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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20. 2022

아무리 착해도 배우지 않고 행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랴

당신의 자식에게 무엇을 배우라고 할 것인가?

子張問善人之道, 子曰: “不踐迹, 亦不入於室.”
子張이 善人의 道를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聖人의 자취를 밟지 않더라도 〈악한 일을 하지 않으나〉 또한 방(聖人의 경지)까지는 들어가지 못한다.”

이 장에서는 자장(子張)이 ‘善人의 道’가 무엇인지를 묻고 그것에 대해서 공자가 답변해주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논어>의 초반부를 읽을 때와는 달리 이제 중간을 넘어오고 나니 앞에서 공부한 내용이나 뒤에 공부할 내용들을 알지 못하면 해당 내용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 많이 나오곤 한다.


이 글에서 자장(子張)이 언급하는 ‘善人의 道’라는 것도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된다. 내가 굳이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 ‘善人’을 착한 사람이라고 해석하지 않은 것은 행여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우를 범할까 싶은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 해설서에는 그저 ‘착한 사람’이라고 해석하고 넘어가는 자들도 적지 않고 그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해석하고 짚어주는 해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동서양의 고전을 공부하는 데 있어 해당 고전을 쓴 작가의 본래 언어를 해독하는 능력이 필수적인 것이라 강조하는 것이다. 괴테의 서적을 일본인이 번역하고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글을 읽고 괴테를 이해한 사람과 독일어로 원서를 읽고 그 깊이를 이해한 사람은 이해의 깊이가 다르다. 

괴테의 <파우스트> 원서

현재 사용하는 독일어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괴테의 저서도 그러할진대, 지금 사용하지 않는 한자 고문이나 라틴어, 희랍어들로 쓰인 고전들의 깊이를 이해하는데 자국어로 번역된 내용으로 그 깊이를 길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욕심이고 아집이며 어리석은 상상인 셈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 나라의 언어를 할 줄 안다는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고 깊은 사유가 담긴 글을 행간까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고 하여 한국어로 적힌 깊은 사유가 담긴 글을 제대로 독해해낼 수 있는 자가 드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문을 직독하고 직해하는 수준까지 달하는 것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일반인들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거니와 그러기 위한 공부를 하는데만 해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나마 제대로 된 번역과 해설을 한 책을 선택하여 자신이 곰곰이 따져가며 독해하고 사유의 폭을 확장하는 공부는 중요하다.


왜 오늘은 바로 이 장을 설명하기도 전에 이런 잔소리 사설부터 시작하는지 생뚱맞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인가? 그 이유가 바로 오늘 이 장의 가르침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더 상세한 내용은 이 장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나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이 장에서 子張이 말하는 ‘善人’의 의미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저 ‘착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주자는 이 장의 주석에 다음과 같은 해설로 선인을 설명하였다.


‘善人(선인)’은 자질은 아름다우나 배우지 못한 자이다.


본래 고문에서 말하는 ‘善人’이란 ‘배우지 않아도 본바탕이 착한 사람’을 의미한다. 결국 ‘착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은가? 당신의 의문이 맞는지 ‘善人’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 더 부연해본다. 고문에서 ‘善人’은, 그 바탕은 훌륭하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을 강조할 때 사용된다. 

그런 사람들은 기본은 본래 타고난 천성으로 갖춰져 있기 때문에 선인(先人)들이 이뤄놓은 발자취나 학문,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배우지 않아도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더 나아가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해가 될만한 나쁜 짓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눈치챘겠지만, 그러한 이유로 인해 ‘善人’은 태생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더 높은 경지, 즉, 성인의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고문에서 말하는 ‘善人’은 그저 착한 사람이 아니라 천성은 타고난 착한 사람이라 나쁜 짓을 하지는 않지만 백지상태이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한다는 한계까지 포함하는 단어이다.


‘善人’에 대한 언급은 뒤에 배울 ‘자로(子路) 편’ 11장에서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그 단어의 뜻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공자의 언급을 통해서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그 내용은 뒤에 배울 때 다시 상술하기로 한다.


子張이 바로 이 ‘善人의 道’를 묻자, 孔子는 이렇게 답한다.


“聖人의 자취를 밟지 않더라도 〈악한 일을 하지 않으나〉 또한 방(聖人의 경지)까지는 들어가지 못한다.”


이 대답은 앞서 설명한 ‘善人’이 어떤 의미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답변이다. 이 장의 해석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의 논란이 좀 있는데, 원문에 내가 해석한 것처럼 괄호에 해석을 넣어 ‘성현의 자취를 밟지는 않았지만’으로 해석을 하는 방식이 있고, 또 다른 일설에는, ‘성현의 자취를 밟지 않고서는 실내(室內)에 들어갈 수 없다.’로 해석하여 반드시 배워야 함을 강조하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실 작은 해설의 차이이고 큰 맥락에서는 차이를 갖지 않기 때문에 나는 대비되는 의미를 부각하는 첫 번째 해석을 택하였다. 나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한 정자(伊川(이천))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을 해설한다.


“踐迹(천적)은 길을 따르고 바퀴 자국을 지킨다는 말과 같다. 선인(善人)은 비록 굳이 옛 자취를 밟지 않더라도 저절로 악한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성인의 방(경지)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참고로 성인의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앞서 14장에서 배웠던 배움의 단계를 당(堂) 아래에서부터 당(堂) 위로 올라오고 또 방안(室內)에 들어가는 성인의 경지로 구분했던 그 방식의 비유를 일상용어처럼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이 갖는 의미는 공자의 다른 발언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복잡다단한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한번 생각해보라. 천성이 타고난 선량한 사람이 있나? 공자가 성선설을 인정했던 것은 사람이 태어나는 그 순간만큼은 때 묻지 않은 착한 본성을 타고난다는 것이지, 세상을 살면서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선량함이 유지된다고 본 것은 아니다.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성인(成人)이 된 선인(善人)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이 전제에 반드시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천성을 보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선인(善人)은 배우지 않고도 사욕(私慾)에 좌우되어 악행을 벌이지 않는다는 전제를 공자의 대답은 깔고 시작한다. 다시 말해, 자세히 보면, 그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배워야 한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역설한 것이라고 볼 여지도 다분한 말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고, 문자 그대로의 뜻을 의미하고 넘어가더라도 그런 선인(善人)이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지적한다. 배우지 않는 만큼 그 발전에 태생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서 성인(聖人)의 경지에까지는 이를 수는 없다는 의미로 다시금 배우고 수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강조한다.


그 의미를 명확하게 배우는 자들이 새기게 하기 위해 장자(張子)가 다음과 같이 이 장을 정리한다.


“善人(선인)은 仁(인)을 하려고 하였으나 학문에는 뜻을 두지 않은 자이다. 仁(인)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비록 이루어놓은 법을 밟지 않더라도 惡(악)을 따르지 않는 것이요, 〈善(선)을〉 자기 몸에 소유하였으나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말미암아 聖人(성인)의 방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자아, 이제 오늘의 가르침을 설명하기 전에 내가 풀었던 떡밥을 회수할 시간이다.


<논어>를 매일같이 한 장씩 공부한 지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느꼈겠지만, 고문이 어려운 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원문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는 언어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특히 고문을 사용하는 동양고전은 인문학의 최고 정점으로 여겨지는 이유가 있다. 


그야말로 문사철(文史哲; 문학+역사+철학)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학문의 통섭(統攝;consilience)을 보여주는 분야에 다름 아니다.


‘통섭’을 마치 <사회생물학 : 새로운 종합(Sociobiology : The New Synthesis)>(1975)의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이 처음 제창한 것인 양 이해하고 소개하고 그것으로 한국에서 먹고살았던 모 교수까지 보다 보면, 그들의 동양고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일천한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이제까지 공부했던 것처럼 <논어> 한 권을 공부하는 데에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역사)을 명확하게 알아야 하고, 그 사람의 출신이나 그 사람의 교유관계 및 그가 추구했던 사상에 대한 지향점(철학)을 알아야만 하며, 그들이 저술했거나 그 사건 혹은 그 상황에 대해서 창작된 문학작품(문학)들을 통해 그 모든 것을 파악해야만 한다.


결국은 사람에 대한 공부인지라 사람의 본성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하는 내용(철학)을 단계별로 배우고 익히지 않을 수 없고, 간단한 나이 차이나 연대를 계산하는 것(수학)에서부터 시작하여 당시 나라의 군대수나 경제상황(경제학)을 파악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이 별도로 분리되기 이전의 진정한 통섭이 가능해야 이 공부가 가능하기에 이 공부가 할수록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문 공부가 더 어려운 것은 ‘전고(典故)’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배운 이 장에서 배운 ‘선인(善人)’의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이전의 내용이 어떤 책에서 어떻게 언급되었는지를 기억하는 것은 이 공부에서 기본 중에 기본이다. 그뿐인가? 성현의 경지를 승당입실(升堂入室)로 구분하는 내용 역시 앞서 배운 내용으로 기본 데이터에 탑재되어 있어야만 한다.


당신이 초능력이라고 생각하며 감탄하는, ‘이 내용은 <논어>의 어느 편의 몇 장에 나오는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따위는 초능력이 아니라 수년간의 반복된 공부와 복습을 통해 기본 데이터 베이스에 탑재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아직 <논어> 한 권도 떼지 못했는데, 이것이 고문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사서오경(四書五經)으로 확장되기 시작하면, 어떤 책에서 어떤 내용들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기억하는 것은 정말로 초능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옛사람(先人)들에게는 기본 교양이고 그것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필사는 지금 당신들이 하는 적당히 한번 받아쓰기나 해보고 마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적고 또 적어서 그것을 머릿속에 각인시켜 외우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오늘 당신에게 설명하고자 하는 취지는, 이렇게 어려운 공부이니 뜨악하고 겁먹고 엄두도 내지 말라는 협박을 하기 위함이 아니며, 이 대단한 공부를 이 정도 성취하기까지 얼마나 피나는 각고의 노력이 있었는지 아냐고 잘난 척을 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비록 고문은 고사하고 한자공부도 부족하여 한글로 된 글을 읽는다고 하더라도(사실 그런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만도 대단한 일이라고 칭찬할만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더더욱) 당신의 공부는 결국 당신이 찬찬히 하나씩 어렵고 힘들더라도 곰곰이 생각하고 잘못된 것은 없는지 비판적으로 읽어가며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할아버지가 기업을 세웠고, 아버지가 그 돈으로 적당히 스포츠카를 타고 놀러 다니며 여자들을 후리고 다니긴 하였으나 그래도 명색이 기업을 물려받은 재벌 2세라고 하여, 태어나자마자 재벌 3세인 이들에게, 몇 십만 원의 값어치가 하루하루 자신이 피땀 흘려 번 돈을 손에 쥔 사람보다 더 값지겠는가?


천성이 아무리 선하게 태어나도 그가 말을 배우고 세상을 알아갈 즈음, 그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의 이치를 알아간다는 이유로 더러운 현실에 적응을 해 나아가고 그것을 ‘현실을 알아간다’라는 미사여구로 변명한다. 


사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정규 교육만 받은 자들도 도덕 시간을 통해 충분히 배웠다. 하지만 그들은 교과서와 세상은 다르다며 그렇게 살려는 사람들은 ‘이상주의자’라고 욕하고 비웃는다.

세상을 교과서처럼 살려고 하는 이상주의자’라는 비아냥을 들어가며 사는 내가 말한다.


당신이, 당신의 자식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면 그것을 인생이라고, 현실은 그런 거라며, 너도 그렇게 때 묻히고 살라고 가르치지 마라.


제대로 배우고 그렇게 배운 것을 올바른 것을 위해 실천하는 데 사용하라고 가르칠 수 없다면 어디 가서 당신이 무엇을 배웠답시고 함부로 깝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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