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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16. 2022

제자를 알아보는 스승의 마음을 제자들은 아는가?

들을 때 아파도, 결국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柴也愚, 參也魯, 師也辟, 由也喭.
“柴(子羔)는 어리석고, 參(曾子)은 노둔하고, 師(子張)는 한쪽(外貌)만 잘하고, 由(子路)는 거칠다.”

이 장은 네 명의 제자에 대해서 단 한 글자로 사람됨을 평가한다. 이른바 ‘춘추 논법’이라 쓰고 ‘촌철살인’이라 새기는 공자만이 가능한 그야말로 독보적인 평가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 세 가지가 기본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달해있어야 한다.


첫째, 사람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갖춰야만 한다. 그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떠들 수는 없지 않은가? 둘째, 그가 가진 능력을 단 한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철학적인 사유와 문학적인 표현능력을 갖춰야만 한다. 어떤 사람이라도 단 한 가지 면모만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사람을 대표하는 성향은 분명히 한 가지로 축약할 수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통찰력과 표현능력이 없이는 이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 장에서 보는 것처럼 네 사람이나 되는 사람들을 비교할 수 있도록 변별력을 갖춰 소개하는 타고난 설명방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많은 것을 공부해서 스스로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알기 쉽게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능력은 별개이다.


전자의 능력을 갖춘 이들이 각 분야에 걸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적지 않게 나왔었다. 하지만, 후자의 능력까지 갖춘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후자의 능력을 갖춘 사람은 전자를 기본으로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세 가지 기본적인 능력 위에 공자가 보여준 그 행간의 의미가 어떤 뜻을 담고 있었는지를 주자의 주석을 통해 한 명씩 살펴보기로 하자.

자고(子羔)

시(柴)는 공자의 제자이니, 성이 高(고)이고 자가 子羔(자고)이다. ‘愚(우)’는 지혜가 부족하고 후덕함이 有餘(유여, 충분함) 한 것이다. <孔子家語(공자가어)>에 기록하기를 “그는 발로 〈남의〉 그림자를 밟지 않았고, 〈봄이 되어〉 땅속에서 갓 나온 벌레를 죽이지 않았고, 한참 자라는 초목을 꺾지 않았으며, 부모의 상례를 집행함에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려 일찍이 이를 드러내고 웃은 적이 없었으며, 난리를 피해서 갈 때에 지름길로 가지 않고 구멍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였으니, 그 인품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제자는 자고(子羔)이다. 평가로 무려 ‘어리석다’라는 한 글자를 썼다. 여기서 주자의 주석이 빛을 발한다. 어리석다는 평가는 현대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하지만 공자식 표현이 되어버리는 순간 그 의미는 중의적이고 다각적인 의미를 갖는다. ‘지혜는 다소 부족하지만 그렇기에 후덕하였다’라는 해석은 읽는 순간, 자고(子羔)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빠릿빠릿하게 잇속을 차리는 사람은 아니었을지언정, 그런 성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약간은 어리숙한 듯하면서 인정이 깊어 후덕하였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성정을 설명하기 위해 <공자 가어>에 나온 사례를 설명한 것은 구체적으로 그 상상의 근거를 실제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후에 스승만큼이나 유명세를 날리게 되는 증자(曾子)이다. 그런데 첫 번째 자고(子羔)에 대한 ‘어리석다’라는 표현도 다소 충격적이었는데, 증자에 대해서는 ‘노둔하다’고 평가하였다. 심지어 주자는 다음과 같이 그 뜻만을 새기고 자고(子羔)에 대해 설명해준 만큼은 고사하고 아무런 설명조차 없다.


‘魯(노)’는 둔함이다.


이에 왜 주자가 길게 설명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의아해할 배우는 자들을 위해 정자(明道(명도))가 다음과 같이 해설을 달아준다.


“삼(參)은 마침내 노둔함으로써 〈도를〉 얻으셨다.”


‘노둔함으로써? 도를 얻는다?’ 주석이라면 해설을 해줘야지 더 수수께끼처럼 말을 더 꼬아버렸다. 어떻게 ‘노둔함’이 장점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현대 국어사전에 의하면 노둔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둔하고 어리석어 미련하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증자가 어떤 과정을 통해 그렇게 유명하게 되었는지를 공부하고 그 과정을 알고 있을 상급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핵심을 찌르는 주석에 당혹스러워하는 초심자들을 위해 〈정자(伊川(이천))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부연한다.


“증자의 학문은 성실과 독실함 뿐이었다. 聖門(성문, 성인의 문하)의 배우는 자들이 총명하고 재주 있으며 말을 잘한 자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끝내 그 道(도)를 전수한 것은 바로 질박하고 노둔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학문은 성실함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정자는 공자의 ‘노둔’이 갖는 의미를 정확한 두 단어로 설명한다. ‘성실과 독실함’. 그것이 공자가 증자를 설명한 이후로 고문에서 갖는 노둔함의 숨은 의미가 된다. 공자가 그 단어를 사용한 것만으로도 배우는 자들에게 그 단어의 의미가 감춰져 있던 본뜻을 부여받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않은가?

정자의 설명처럼, 공자의 문하에 자타가 공인한 천재들이나 뛰어난 사람들이 적지 않게 모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학통을 이어 도를 전수받은 사람은 증자(曾子)였다. 즉, 증자의 사람됨은 이미 공자의 학통을 이었다는 것만으로도 공인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배우는 이들은 단 한 가지에 집중하면 된다. 증자가 어떤 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스승에게 허여 받고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쉬지 않아 꾸준히 노력하는 학문에 임하는 자세이고 태도였음을 정자는 바로 집어낸다.


증자가 그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그 핵심 포인트에 대해 윤 씨(尹焞(윤돈))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증자의 재질이 노둔하였으므로 그 학문이 확고하였으니, 이 때문에 道(도)에 깊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평가한 제자는 자장(子張)이다.

‘辟(벽)’은 한쪽만 잘하는 것이니, 容止(용모와 행동거지)에만 익숙하고 성실성이 부족함을 이른다.


한쪽만 잘한다는 의미는 고문에서 이른바 ‘편벽(偏僻)되다’라는 용어로 많이 사용되는 의미이다. 문제는 그 한쪽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쓰지 않은 채 사용했다는 점이다.


주자는 그 한 가지를 ‘용모와 행동거지’라고 해석하였고, 나는 원문에서 그것을 괄호 안에 넣어 ‘외모’라고 풀었다. 얼굴을 예쁘게 치장하는 외모가 아닌, 고문에서 말하는 겉으로 보여지는 부분에 대해서만 신경을 쓴다는 의미로 풀어쓴 것이다.


앞서 과유불급(過猶不及) 장에서 자공이 두 동문을 비교하며 물었을 때, 공자가 지나치다고 평가했던 제자가 바로 자장(子張)이다. 즉, 이미 이때부터 공자는 자장(子張)이 지나치게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실제로도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적극적인 성격을 통해 통 크게 자신에게 걸맞은 출세와 명성을 누리고 싶어했다.


앞서 공부했던 ‘위정(爲政) 편’에서 엄하기로 유명한 스승에게 대놓고 어떻게 출세할 수 있느냐고 물었던 제자 역시 바로 자장(子張)이었다. 그러니 그 모든 사안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공자의 이 촌철살인 같은 한 글자 표현방식이 얼마나 적확하고 날카로운지에 대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 자장(子張)은 공자뿐 아니라 동문수학한 벗들로부터도 별로 좋은 평가를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공자가어(孔子家語)>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편’에서는 자장(子張; 전손사)에 대해 “모든 일을 실천하는데 인의(仁義)에 힘쓰지 않았다.”라고 했고, “공자의 문인들도 자장(子張)을 벗으로 사귀었으나 공경하지는 않았다.”라고 했다.


여기까지만 설명을 들었다면 당신이 자장(子張)을 통해 배울 것은 없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승 공자는 제자의 단점을 그대로 놔둘 사람이 아니었고, 그런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자장(子張)은 자신의 단점과 잘못을 벗어던지고, 공자의 문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삶의 태도를 지니려고 무척 노력했다.


즉, 중요한 것은 그가 가진 천성을 그가 배움을 통해 깨닫고 고쳐나갔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아래 보이는 <대대례기(大戴禮記)>의 ‘위장군문자(衛將軍文子)편’에서 자장(子張)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면 그가 어떻게 변모하여 생을 마쳤는지 알 수 있다.


業功不伐, 貴位不善, 不侮可侮, 不佚可佚, 不敖無告, 是顓孫之行也.


일에 있어 공로가 있어도 내세우지 않고, 귀한 자리에 올라도 좋아하지 않고, 업신여길 만한 것을 업신여기지 않고, 허물할 일을 허물하지 않고, 궁색한 사람들에게 거만을 부리지 않는 사람은 바로 전손(顓孫: 자장)이다.

마지막 제자는 드디어 자로(子路)이다. 이제까지 충분히 언급되어왔던 자로(子路)를 상상해왔다면 ‘거칠다(喭)’라는 공자의 표현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이 표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喭(언)’은 거칠고 속됨이다. 傳(전)에 ‘언(喭)’이라고 칭한 것은 속된 말을 이른다.


몇몇 현대 해설서에 보면, 다른 앞의 세 제자에 비해 나이도 한참이나 많고, 그래도 공자 학단에서는 최고 연장자였던 자로에게 공자가 너무 혹평을 내린 것은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바로 그 의미를 해설하기 전에 이 전체의 의미를 선배 학자가 뭐라고 정리했는지에 대해 양 씨(楊時(양시))의 주석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해보라.


“이 네 가지는 성질의 편벽됨이니, 이것을 말씀하여 스스로 힘쓸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


모든 단어는, 당시나 현대에나 좋은 의미의 단어는 아니다. 그런데 앞서 설명하고 새롭게 공자식으로 부여된 설명이 가미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가진 숨겨진 좋은 뜻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핍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위의 네 가지 설명은 각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천성적인 성향을 공자가 다년간에 걸쳐 가르치면서 곁에 두고 본 분석을 통해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저 비판하거나 그 부족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이 공자의 깊이이다.


천성의 부족함과 결핍 나름에서 가지고 있는 그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당연히 그것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안 좋은 부분은 반드시 채워나가라는 의미를 부연해주고 있는 것이다.


앞서 세 가지 기본 조건을 말했지만, 그 세 가지 기본 조건을 갖추고서도 누가 이렇게 심도 있는 방식으로 다각적인 방식의 가르침을 한 글자만으로 줄 수 있단 말인가?


아울러 앞서 설명한다는 자로에 대해서 너무 직설적이고 거칠게 비난한 것이 아니냐는 오독(誤讀)은, 그만큼 공자가 자로를 잘 알았기에 가능하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직설적인 것이 아니면 알아듣지 못하는 스타일이 있다.


자로가 대표적인 그 다혈질 단순 과격 무식한 스타일이었다. 물론 공자의 문하에 있으면서 그러한 건달 기질이 많이 감소되었다고는 하지만, 공자는 자로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에 대해서 예언 조로 얘기하면서까지 걱정에 걱정을 거듭했다.


들어서 가슴에 확 와닿을 정도로 일러주고 또 일러주는 방식이 자로에게는 가장 효과적임을 스승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다고 그런 표현을 쓴다고 해서 금세 토라지거나 기분이 상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서로 간에 있지 않으면 저런 ‘거칠다’라는 표현은 함부로 쓸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앞서 세 제자에 대한 완곡한 표현보다 자로에 대한 평가가로 제시한 그 한 글자는 더 마음을 흔든다.

당신이 오늘 이 장을 공부하면서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여러 가지가 아닌 오직 한 가지이다. 태생적인 단점을 그의 성향이라면서 규정하듯 평가했던 스승의 마음과 그것을 통해 또 하나 가르침을 던져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네 가지를 네 명의 제자들이 극복하고 더 나은 자신을 구현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여 이뤄냈다는 점이다.


당신은 지금 그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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