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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17. 2022

스승은 결코 제자를 비교하는 가벼움을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안회가 될 수 없다면, 자공처럼도 될 수 없다.

子曰: “回也其庶乎, 屢空. 賜不受命而貨殖焉, 億則屢中.”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顔回는 〈道에〉 가깝고 자주 끼니를 굶는다. 賜(子貢)는 天命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화를 늘렸으나 臆測(억측)하면 자주 맞는다.”

이 장에서는 가난한 것으로는 어느 누구도 비할 데 없던 안회(顔回)와 돈을 불리는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자공(子貢), 두 제자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왜 두 제자를 이 장에서 한데 엮어 비교했는가에 대한 기준부터 보자면 아이러니하게도 ‘재물’이 아닌 ‘천성’이다. 


안회는 가난한 정도가 너무 심해서 끼니를 자주 굶을 정도였다고 설명하지만, 그 앞에 ‘거의 가까웠다’라는 표현으로 도의 경지에 들 정도로 수행의 정도가 높았음을 허여하고 아쉬워한다.


먼저 안회에 대한 부분을 주자가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庶(서)’는 가까움이니, 道(도)에 가까움을 말한다. ‘屢空(누공)’은 자주 空匱(공궤, 궁핍)함에 이른 것이다. (그는) 가난으로 마음을 움직여 富(부)를 구하지 않았으므로 자주 궁핍함에 이른 것이다. 道(도)에 가깝고 또 가난을 편안하게 여겼음을 말씀한 것이다.

안회가 얼마나 가난했고 궁핍했으며 그 와중에서도 학문의 즐거움을 놓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옹야(雍也) 편’ 9장에서 충분히 살펴본 바 있다. 그 장에서도 풀이했었지만, 안회가 공자에게 허여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일찍 요절했기 때문도 아니고 너무 지나치게 가난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환경이었고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공자가 제자 안회를 허여(인정)했던 것은 그가 이룬 성취였고 그가 기울였던 노력 때문이었지 그 어떤 다른 환경적인 것이거나 태생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온전히 후천적인 그가 보였던 노력으로 이룬 성과에 대해서 확인하고 인정했던 것이다. 앞서 공부할 때 설명했던 바와 같이 가난을 즐기는 사람은 안회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없다. 그저 가난함이 배우는 즐거움을 해치지 못할 정도로 그것에 빠져 지내는 집중력과 의지가 중요한 것임을 안회는 몸소 보여준 인물이었다.


한국의 고전문학 <허생전>에서 그 천재적인 허생도 결국 아내의 성화에 이기지 못해 10년 기약했던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결국 돈을 벌기 위해 나서지 않았던가? 고문을 제대로 공부한 연암 박지원이 쓴 한문소설인 그 작품은,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고문의 기본 서적에 해당하는 <논어>는 이미 머릿속 데이터 베이스에 모두 입력되어 있는 수준에서 집필된 것이다. 

그 말은 그것을 창작한 연암도 그렇지만 그 한문소설을 읽는 이들 역시 글쓴이가 그려낸 허생의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이미 파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안회가 그저 고지식하여 학문에만 능통하고 세상일을 잘 몰랐을 것이라는 엉뚱한 편견은 당신을 포함한 현대인들이 할 뿐이지, 공자의 눈에도 그렇고 당시 배우는 자들의 입장에서 안회가 능력이 없어서 그저 책만 보며 가난을 즐겼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외재적인 부귀영화가 목적이 아니었음을 명확하게 했던 그의 삶에 대한 자세가 공자로 하여금 인정받는 요소로 작용한 것이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물인 안회와 이 장에서 엮어서 서술하는 자공(子貢)이 왜 등장하는지에 대해서는 살짝 눈치를 챘기를 바란다. 공자는 자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賜(子貢)는 天命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화를 늘렸으나 臆測(억측)을 하면 자주 맞는다.”

얼핏 보기에는 마지막 문장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마치 자공(子貢)을 폄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정도로 공자의 평가가 가볍기 그지없이 들릴 여지도 다분하다. 실제로 이 장의 해설을 한 현대 해설서들을 보면, 안회를 칭찬하고 자공을 상대적으로 지적했다는 식으로 말하며 안회의 돋보임을 강조하는 대상으로 자공을 끌고 온 것처럼 해석하는 오독을 범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공자에 대한 모독이다. 자신이 가르치고 측근에 두었던 두 제자를 비교를 하면서 다른 제자를 돋보이기 위해 다른 제자를 대척점에 두는 짓은 그런 해석을 하는 수준이 낮은 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성인 공자는 단 한 번도 그런 논법을 구사한 적이 없다.


참고로 그렇게 오해하기 좋은 상황을 만드는데 ‘억측’이라는 단어가 일조하는 바가 큰데, 현대어의 억측이 갖는 의미가 ‘이유와 근거가 없이 짐작하는 일이나 그런 짐작’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문에서 갖는 의미는 다르다. 그래서 그 앞의 말을 잘 여겨야 뒤의 말이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나왔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문장에 대해 주자가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며 그 의미를 유추해보기로 한다.


‘命(명)’은 천명을 이른다. ‘貨殖(화식)’은 재화를 생식(증식)함이다. ‘億(억)’은 뜻(생각)으로 헤아림이다. ‘자공은 안자의 가난함을 편안히 여기고 道(도)를 즐김만은 못하나 그 재주와 지식의 명철함이 또한 일을 헤아리면 적중함이 많음’을 말씀한 것이다.


‘臆測(억측)’의 의미가 이유나 근거 없이 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자신이 예상하고 분석하여 헤아린다는 의미의 ‘億(억)’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자공에 대해서 폄하하거나 안회보다 떨어지는 인물로 대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가지고 있던 천성이 달랐고 그들이 지향했던 바탕이 달랐음을 설명하면서도 안회만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자공 역시 타고난 천성과 배움을 통해 그것을 특화시켜 명철한 분석을 통해 헤아려 예상한 것들이 틀린 적이 거의 없다는 칭찬의 말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첫머리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다. 맞다. 도대체 그가 무슨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는 말인가? 배우는 자들이 이와 같은 의문을 품고 어려워할 것을 우려했던지 정자가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아 해설해준다.


“자공이 재화를 증식함은 후세 사람들이 재물을 풍족하게 한 것과는 같지 않았고, 다만 이 마음을 잊지 못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 또한 자공이 젊었을 때의 일이니, 性(성)과 天道(천도)를 들음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자는 일단 자공을 변호한다. 자공이 스승을 만나기 전에 어마어마한 재화를 불릴 정도의 자산가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재부(財富)를 모으는 것과 다른 이들의 탐욕스러운 그것과 달랐고 그거 그 천성을 잊지 못하고 가지고 있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그 마음마저도 스승을 만난 이후로는 용맹 정진하면서 도를 향해 바꾸었다는 변호이다.


앞에서도 몇 번 설명한 바 있지만, 적지 않은 수의 공자 학단이 천하를 주유하면서 배를 곯지 않고 그 긴 세월 동안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나라를 가던 대접을 받으며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은 여비를 마련했던 것은 모두 자공의 탁월한 수완 덕분이었다. 


이것은 실제로 공자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모든 제자들에게 3년 복상(服喪)을 명하고 지휘했던 것이 바로 자공(子貢)이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아무런 경제행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며 복상을 3년이나 하는데 그 많은 제자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재정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모든 제자들이 스승을 위한 3년 복상을 하고 나서도 자공은 다시 혼자서 3년을 더 스승의 묘를 지켰다. 그의 각별한 스승을 향한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바뀌지 않는 그 올곧은 성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증하는 대목에 다름 아니다. 

앞서 안회가 배우고 익혀 깨닫고 실천하는 것에 치중하여 가난을 구제하는 것에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 칭찬의 포인트였다면 자공 역시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뒤에 나온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걸었다는 것도 역사적으로도 확인된다.


공자의 조국인 노(魯) 나라가 제(齊) 나라의 침략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공자는 제자들에게 누가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묻는다. 처음에는 자로(子路)가 나섰고, 그다음으로 공손룡(公孫龍)과 전손사(顓孫師)가 함께 나섰으나, 공자는 그들 모두의 제안을 물리치고 세 번째로 조심스럽게 나선 자공(子貢)을 보낸다. 


일단 가장 위기의 순간을 타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섰던 다른 제자들을 만류하고 그를 선택했다는 것에서 공자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만한 것이다.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듯이 평소 학단의 살림살이나 챙기는 줄만 알았던 자공은 출격하자마자 뛰어난 언변으로 노나라를 침공하려고 하는 제나라의 대부 전항(田恒)에게 가서 그를 설득해 강성한 오(吳) 나라를 치는 것이 제나라에 있어 얼마나 이득인지 설득하고, 오에 가서 오왕인 부차에게 노를 돕는 것이 패자가 되는 길이라고 설득하고, 뒤쪽의 월(越) 나라가 걱정된다고 하자 월(越)로 가서 월왕인 구천에게 오를 돕는 척하면서 오의 빈틈을 노리라고 조언한다. 


다시 오로 가서 월의 과도한 지원을 막고, 노를 도우면서 진(晉) 나라까지 치는 것을 건의한 후, 진으로 가서 오의 침공이 걱정되니 방비를 단단히 하라고 조언한다.


이 복잡다단하면서도 거대한 그림은 이미 자공의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된 이후에 실제로 구현된다. 결국 자공이 국제무대에 한번 출격한 것만으로 노를 구하고, 제를 뒤흔들고, 오를 멸망시키고, 진을 강대하게 만들고, 월을 패자로 만들었다.


물론 이 일화 하나만이 전부가 아니고, 실제로 사마천의 문학적 허풍이 가미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자공의 언변은 물론이고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이나 그 종합적인 통찰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가히 신의 경지에 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이런 성과는 그가 스승인 공자보다 뛰어난 인물로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정도여서 공자 사후 그를 공문의 후계자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을 정도였다. 


본래 위(衛) 나라 출신이었던지라 그는 고향에 돌아가 벼슬을 하였고, 이후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 상부(大中祥符) 2년(1009) 여양 공(黎陽公)에 추봉 된 결코 안회의 대척점에 두고 대조의 대상이 될만한 레벨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공부를 통해 알고 있던 범 씨(范祖禹(범조우))는 이 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누공은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음료도 자주 끊겼으나 그 즐거움을 변치 않은 것이니, 천하의 사물이 어찌 그 마음을 움직일 만한 것이 있었겠는가. 가난함과 부유함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자공이 재화를 증식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으니, 이는 천명을 편안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가 말함에 맞음이 많았던 것은 억측일 뿐이요, 이치를 궁구하고 천명을 즐긴 것이 아니다. 夫子(부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賜(사)는 불행히도 말을 하면 맞으니, 이는 사로 하여금 말을 많게 하는 것이다.’ 하셨으니, 성인께서 말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심이 이와 같으시다.”


범 씨의 해석에서 알 수 있듯이, 공자는 앞서 제자들에게 부정적인 용어로 그들의 발분망식(發憤忘食)의 노력을 요구하였다. 


이 장을 열면서 내가 이 장에서 두 제자를 비교하는 기준이 ‘천성’이라고 했던 것은 안회가 다른 어떤 것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처음부터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에만 오롯이 정진한 것에 비해, 재부를 늘리는 재주를 천부적으로 타고났던 자공의 입장을 볼 때, 그것이 진정으로 하늘이 부여한, 따르고 지향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로 하늘이 부여한 ‘천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 풀이한 것이다.


만약 자공이 자신의 분석을 통해 예측하는 것이 맞지 않았더라면 그쪽으로 더 탐닉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역설적인 아쉬움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범 씨의 의견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물론 스승 공자의 입장에서 돈을 버는 타고난 재주라기보다는 그 탁월한 능력과 재주가 도를 구하는 것에 온전히 향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을 것이나 그만큼 현실감각이 뛰어났던 자공의 능력을 공자 역시 일부 인정하고 있었기에 그 능력도 그저 타고난 천성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더 높은 단계의 세련됨으로 업그레이드되어갔음을 알았을 것이다.


자공이 그러한 현실감각이나 경제적인 환치 개념을 기반으로 한 사고를 하는 것이 못마땅한 부분이 있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자공은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지만, 남의 단점을 덮어주지는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전한다. 


즉, 다른 사람의 흠을 발견하면 그저 넘어가기보다는 반드시 지적하는 스타일이었다는 것이다. 실로 현실적이며 경제학도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하지만, 결국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자신을 찾아온 자공에게 왜 이리 늦게 왔느냐며 탄식한 후 그 유명한 마지막 노래(太山坏乎!梁柱摧乎!哲人萎乎!)를 불렀다고 하니 그가 자공에게 가졌던 절대적인 신뢰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이 안회가 될 수 없다면, 자공처럼도 될 수 없다.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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