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Jun 14. 2022

지나치지 않은지 부족하지 않은지를 아는 것이 중용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진정한 의미

子貢問: “師與商也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
子貢이 “師(子張)와 商(子夏)이 누가 낫습니까?” 하고 묻자, 孔子께서 “師는 지나치고 商은 미치지 못한다.”하셨다. (子貢이) 물었다. “그러면 師가 낫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이 장은 그 유명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나온 내용을 담고 있는 장이다. 자공이 다른 두 제자 자장과 자하를 비교하여 둘 중 누구의 재능이 더 뛰어난가에 대해 묻자, 그 두 제자의 특징을 한 가지 기준으로 비교하여 한쪽은 그 기준을 넘쳤고, 다른 한쪽은 그 기준에 부족하였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것이다.


그런데 수에 밝은 실리적인 것으로 유명한 자공이 그 애매모호하면서도 한 차원 높은 스승의 답변에 쉽게 수긍하지 못하고 구체적으로 묻는다.


지나쳤다는 것은 단계로 보면 일정 기준을 통과한 것이고 미치지 못했다는 것은 어쨌거나 그 단계에 오르지 못한 것이지 그 단계를 넘어선 것이 더 좋으냐고 구체적으로 질문을 빙자하여 자신의 이해가 맞는지 대답을 구한 것이다.


그러자 공자가 그 유명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용어로 넘쳐흐른 것이나 미치지 못한 것이다 똑같이 성취에 이르지 못한 것이라고 정리해준다.


간혹 이 장의 진의를 제대로 공부하여 알지 못하는 이들이 고사성어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사용할 때 지나친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장에서도 그렇지만 본래의 의미가 지나친 것도 안 좋고, 부족한 것도 좋지 않은 것이 똑같다는 것이지, 어느 하나에 비중을 둔 것이 아니다.


주자는 먼저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두 제자에 대한 좀 더 세부적인 평가내용을 다음과 같이 주석에 담아 해설하고 있다.


자장(子張)은 재주가 높고 뜻이 넓어 구차히 어려운 일을 하기 좋아했으므로 항상 중도에 지나쳤고, 자하(子夏)는 독실히 믿고 삼가 지켜 규모가 협소했으므로 항상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어 ‘과유불급(過猶不及)’에 대한 주석을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도는 중용을 지극함으로 삼으니, 賢者(현자)와 知者(지자)의 지나침이 비록 愚者(우자)와 불초한 자의 미치지 못함보다 나을 것 같으나 그 중도를 잃음은 똑같은 것이다.


이 주석이 사실, 이 장의 숨겨진 공자의 첫 번째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이 장에서 그저 슬쩍 지나갔던 자공의 질문은 어찌 보면 일반인 중에서도 제법 머리가 좀 돈다고 하는 사람의 수준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은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파악하는 수준이 되어야 일단 이 장의 절반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내가 설명한 바와 같이, 자공은 계산에 빠른 실리적인 인물로 뛰어난 장사꾼 출신의 인재였다. 그 기본적인 성향은 공자의 문하에 들어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일단 그는 공자 학당의 살림살이를 총괄했던 인물로 재정을 책임지고 총괄했던 총무에 해당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판단을 스승에게 확인받기 위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특유의 질문 방식을 구사한다.


이 장에서의 질문 방식도 자공이 즐겨했던 방식으로 스승과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다른 동문들을 비교하여 스승의 평가를 묻고 자신의 평가를 질문의 방식으로 녹여 자신이 제대로 분석하고 파악하였는지 그 정도를 스승에게 평가받는 아주 복합 다단한, 하지만 지극히 논리적인 방식을 구사한다.


그런데, 공자가 그런 자공의 특징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자공의 질문이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소양을 파악해내고 분석하는 것에는 한참 멀었다는 것을 이 대답으로 대신한 것이다. 사실 자공 정도의 질문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지나쳤다는 것은 적당하지는 못하지만, 일정량은 채워 넘긴 것이기에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자공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질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정 함량을 채우지 못한 미달보다야 일단 남으면 그 남는 것을 버리면 되지 않는가 하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승은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아직도 자공이 멀었다고 지적하고 일깨워준 것이다. 공자가 어떤 부분에서 그것이 정량적인 해석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려 했는지 윤 씨(尹焞(윤돈))가 다음과 같은 해설을 통해 정리해준다.


“중용의 덕 됨이 지극하다.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이 똑같으니, 〈처음에〉 털끝만큼 잘못되면 〈종말에는〉 천 리나 어긋나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의 가르침은 지나침을 억제하고 미치지 못함을 이끌어서 중도에 돌아가게 할 뿐이다.”


정리라고 했지만, 이 주석에서 초심자나 중급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는 이것이 ‘중용(中庸)을 강조한 가르침’이라는 것 정도일 것이다.


사실 이 의미를 파악하는 더 중요한 키 역할을 하는 실마리는 그다음에 나온 비유이다. 처음에 털끝만큼 잘못했다고 여겨지지만 그 오차와 착오가 나중에는 엄청나게 커져 천 리나 어긋나는 결과물로 나와버린다는 지적이다. 왜 뜬금없이 이런 말이 나왔는지 잘 모르겠으면 거기까지가 중급자 수준이다.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하나 그 의미가 결국 지나친 것이 갖는 단점이 모자란 것이 갖는 단점만큼이나 치명적이라는 의미인 것임을 짐작할 수 있으면 그것이 고급자 수준이다.


왜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하는데 고급자 수준이라고 하느냐고 되묻는 어리석은 학도가 있지 않기를 바란다. 고급자는 상급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초급과 중급의 상대적인 개념일 뿐 아직도 제대로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배우는 입장이기는 똑같다.

자공의 의문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왜 이미 정량을 채우고 넘쳤는데, 지나친 것이 부족한 자와 똑같다고 하는 것일까? 그가 가장 먼저 떠올렸을 재물을 비유해보자.


천만금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천 만금을 가지고 있는 자와 9백 만금을 가지고 있는 자를 떠올려보면 당연히 이천 만금을 가진 자는 본래의 목적치에 두 배를 가지고 있으니 9백 만금을 가지고 있는 자보다 훨씬 더 부자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도를 수양하는 자질에 대한 부분은 정량적인 것만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나는 자공의 눈높이에 맞춰 재물에 대한 비유로 공자의 설명을 적용해주려고 한다.


자아, 잘 생각해보라. 재물을 많이 얻는 것은 그저 재물을 얻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특히 아주 큰 재물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는 것을 재물을 모아본, 혹은 실패했던 사람들은 다들 잘 알고 있다. 재물을 모으고자 하는 마음이 무엇이던가?


맞다. 그것이 바로 욕심이다. 욕심은 철학적인 용어로 검토해보건대 나쁜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잘하고 싶은 마음,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 그것이 욕심이 갖는 본래의 의미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 ‘욕심’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앞에 ‘지나친’이라는 말이 붙으면서부터였다. 욕심은 한도 끝도 없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능력이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것을 바라는 마음이 한도 끝도 없어지면 문제가 생긴다. 실제로 그것을 해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갖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이제 사악함이라는 정말로 나쁜 마음을 먹게 된다. 정당한 노력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것을 정당하게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노력보다 더 많은 것을, 혹은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쉽게 그것을 얻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이 어렵게 얻어낸 것을 범죄를 통해 빼앗거나 훔치는 결과를 만들고 만다. 이 과정은 인류의 타락 과정과 욕심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전성되게 된 과정을 보여준다.


자공은 이미 재물을 어떻게 모으는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에 ‘아!’ 하며 자신의 삶에 녹아있던 경험과 자신의 특징을 간파한 스승이 왜 그 네 글자의 단어로 ‘지나친 것과 부족한 것이 다를 바 없다’고 설명했는지를 알아들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추정하는 것은 자공을 대단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공에게 맞춤으로 설명해준 공자의 안목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천 만금을 얻기 위해 그가 치렀을 대가는 당연히 900 만금을 모으느라 치렀을 대가보다 컸을 것이다. 세상에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말인즉은 900 만금밖에 모으지 못한 사람이 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적당하는 것만큼이나 이천 만금을 얻는데 그가 포기했을 것들이 더 많았다는 것은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에서 두 번째로 놓치기 쉽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공자의 가르침은 두 제자의 구체적인 비교에 있다. 자공이 비교를 대상으로 삼았지만, 실제 공자와 자공이 모두 알고 있는 자장과 자하의 특징에 대해서 당신은 정작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이 행간을 통해 깨달음을 주고받은 것에 대해 당신은 전혀 공감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이 장에서 놓쳐버리기 쉬운 함정이 숨어있다.


간략하게 정리해주자면 공자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어야 이해가 쉽다.


“자장(子張)은 행위가 이미 과당(過當)한데도 멈추지 않고, 자하(子夏)는 미치지 못하는데도 멈춘다.”


아주 약간의 설명을 넣었을 뿐인데, 위의 본문과는 확연히 내용이 달라졌다. 스승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에도 제자마다 다른 이해도와 다른 실천 방식을 보이기 마련이다.

자장(子張)

그런데 자장(子張)의 경우는 그만해야 할 곳에서 계속 멈추지 않고 그것을 지속한다. 그렇게 되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음식을 지나치게 급하게 많이 먹어대기 시작하면 당연히 배탈이 나기 마련이다. 게다가 자신이 배가 부른 것조차 알지 못하고 그저 계속 음식을 입안에 욱여넣기 시작하면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섭생이 아닌 고문이 되고 만다.


자하(子夏)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배가 고픈데도 아주 적은 양만을 입안에 넣어 자신이 배가 부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거기서 음식 먹기를 멈춘다면 몸은 계속해서 음식이 부족하다는 신호를 보낼 것이고 그것은 영양의 불균형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자하(子夏)

왜 내가 갑자기 먹는 것으로 비유했는지 눈치챈 학도가 한 명이라도 있기를 바란다. 이 장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지나치게 먹는 것이나 자기 양을 채우지도 못하고 그저 젓가락을 놓는 것이 똑같다고 말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이 장에서 공자가 자공의 질문을 통해 자공의 의도를 받아주며 설명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일깨워주려는 메시지는 바로 그 도의 적당함이라는 중용을 ‘어떻게 알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도달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야기가 조금 어려워졌는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위에 먹는 것을 예로 든 것이다. 자신의 몸이 가장 최적으로 필요한 양이 얼마인지를 파악하지 못한 자는 결국 더 먹을 수밖에 없고, 덜 먹을 수밖에 없다는 태생적인 문제점을 제시한 것이다.


스승 공자의 눈에는 자장(子張)이 이미 멈췄어야 할 행동을 어디서 멈춰야 할지 모르고 더 나아가 수양이 덜 된 것이 보였던 것이고, 자하(子夏)가 아직 더 나아가야 하는데 지레 겁을 먹고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인다는 빌미로 과감하게 더 나아가지 못하여 발전하지 못한 것이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수양하여 실천해야 하는 자신만의 기준이 될 도(道)라는 것이 절댓값이 아닌 자신의 깜냥에 맞춰진 것이기 때문에 스승이 매번 그 보이지 않는 미묘한 중용을 말로 가르쳐 줄 수도 그렇다고 자신의 기준을 보여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무조건 잠을 자지 않겠다고 지나친 카페인이나 약물이 의존하게 되면 도리어 집중력이 떨어지고 몸과 정신이 망가져버려 최상의 컨디션은 고사하고 후유증으로 회복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결국 자신이 몇 시간을 잤을 때,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지는 끊임없는 자신에 대한 관찰과 시도, 시행착오를 통해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배우는 이유이고, 배우는 방식이며, 실천의 방법이다.

그저 스승을 따라 하겠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잘 쓰여진 고전 인문학을 풀어주는 책을 읽는 것만으로 자신의 교양이 가득 채워진다고 착각하는 자들은 그저 그것을 읽는 것만으로 감탄하며 마치 그것만으로 그 지식과 경험이 자신에게 옮겨왔다고 착각하고 오만해진다.


아니다. 당신이 읽은 것이 온전한 당신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더 지난한 공부와 사색과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들이 반복되어 쌓여야만 하는 것이다. 착각하지 마라.

매거진의 이전글 상대의 수준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자들을 가르치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