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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15. 2022

공자가 제자를 파문하겠다며 노여워했던 이유

그래선 안된다고 가르쳤는데 결국 그렇게 되고 만다면.

季氏富於周公, 而求也爲之聚斂而附益之. 子曰: “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可也.”
季氏가 周公보다 부유하였는데도 求(冉有)가 그를 위해 聚斂(세금을 많이 거둠)하여 재산을 더 늘려주었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求는〉 우리 무리가 아니니, 小子들아! 북을 울려 죄를 聲討함이 옳다.”


이 장에서는 계씨 그러니까 앞서 누차 설명했던 대부 계강자(季康子)의 가신으로 가서 잘못 행동한 제자 염유(冉有)에 대한 공자의 매서운 질책이 도드라지는 내용이다.


참고로 이 장에서 공자에게 혼쭐이 나는 제자 염유(冉有)는 비슷한 행동과 사고방식으로 이미 스승 공자에게 크게 한 소리를 들은 바 있다. 바로 ‘옹야(雍也) 편’ 3장에서 공부했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당연히(?) 까맣게 잊고 있을 학도들을 위해 간략하게 그 내용을 다시 상기하자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염유(冉有)

해당 장을 공부할 때 염유(冉有)에 대해서 독특하게 ‘염자(冉子)’라는 극존칭을 사용한 점을 눈여겨보라고 한 바 있다. 자화(子華)가 제(齊)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어머니에게 곡식을 가져다 주자며 염유가 스승에게 청한다. 


스승 공자는 곡식을 가져다주는 것은 허락하지만 얼만큼을 가져다줄 것인가에 대해서 상당한 인식의 차이가 보인다. 결국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곡식을 많이 가져다준 것을 알게 된 스승은 ‘君子周急不繼富(군자는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고 재산을 불리지는 않는다.)’는 말로 따끔한 일침을 날려 일깨워주고자 한다.


이 장에 대해서 굳이 다시 상기하도록 한 것은, 사람의 본성이 얼마나 바뀌기 어려운 것인지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한 두 장이 연결고리를 가지고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염유(冉有)는 이미 계강자의 가신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이런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진 행동을 할 전조를 보였던 것이고, 공자는 일찍부터 그 부분이 아주 심각하게 잘못 잡혀 있는 생각임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을 배우는 자들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주자가 이 장에 대해서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주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주공(周公)은 왕실의 至親(지친)으로 큰 공이 있었고 冢宰(총재) 자리에 있었으니 그 부유함이 마땅하거니와, 계씨는 제후의 卿(경)으로서 부유함이 주공(周公) 보다 더하였으니, 군주의 것을 훔쳐 빼앗고 백성들에게 긁어모으지 않았다면 어찌 이것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염구(冉求)가 계씨의 가신이 되어서 또다시 그를 위해 부세(賦稅)를 급박하게 거두어 그의 부를 더 늘려준 것이다.


바로 어제 살펴보았던 ‘재부(財富)’에 대한 나의 논평을 아직 기억한다면, 주자의 주석을 읽으며 공부하는 학자들의 생각은 대개 똑같은 것이로구나 하는 공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공자의 지금 주공(周公)을 언급하여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당시의 예법으로는 군주보다 대부가 부를 더 탐닉하여 부유하게 되는 것 또한 예가 아닌 것으로 보았다. 


당연히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이야 대통령보다 부자인 재벌들이 얼마든지 있지만, 중세 봉건제에서는 재물이 곧 권력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권력과 재력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백성을 비롯하여 대부들까지도 군주에게 귀하고 좋은 것을 바치는 문화가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기업을 세운 것도 아니고 노력해서 번 것도 아니고 감히 대부가 백성들에게 고혈을 짜내서 그 세금을 불려 군주보다 더 재물이 많아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여기서 공자가 당시 시대적 차이를 보더라도 600년 전의 주공(周公)을 언급하며 계강자의 재산을 비교했던 것은, 여러 학자들에 논쟁을 자아냈다. 


물가의 변화는 물론이거니와 그 상황 자체가 어떻게 600년 전의 인물과 재산정도를 비교할 수 있느냐는 고증학자들의 논리적인 비판에서부터, 시대적인 차이가 완전히 다른데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공자가 늘 설명하듯 노(魯) 나라가 본래 주공(周公)의 정통성을 이은 나라라는 점에서 당시 노나라의 군주였던 애공(哀公)을 바꾸어 통칭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의견들이 나왔다. 


나는 그 의견에 무게를 두어 공감하면서 숟가락을 하나 더 얹는다. 바로 왜 공자가 굳이 다른 표현이 있었음에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주공(周公)이라는 표현을 이 장에서 사용하여 논란을 야기하게 되었는가 하는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는 설명을 부연한다.

곡부에 있는 주공의 묘

주공(周公)이 누구던가? 공자가 도통(道統)의 맥을 잇는 인물이 아니던가. 즉, 이 설명에서는 단순히 당대의 군주보다 감히 재물을 탐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그것을 백성들을 쥐어짜는 방식을 취해 그렇게 하였고, 그것을 자신의 제자가 도왔으니 정말로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그 상황은 단순히 현재의 군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참람된 그들의 모범이 되고 표본이 되었던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근본을 일깨우는 역할을 동시에 하고자 했던 것이라 해석한다.


스승 공자의 노여움이 얼마나 컸는지, 공자는 파문을 의미하는 다음과 같은 일갈로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듣는 이들로 하여금 움찔 놀라게 만든다.


“(求는) 우리 무리가 아니니, 小子들아! 북을 울려 죄를 聲討함이 옳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로 상세한 의미를 풀어준다.


‘우리 무리가 아니라는 것’은 그를 끊음이요, ‘小子(소자)들아 북을 울려 성토하라’고 하신 것은 문인들로 하여금 그 죄를 성토하여 꾸짖게 하신 것이다. 악한 사람과 무리 지어 백성을 해침을 성인께서 미워하심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스승은 엄하고 벗은 친하므로 이미 끊고서도 오히려 문인으로 하여금 바로잡게 하셨으니, 또한 사람을 사랑함이 그침이 없으심을 보겠다.


주자의 해설이 절묘하다. 공자의 말에서 보이는 모순을 이렇게 상세한 설명으로 푼 것임을 이해했는가? 무엇이 모순인지도 모르고 그저 읽어 내려갔나? 이미 파문을 명하여 자신의 문하에 두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 진심이라면, 이후에 다른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죄를 성토하고 꾸짖을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노여움은 하늘에 닿을 지경이라 하였지만, 정작 그 노여움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저지른 잘못의 정도가 이런 말을 들을 정도의 아주 큰 잘못임을 일깨워준 것이고, 그것을 직접 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성토하라고 한 것은 그 잘못을 널리 깨닫게 하여 문하 제자들이 다시는 유사한 잘못을 범해서는 안될 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게 만드는 공자 특유의 교육방식을 시전해 보인 것이다.


이 장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사실관계와 그 행간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왜 염유가 그리 잘못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곱씹어 생각할 수 있도록 범 씨(范祖禹(범조우))가 배우는 이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염유(冉有)가 政事(정사)의 재주를 계씨에게 시행하였다. 그러므로 不善(불선)을 함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이는 心術(심술, 마음)이 밝지 못하여 자기 몸에 돌이켜 구하지 못하고 벼슬하는 것을 급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논어>에 보면, 적지 않은 제자들이 다양한 이유로 스승에게 꾸지람을 듣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따끔하게 혼쭐이 나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이 장에서 보이는 것만큼 파문을 언급할 정도의 노여움을 보이는 장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있긴 하지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나는 ‘옹야(雍也) 편’ 3장에서 공자가 이미 걱정하고 우려했던 염유(冉有)의 잘못된 사고방식이 고쳐지지 못하고 더 큰 편차를 보이며 어그러진 것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을 통해, 참람된 대부(大夫)의 배만 불리는 짓을 하게 하였으니 스승의 입장에서 얼마나 부끄럽고 참담했을지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만하다.


여기서 염유(冉有)가 등장한 김에 한 번쯤 조금 자세히 정리해보기로 하자.


염유(冉有)는 <논어>에서 무려 16번에 걸쳐 등장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자로(子路), 안회(顔回), 자공(子貢)과 더불어 공자를 지척에서 수행했던 제자 군에 해당했다. 이 네 사람이야말로 14년이나 천하를 주유함에 있어 동고동락했던 최측근이었기 때문이다. 자공(子貢)보다 두 살이 많았던 염유(冉有)는 사실 이 장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몹쓸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어져 나올 '선진 편' 21장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그 성향 자체가 소극적이고 사색을 즐기는 성품이었기에 오히려 공자가 자로(子路)와 정반대 성품이라고 분석하여 오히려 더 앞으로 나서라고 격려해주는 모습을 보더라도 함부로 주제넘게 나대는 성향이 아니었음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이를 무시하며 월권행위를 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동은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그만큼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긋고 늘 부족하다고 여겨 상황을 타개해나가는 개혁적인 성향이 부족했다고 전한다.


계강자의 가신으로 가게 된 계기도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 공자의 천하 주유가 10년이 훌쩍 넘어갈 즈음 공자를 내쫓았던 계환자가 그의 후계자였던 계강자에게 반드시 공자를 초청하여 곁에 두어야 한다고 유언을 남겼고, 그 말에 따라 공자를 영입하려 했던 계강자는 공자를 부담스러워했던 신하들의 견제 때문에 공자 대신 그의 제자 염유(冉有)를 영입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꿩 대신 닭으로 데려온 염유(冉有)가 탁월한 능력자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계강자는 이후 스승을 다시 모셔야 한다는 염유(冉有)의 추천을 받아들여 예물을 갖춰 공자를 노나라로 모셔오게 한다.


즉, 공자가 천하 주유를 마치고 고향인 노나라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신중하고 겸손했던 염유(冉有)의 덕분이라면 덕분인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공자가 이렇게 매섭게 염유(冉有)를 혼냈는지 더욱 궁금해지는가?

다양한 재능을 갖춘 제자들을 키워본 스승이라면 안다. 정말로 더 손이 가는 제자는 자질이 부족하면서 그저 입바른 소리나 하고 알랑거리는 제자보다는 능력이 출중함에도 불구하고 늘 부족하다고 하면서 그 능력을 밖으로 십분 끄집어내지 못하는 제자이다.


그런데, 염유(冉有)는 무엇보다 현실감각이 탁월했던 타고난 관료였다. 물론 염유(冉有) 자신조차 계강자의 가신이 되어 정치에 투신하고나서야 깨달았지만, 스승 공자의 눈에는 염유(冉有)가 늘 이상적인 가치에 대한 실천보다는 현실적인 것에 맞춰 가르침을 궁극의 길로 향하게 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실감각에 맞춰 그것이 최선이라며 더 높은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못해 아쉽고 답답했을 것이다. 


분명히 그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깨면 훨씬 더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을 텐데 고지식하게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늘 찾다 보니 전형적인 관료로 고착화되어가는 제자의 모습에 속상했던 것이 이런 가열찬 비판으로 형태를 바꾸어 드러난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정해본다.


자신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는 올라가기 전까지 자신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진정한 스승이라면 먼저 그 길을 걸어 올라와봤기 때문에 제자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어떻게 그 길을 오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계발시켜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늘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도 있어야 하겠으나 천성이 소심하고 차분하기 그지없는 사람의 경우, 과감함이 필요할 것이며, 계획 없이 마구 나서는 자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이뤄나가며 착실하게 내공을 쌓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장에서 그리고 조금 넓게 염유(冉有)의 케이스를 통해서 공자가 일깨워주려는 가르침의 정수는, 자신의 한계를 긋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 그것이 최선이라고 변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조금만 깊이 있게 생각해보더라도 그렇게 소심하고 고지식하여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사지 않는 성격이던 염유(冉有)가 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면서까지 세금을 거두게 되었는지를 배우는 이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당신에게도 처음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 공직에 들어서면서, 혹은 처음 원하던 회사에 입사하게 되면서 최고로 돈을 많이 벌어 챙기겠다거나 국민들의 요구와는 전혀 다른 복지부동(伏地不動)하며 자신의 출세에만 올인하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을 채워가면서 당신은 어느 사이엔가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라며 적당히 무사안일(無事安逸)한 자세로, 오로지 자신의 사욕만을 채워가는 괴물로 변해버렸다. 염유(冉有)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타락했던 것이고 스승 공자는 그것이 너무도 통렬하게 가슴 아팠던 것이다.


당신이 이 장을 공부하며 자신의 처음을 돌아보고 지금이라도 바뀔 수 있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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