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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08. 2022

잘 뛰고 싶다면 먼저 걷기를 끝내고 오거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기 마련이라는 진리를 모르는 자에게.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季路가 鬼神 섬김을 묻자, 孔子께서 “산 사람을 잘 섬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鬼神을 섬기겠는가.” 하셨다. “감히 죽음을 묻습니다.” 하자, 孔子께서 “삶을 모른다면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 하셨다.

<논어>의 내용이 모두 시간의 흐름에 맞춘 공자의 연대기적 기술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이 장은 안연의 죽음에 관한 긴 에피소스들 뒤에 바로 이어져 나왔기 때문에 그와 연관하여 해석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은 장이다.


계로(季路), 즉, 제자들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았고(공자와 나이 차이가 적었던) 다혈질에 단순무식으로 유명한 바로 그 子路(자로)가 스승 공자에게 큰 맘먹고 칭찬받을 것이라 여겼던 질문을 던졌는데 오히려 큰 질책을 완곡하게 듣는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고증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대화가 이루어진 상황은 실제로 안연(顏淵)의 장례를 치르고 난 직후의 일은 아니다. 공자가 제자들을 이끌며 천하를 한참 주유하던 시기에 해당하는 애공(哀公) 4년(공자의 나이 61세 즈음)의 일로, 송(宋) 나라에서 환퇴(桓魋)의 난(술이(述而) 편 22장 참조)을 겪은 뒤 진(陳) 나라에 머물 때의 일로 추정하고 있다. 공자와 9살 차이가 나니 당시 자로(子路)의 나이도 이미 지천명인 50을 훌쩍 넘어선 나이였기에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를 할만한 나이라고도 볼 수 없었다.

굳이 내가 고증학자들의 의견을 통해 이 이야기가 안연의 죽음 이전의 이야기라는 것을 밝히는 이유는, 실제로는 안연의 죽음에 바로 이어 나온 질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논어>를 편집한 제자들이 왜 안연의 죽음에 대한 긴 에피소드 이후에 바로 이 이야기를 이어 붙였는가에 대한 행간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이 장을 이해하는데 아주 주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제자가 스승에게 뭔가를 물을 때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으나 <논어>를 통해 자로가 스승 공자에게 질문을 하는 경우는, 자신의 깨달음이나 자신의 학문 성취도에 대해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이 커 그것을 스승을 통해 허여 받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다양한 질문의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장에서도 그 맥락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로(子路)의 짧은 생각에는 늘 예법을 강조하고 특히 제사에 대해 좀 더 심도 있게 실천하고 싶다는 이 질문이 스승에게 인정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질문을 했을 것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당신이 <논어>의 다양한 자로(子路) 관련 고사를 통해 그를 파악할 정도였을텐데 곁에 두고 매일같이 보고 가르쳐왔던 공자가 그러한 제자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단 한 번도 쉽게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공자는 그런 제자의 특성을 알았기에 그 기회를 활용하여 매번 그에게 조금은 자극적인 방식으로 일깨움을 주는 완곡하지만 정신이 번쩍 드는 죽비를 꺼내 든다.


공자는 바로 “사람을 섬길 줄 모르고서야 어찌 귀신을 섬길 줄 알겠느냐?”라고 말하여, 질문의 방향을 확 돌려 버린다. 공자가 예상했던 것처럼 자로가 스승의 완곡하지만 따끔한 죽비에 따끔하게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면 이런 질문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로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기는커녕 앞선 질문을 바로 만회하기라도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조금 더 진일보한 방식의 질문을 바로 던진다.


바로 죽음에 대해 물은 것이다. 이 부분이 <논어>를 편집하는 제자들로 하여금 이 장의 대화가 안연의 죽음과 장례에 이어 바로 편집점을 찾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공자가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과 제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 해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귀신을 섬김을 물음은 제사를 받드는 바의 뜻을 찾은 것이요, 죽음은 사람에게 반드시 있는 것으로 알지 않으면 안 되니, 이는 모두 절실한 질문이다. 그러나 정성과 공경이 산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자가 아니면 반드시 귀신을 섬기지 못할 것이요, 시초를 근원 하여 生(생, 사는 것)을 알지 못하면 반드시 종을 돌이켜 죽음을 알지 못한다. 幽(유, 저승)와 明(명, 이승), 생과 사는 애당초 두 이치가 없으나 다만 배움에는 순서가 있어서 등급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이와 같이 말씀해 주신 것이다.


주자는 이 장의 핵심을 ‘엽등(躐等)을 경계하는 방식으로 순서를 강조하는 가르침’이라고 보았다. ‘엽등(躐等)’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공자의 원시 유학에서 워낙 강조하고 있는 가르침이라 몇 번이나 언급하고 설명했음에도 아직도 모르는 이들이 있다면 앞에서의 공부를 대강 흘려들은 것이니 반드시 사전을 다시 찾아보고 그 의미를 새길 필요가 있겠다.

주자는 주석을 통해 자로의 질문이 맥점은 제대로 찾은 것이라고 칭찬한다. 하지만 공자의 대답에서 느껴지는 의중을 풀이한 것과 같이 그 질문의 훌륭함과는 별개로 자로(子路)가 과연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물었는가에 대해서 공자는 다시 되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라고 알려주고 있다.


다시 말해, 그 주요하고 의미 깊은 철학적인 질문을 하기에 앞서 자로(子路)가 엽등(躐等), 즉 순서를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밟지 않고 한꺼번에 뛰어오르려는 참람함을 보였음을 넌지시 꼬집은 것이다.


이차방정식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한들, 일차방정식을 공부하지 않은 자가 이차방정식이 중요하니 그것에 대한 요점을 일깨워달라고 하는 질문을 한다면, 스승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가서 일차방정식을 제대로 다 배우고 난 뒤에 와서 그 질문을 하라고 호통을 칠 것이다. 지금 이 대화의 의미가 바로 그러한 상황에 다름 아니다.


어설픈 학식으로 <논어>를 풀이하겠다는 적지 않은 현대 해설서에서 이 장의 내용을 풀이하며 공자가 귀신의 존재를 부인하며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기라는 의미로 한 말이라는 둥 뜬금없는 헛소리로 종이를 낭비하는 소리를 하는 자들이 있다.


잘못짚어도 한참을 잘못짚은 해석이다. 이 장의 가르침에서 공자가 설명한 내용은 죽은 자보다 살아있는 자에 대해서 더 집중하라는 말 따위가 결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 공부했던 ‘팔일(八佾) 편’ 12장이나 ‘옹야(雍也) 편’ 22장 및 ‘술이(述而) 편’ 21장에서 보이는 내용을 바탕으로 귀신을 섬기는 일, ‘제사’란 결국 살아있던 분들이 돌아가셨어도 살아있는 듯 모시는 것과 같다는 의미의 연장이고 그 외연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그분이 살아계실 때 제대로 하는 것이 그분이 돌아가셨어도 그대로 살아계신 듯 치르는 것이 예의 기본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


살아계셨을 때 그분을 섬기듯이 귀신을 섬기면 된다는 의미에 대해 어차피 위에 열거한 앞의 공부를 당신이 찾아보는 수고를 하지 않고 넘어갈 것이 뻔하니 ‘팔일(八佾) 편’ 12장의 내용을 다시 상기시켜주도록 한다.


“祭如在, 祭神如神在(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마치 조상이 앞에 앉아 계시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하고, 여러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마치 여러 신령들이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경건하게 하셨다)”


바로 이 내용과 이 장의 가르침은 맞닿아 있다.

공자는, 살아계실 적에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지 않은 자들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난 뒤에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모시는 것이 예가 아님을 꼬집어 당시의 풍토를 꼬집는다.


동시에,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계실 때에는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서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 부분을 후회하며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제사에 공경을 다하는 모습은 제대로 된 예의 근본이 아니라고 가르쳐준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법에 대한 마음가짐과 실천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이 장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정자(伊川(이천))는 이 장의 가르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낮과 밤은 死(사)와 生(생)의 道(도)이다. 生(생)의 도를 알면 死(사)의 도를 알고, 사람 섬기는 도리를 다하면 귀신 섬기는 도리를 다할 것이니, 死(사)와 生(생), 人(인)과 鬼(귀)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夫子(부자)께서 자로에게 말씀해 주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깊이 일러주신 것임을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내가 잘못된 현대 해설서의 자칭 전문가라고 설치는 이들에게 철퇴를 가하듯 정자역시 당대의 어설픈 학자들이 이 장을 읽고 ‘공자가 자로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라고 오독한 것을 따끔하게 때려주며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자들에게 죽비를 후려친다.


자로(子路)가 스승 공자를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스승 공자는 제자 자로(子路)에 대해서 잘 알고 파악하고 분석을 이미 끝낸 상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진중한 가르침은 없었을 것이다.


얼핏 공부가 얕은 자들이 보기에는 어설픈 질문을 하는 나이도 많고 우직하며 아둔한 제자를 튕겨내고 핀잔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공자가 자로에게 가르쳐주는 방식은 그야말로 자로에게 가장 확실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라고 공자는 선별하여 내놓은 것이다.

물론, 자로가 계속해서 비슷한 질문을 하며 의문을 갖는 모습을 보면 단번에 깨달음을 얻거나 학문에 있어 성취를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공자의 가르침은 본래 그 자리에서 무슨 돈오(頓悟)를 얻듯이 확 오는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머리와 가슴에 담아두고 곱씹다가 그 상황이나 그 가르침이 어느 한순간 다른 가르침이나 계기를 통해 찌릿하고 번개처럼 한꺼번에 이어져 나와, ‘그때의 그 가르침이 나를 위한 맞춤 지도였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성현의 고문을 공부함에 있어 꾸준히 계속해서 그것을 반복했던 것은 다 그 깨달음을 터득하고자 함이었던 노력의 일환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즘은 워낙 약장수 같은 자들이 많아서 하지 않지만 한때 글쓰기 특강이나 어려운 책 읽기 특강을 하게 되면 단골 질문으로 나오는 것들이 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나요?’라던가 ‘어떻게 하면 어려운 고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나요?’ 등의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1년을 채운 이 시점에서 글을 잘 쓰고 싶어서 동네 도서관의 강좌를 꾸준히 나간다거나 글쓰기 모임을 한다고 하는 이들의 일기를 읽곤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글이 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한발 나아간 실천이니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게는 이름에서부터 생소하지 그지없는 ‘미라클 모닝’이라는 이름으로 필사가 유행인 시기도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이 읽은 글을 다시 직접 쓰면서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니 나쁘다고 할 것은 없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의 작은 행동이나 실천들이 나쁜 것은 아님에도 내가 그들의 일기를 보면서 마뜩치않아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앞서 특강을 하면서 단골 질문을 받으면 늘 내가 했던 대답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이 아닌, 반문이었다.


“당신은 하루에 몇 권의 책을 읽습니까?”

질문을 한 이들은 당혹스러워했다. 하루에 몇 장도 아니고 몇권이라구요?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고 질문하고 대단한 질문을 한 것처럼 자로(子路)가 지었음직한 뿌듯한 표정을 짓는 어리숙한 이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하루에 A4 몇 장이나 글을 씁니까?”


모두가 당혹스러워했다. 물론 이해도 하지 못하는 책을 읽는답시고 그저 페이지만 넘기고 읽었다고 하는 것이나 일기 수준의 낙서나 다른 사람의 험담 등으로 원고지를 채운 글쓰기를 수없이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행간에 녹아있어야 할 지적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들은 그 반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질문을 하기 전에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고 나서 그저 질문을 위한 질문을 하는 자는 발전할 수 없다. 아니, 발전할 리가 없다.

하루는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이루어지기 마련이고, 그 하루들이 쌓여 세월이 되고 내공이 되며 그 사람을 이루게 된다. 당신이 이루고자 하고 있는 것을 위해 당신은 지금의 시간과 노력을 얼마나 투자하고 있길래 건방지게 그따위 질문을 가벼이 던질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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