장례를 치르는 것에 대해 옳지 않다고 공자가 만류하였는가에 대한 행간의 의미이다.


앞서 안연의 아버지가 찾아와 관을 덮는 뚜껑을 하도록 수레를 팔아 마련해달라고 했을 때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말한 것과 맥락은 같지만 또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묘하게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부분이 나와 다각적인 의미에서 공자가 의미하는 진정한 예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드는 가르침이 담긴 장이기도 하다.


먼저 주자의 주석을 통해 주자는 과연 공자의 의미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초상에 쓰는 도구는 가산의 있고 없음에 맞추어야 하니, 가난하면서 후히 장사 지냄은 이치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만류하신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 집안의 재정상태가 넉넉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형편이 그렇게 넉넉한 상황이 아니었음을 먼저 주자는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할 여지가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도 넉넉하게 돈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돈이 있다고 해서 후하게 장례를 치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점을 주자는 일단 주석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배우는 자들이 유추하여 생각할 수 있게 툭 던지듯 아주 짧은 주석을 바로 다음에 이어서 배치하는 의미심장한 공자식 논법을 전개한다.


안로(顔路)가 들어준 듯하다.


안연의 장례는 가족장이 아니었다. 이미 안연의 위치는 공자학당의 대표적인 인물로 대내외적으로 알려진 상태였다. 즉, 이 장례는 가족장의 형태가 아닌 공문(孔門)의 단체 조직 장례의 형태로 준비되었음을 의미하는 설명이다.


그런데 그것을 설명하며 후한 장례에 대해서 인가(認可)해준 자가 안로(顔路)라고 주석을 달았다. 당시 현장에 주자가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런 듯하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미 앞서 공자에게 수레를 팔아서라도 후하게 장례 해주면 안 되냐고 요청했던 것이 비례(非禮;예가 아님) 임을 공부한 이들이라면 바로 눈치를 채게 주석을 단 것이다.


아비 된 입장에서 스승 공자에게 공식적으로 요청하였으나 그렇게 허가를 받지 못하였음에도 다시 여러 제자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은 안로(顔路)가 주도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방식에 다름 아니다. 공자 독해 전문가인 주자다운 주석 달기라 하겠다.


스승이 이미 ‘옳지 않다’라고까지 했는데, 그것을 강행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미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공자가 어떻게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는가가 이 장의 핵심이다. 당연히 공자는 바로 일갈하며 꾸짖음을 내리지 않는다.

‘안회는 자신을 아버지처럼 대했는데 자신은 자식처럼 대하지 못했다.’는 문구를 제대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안회가 자신을 아버지처럼 대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에 따라 자신이 왜 안회를 자식처럼 대하지 못했다고 한탄하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원문을 주시할 필요가 있는데, 원문에 보면 공자의 한탄하는 말을 표현하면서 원문에서 어조사 ‘也(야)’를 다섯 번이나 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을 가지고 무슨 현장감 있는 공자의 말투라고 해석하는 어설픈 시도를 하는 이도 있긴 한데, 여기서 어조사 ‘也(야)’는 현장감 있는 말투를 재생하고자 함이 아니라 공자의 감정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기법으로 들어간 것이다.


고문에서 어조사 ‘也(야)’만큼 다양한 용법을 가진 글자가 없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어조사가 갖는 기능은 강조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한 문장을 쓰면서 무려 다섯 번이나 이 용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단순한 강조만으로는 볼 수 없겠으나 공자가 이 말에 담고자 하는 감정이 고조되었음은 그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지막 문장에서는 그렇게 된 이유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현대어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내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니들이 다 그런 거다.’라고 말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차원을 넘어 나는 그 뜻에 확고하게 반대했음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적 수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자아, 다시 원래의 의문으로 돌아와 보자. 그래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짓을 제자들이 제멋대로 한 것에 대해서 한탄한 것은 알겠는데, 애제자 안회가 자신을 아버지처럼 대해주었다는 것은 과연 어떤 점에서 그렇다는 것인가? 그것이 왜 장례를 후하게 치르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 의문의 실마리를 주자의 마지막 주석에서 얻을 수 있다.


鯉(리)를 장사 지낼 적에 마땅함을 얻었던 것처럼 하지 못함을 탄식하여 문인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앞서 안회의 아버지 안로가 수레를 팔아서라도 관을 장식하는 뚜껑을 별도로 사달라고 했을 때 등장했던 공자의 친아들 백어(伯魚)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주자는 정작 자신의 자식인 백어가 죽었을 때 장례를 소박하게 치렀다는 고증을 통해 우리가 가진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버지와 아들 간에는 친밀하고 격의 없음이 있는 것이다. 친 자식이 아닌 제자가 스승을 정말로 아버지처럼 대했다는 것은 격의 없이 대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스승으로만 대한다면 어디까지나 남이면서도 격식을 갖춰 존숭 해야 한다는 관계가 사제지간이기 때문이다.


편하게 농담을 하거나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기저귀 차고 기어 다니는 모든 모습을 보았을 아버지에게 감출 것이 없어 격의 없이 대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안연은 스승 공자에게 그렇게 대했다.


그래서 공자는 그 첫 문장에서 어조자 야를 썼고, 사실 하나하나에 한탄을 꾹꾹 담아 그들의 귀에, 그리고 양심에, 그리고 알아듣지 못하는 그 지적 수준에 못을 박듯이 말해주려고 했던 것이다. 자신을 정말로 아버지처럼 여겨 격의 없이 대해준 제자 안연에게 그의 죽음을 진정한 친자식처럼 장례 지내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해 버린 제자들에 대한 원망이 잔뜩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의문이 생긴다. 근검절약을 하라는 의도도 아닌데, 굳이 장례를 후하게 치르는 것이 공자가 말하는 예법에 어긋나는 전례(前例)라고 있었단 말인가? 왜 공자는 ‘옳지 않다’라는 단정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장례를 후하게 치르지 말라고 했단 말인가?


있다, 그런 전례(前例). <예기(禮記)>에 보면 ‘死不厚其子(자식이 일찍 죽으면 삼가 정성스레 대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즉,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을 경우 장례를 후하게 치르지 말라는 규정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조금 어려운 전문용어로 ‘참척(慘慽)’이라고 하는데, 손아래의 자식이나 손주가 윗어른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일컫는 말이 있다. 현대에도 그 단어를 하는 사람은 적어도, ‘부모보다 세상을 먼저 떠나는 자식은 그것 자체로 불효이다’라는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신 분의 장례를 ‘호상(好喪)’이라 부르는 것과 별도로 부모보다 먼저 요절한 자식의 장례를 ‘악상(惡喪)’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는데 좋은 장례가 어디 있고, 나쁜 장례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먼저 죽어 자식의 장례를 부모가 치르는 것만큼 슬프고 애달픈 일은 없기에 부르게 된 이름이다.


다시 말해, 부모보다 먼저 간 자식에게는 그것만한 불효가 없다는 의미를 새기기 위해 지극히 슬퍼하는 것을 자제하라 일렀고, 특히 외형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점을 인식시키기 위해, 아예 후한 장례를 금하였던 것이다. 공자가 단정적으로 ‘옳지 않다’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전례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제자들이라는 것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고야 만다. 주자의 주석대로 당장 자식을 떠나보낸 안로가 스승에게 직접 수레를 팔아서라도 그렇게 해달라고 대놓고 요구했다는 점에서 얼마나 그들이 스승의 큰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했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대놓고 질책하지 못한 공자는 더 큰 질책을 이 장의 마지막 말로 대신하고 있는데 정작 그것을 알아들은 자들이 당대에는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의문이 든다. 정말로 그들이 스승의 말귀를 못 알아들었을까?


최근 1년간 내가 브런치에서 매일같이 글을 쓰고 읽으며, 보고 듣고 느낀 점이 수천 년 전에 스승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수레를 팔라고 되려 큰소리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후하게 장례를 치른 안로의 모습이 환생을 거듭한 듯 떠올라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내가 논어를 연재하면서 만나온, 얼굴 한번 본 적 없고 전화통화 한번 한 적 없이 글로만 교류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1년이 되는 시간 동안 발검 스쿨의 학도로 꾸준히 공부해온 사람은 이전 반장을 비롯하여 단 한 명도 없다.

물론 글의 수준이 별로이고 글쓴이의 수준이 따를만한 스승이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자기반성부터 해야 옳긴 하겠다. 직독직해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못할 어려운 한자에, 재미도 없고, 매번 양심을 후벼 파는 소리만 하여 읽는 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마음이 불편해지는 글을 누가 그렇게 즐기며 읽고 싶겠는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들이 자신의 정신을 맑게 한다고, 아침마다 논어를 읽으며 공자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것으로 자신을 다져간다고 댓글을 달았던 이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들이 최소한 이렇게 쉽게 풀어주는 내용마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논어>가 아니라, 겉멋이 잔뜩 들어간 서평이나 영화 이야기를 흉내 내는 아마추어 글쓴이들이 쓴 글에 저마다 단 댓글들을 보면 그렇게 의식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맞장구를 치며, 사회의 잘못된 부분은 반드시 고쳐져야만 하고 그것을 해나가는 것은 결국 깨어있는 국민이자 브런치 작가라고 서로 ‘작가님’이라고 부르며 작가 놀이하는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며 멋들어지게 글을 쓰고, 어린 자식들을 사진과 글 소재로 쓰면서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거들먹거리며 글인지 메모인지를 남기기까지 한 이들이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아주 작은 캠페인을 통해 직접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자고 궐기대회를 연다고 하자, 그들이 조금도 참지 못하고 가면을 날름 내던지고 그들의 민낯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내 글을 읽고 함께 댓글 달았던 사실만을 지우고 싶어 하는 듯 구독을 취소하고 혹여 증거가 남을까 싶었는지 차단까지 해가며 멀찍이 도망가서 자신의 몸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풀섶에 머리를 들이박고 자신의 눈을 질끈 감고 작가 놀이하는 자신들끼리 최근 유행하는 드라마 이야기나 하면서 또 그렇게 아무런 일이 없듯이 지내고 있었다.


공자에게 직접 배웠다고 하던 자들마저도 자신들이 보여지는 세력을 감안하여 뽐내고 싶고, 자기 자식의 장례를 후하게 하고 싶다는 사욕(私慾)을 먼저 내보였다.

군정권에 반대하여 젊은 혈기에 데모로 항거하던 이들이 정치권에 들어서 자기 권력을 이용하여 자식의 스펙을 포장하는 데 쓰면서 관례라고 이야기하며 자기만 때리지 말라고 당당히 말하는 현실이 어찌 브런치에서 말로만 정의와 상식을 떠벌이며 정작 실천하자는 말에 꼬리를 내빼는 자들과 다르다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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