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Jun 21. 2022

군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위에 있는 자가 판단만 제대로 해도 반은 바로 선다.

子曰: “論篤是與, 君子者乎, 色莊者乎?”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言論이 독실한 사람을 허여한다면 〈이 사람은〉 君子인 자인가? 얼굴만 莊嚴한 자인가?”

이 장은 언변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에 대한 공자의 경험이 담겨 있는 준엄한 경고에 해당한다. 사실 ‘공야장(公冶長) 편’ 9장에서 재여가 학당에서 버젓이 낮잠을 자다가 스승에게 혼쭐이 나는 장면에서도 같은 내용의 지적이 나온 바 있다.


실제로 <중니제자열전>에 보면, 공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자신의 경험과 실수에 대해서 큰 깨달음을 얻은 고백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말 잘하는 것으로 사람을 골랐다가 재여(宰予)에게 실수하였고, 생김새만을 보고 사람을 가리다가 자우(子羽; 담대멸명(澹臺滅明)의 자(字))에게 실수하였다.”


앞에 ‘옹야(雍也) 편’ 14장에서 공부하면서 담대멸명(澹臺滅明)의 일화에 대해서는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 담대멸명(澹臺滅明)은 외모가 굉장히 못생겼던 인물로 공자는 그가 가르침을 청하러 왔을 때 외모만을 보고 그가 재능이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대한 바 있었다. 

담대멸명

겨우 공자의 제자가 되었지만 용모가 못 생겼다는 이유로 스승에게 중시되지 못하자 물러나 홀로 수행하여 제후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져 제자가 삼백 명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이후에 그의 진면모를 알게 된 공자는 용모로 사람을 판단했다가 자우를 잃었다고 한탄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한편,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는 그와 같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기도 한다.


“자우는 군자다운 얼굴을 가졌으나 행실은 그 얼굴과 같지 않으며, 재아는 우아한 언변은 있으나 지혜는 그 언변과 같지 않았다. (중략) 그러므로 얼굴만 보고 사람을 쓰게 되면 자우같은 사람에게 속기 쉬우며, 언변만 보고 사람을 쓰게 되면 재아 같은 사람에게 속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인 공자마저도 언변과 외모에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 경험이 있고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의 잘못된 편견을 바로잡았고, 이후 말만 잘하는 이들에 대한 경계를 수시로 강조했음을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장은 근엄하게 자신은 그러지 않으니 군자라고 멋있는 척하는 공자가 아니라 자신이 그런 실수를 했었던 ‘사람’이었던 입장에서 진솔하게 제자와 배우는 이들에게 가르침을 전해주는 공자의 솔직함이 깊숙이 묻어난다.


앞에서 공부한 ‘학이(學而) 편’ 3장에서도 그렇고 뒤에 나올 25장에서도 공자는 말만 잘하는 사람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기본적으로 상당하게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주자가 이 장에 대해서 주자가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주석을 먼저 살펴보자.


다만 그 언론이 독실하다고 하여 그를 허여 한다면 군자인 자인가, 얼굴만 장엄한 자인가 알지 못하겠다고 말씀한 것이다. 이는 말과 외모로 사람을 취해서는 안 됨을 말씀한 것이다.


조금 색다른 해설이긴 하지만, 위의 내가 해석한 방식과는 달리, 하안(何晏)은, 앞의 장에서 살펴보았던 자장(子張)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붙여보아, 세 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나누어 논독자(論篤者)를 ‘입으로 말을 가려 꾸밈이 없는 독실한 자’로 해석하고, 군자(君子)를 ‘몸에 비천한 행동이 배어 있지 않은 사람’으로 해석하며, 색장자(色莊者)를 ‘악을 행하지 않고 근엄하며 소인을 멀리하는 자’라고 해석하여 이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모두 선인(善人)이 될 수 있다고 대답한 것으로 풀었는데, 다소 견강부회한 어색함이 강하게 느껴져 참고로만 소개한다.

재여

사람을 겉보기나 화려한 언변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그렇게 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서 지적되어왔으면서도 여전히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는 인간의 어리석은 실수 중 하나이다. 당장 눈에 보기에 근사해 보이고 언변이 좋은 사람에게 혹해서 그 사람을 신뢰하고 마음을 주고, 함께 사업을 하거나 돈을 맡기고, 사기를 당하거나 배신을 당하고 울고 불며 땅을 치고 후회하는 일은 일반인들에게도 수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속담에 이르지 않던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다’고.


그런데 이 장에서도 그렇고 공자가 가리키는 내용이 단순히 그런 사람들을 함부로 믿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고 간략하게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은 공자의 깊이 있는 가르침을 10분의 1도 채 담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늘 공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첫 번째 메시지는 상대를 주의하라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들일 경계해야 할 뜻을 먼저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런 자들을 경계하고 믿지 말라는 메시지에 앞서, 그런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 먼저인 것이 공자의 논법이다. 그래서 이 장은 당신이 지금까지 대충 읽어왔던 방식으로 이해할 만큼 단순하고 쉬운 내용이 아닌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문장의 시작을 ‘言論이 독실한 사람을 허여 한다면’이라는 가정으로 삼은 것이 바로 그 심오한 입장의 차이를 보여준다. ‘독실하다’는 사실 나쁜 의미가 아니다. 그렇게 노력하고 그렇게 보이려고 하는 자를 나쁘다고 탓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허여(인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결국 그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자가 지적하고자 한 부분은 현대 해설서에서 해설하는 것처럼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현대식 판단이 아니다.

재여

먼저 강조점은 ‘언론(言論)‘만’ 독실해서는 안된다.’에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언론만 독실하던가? 배우지 않은 자는 있어 보이게 떠들려고 해도 밑천이 없다. 조금이라도 뭔가 배우고 공부한 척하는 자가 주워들은 것들로 이른바 썰을 풀어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여기서 경계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배우지 못한 소시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칭 공부를 좀 했다고 설치는 존재들에 대한 일침을 전제로 한 것이다.


두 번째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렇게 말만 익숙한 자를 비난하는 쪽에 방점을 두고 있지 않고, 그것을 판단하는 이들에게 더 큰 책임을 지우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당시 사회적 풍토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누가 배웠다고 자칭 있는 척을 하며 언변을 늘어놓는가? 


벼슬이라도 한 자리 얻고 싶어 하는 배웠다고 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허여(인정)하는 자는 누구인가? 맞다. 그들을 등용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위정자이다.


자아, 이렇게 세부적으로 공자의 워딩을 해체하여 꼼꼼하게 살펴보니, 기존 현대 해설서에서 적당히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되네 어쩌네 하는 해석이 왜 얼토당토않은 헛소리인지 차이점이 보이나? 사람뿐만 아니라 똑같은 수천 년 전에 한 성인의 말도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원문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고 해설만 읽는 이들을 현혹시켜 곡학아세(曲學阿世)하기에는 충분하다는 의미이다.


전제만 살펴보았으니, 이제 뒤의 말도 자세히 살펴보자. 언론이 독실한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을 허여 해주면, ‘(그 사람이) 君子인 자인가? 얼굴만 그럴듯하게 꾸민 자인가?’라며 묻는다. 물론 그냥 묻는 질문이 아니다. 엄청난 무게의 비난이고 지적이며 한탄이다

당대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라. 진정한 군자라고 세상이 인정하고 존숭 하는 공자 자신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정작 위정자들에게 등용되지 못했다. 그런데 천하를 주유하며 보니 말만 익숙하여 군주를 현혹시키는 자들이 어설픈 공부와 내공을 가지고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욕을 채워나가는 꼴을 공자는 목도하였다. 


왜 세상이 이렇게 잘못되어 가는지 어디서부터 문제가 있어 그렇게 되었는지를 한탄하던 공자는 세상에 직접 나와 다양한 나라의 군주와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자칭 배운 자들이라는 이들을 한 명 한 명 확인하면서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현실에 한탄해야만 했다.


그 상황에서 이 장의 한탄은 단순한 한탄이 아니다. 근원적인 문제는 결국 그 가식적인 이들을 등용하고 그들에게 군자라고 허여 해준 판단을 잘못한 위정자들에게 있다는 지적이 담겨 있다. 그것이 일차적으로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하는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언변으로 마치 군자 행색을 하는 이들에게는 문제가 없단 말인가? 그럴 리 없다. 그래서 공자는 군자인가의 뒤에 겉모습만 그렇게 꾸미는 자인가?라고 그 말을 들은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속이 뜨끔할만한 속내를 후벼 파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사실 이 장에서 공자가 던지는 다각적인 형태의 메시지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그 마지막에 도대체 언변으로 자신을 꾸미는 자들이 무엇을 바라고 그런 행태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에 대해 왜 의미심장하다는 해설을 붙이는지 이해가 간다면 당신은 이제 중급자 근처에는 와닿은 셈이다. 바로 그 메시지의 진위가 배우는 자들이 진리를 향해야 할 바른 자세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 제자들의 특성을 누구보다 빠르게 깊이 있게 파악하여 그 제자에 맞춤 교육을 하는 것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스승 공자는 그 다양한 제자들을 통해, 배우는 이들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그들에게 엄격하였고, 이 장과 연관이 있어 언급했던 ‘공야장(公冶長) 편’ 9장에서 학당에서 낮잠 잔 것으로 혼쭐이 나며 그간 말만 익숙한 이로 매도(?) 당했던 재여 역시 언변이 상대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에 더 큰 지적을 받고 더 많이 혼이 났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공자가 강조했던 것이 학문이었다는 점에는 아무도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시했던 것이, 그렇게 배운 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는 방점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내가 새벽마다 <논어>의 한 장씩을 풀어가며 공부하는 내내 강조했던 것이 그 방점에 있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함께 공부해온 학도라면, 그리고 내가 글을 왜 쓰는지에 대해서 읽고 이해한 학도라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따르지는 못할지언정, 이해는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장의 가르침은 실제로 원문에 그런 내용이 하나도 없는데, ‘궁극적인 실천’을 강조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얄팍한 지식을 몇 줄 머릿속에 담고 아는 척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이들이 더 많이 아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배우고 익히고 그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하는 매국노로 일컬어지는 자들 역시 그들이 살기 위해 그런 것이라는 구차한 변명을 내놓으며 절규하였다.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나라가 이렇게 독립할 줄 몰랐지!’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더 득이 되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공자는 늘 가르쳐왔다. 선택의 기준이 사욕이어서는 언제고 그 끝이 안 좋을 것이라고. 

그래서 끊임없이 가르치고 경계하도록 일깨워주었다. 언제나 선택의 기준은 올바름을 따라야만 한다고. 그 올바른 가치관을 세우고 따르기 위해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조국 사태가 났을 때, 몇몇 언변만 뛰어난 자들이 얼른 이 장을 가져다가 조국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집안도 좋고, 출중한 외모에 서울대 출신으로 모대 법대 교수까지 했던 사람이 도덕적인 심각한 모럴해저드를 보인 사건이라고 꽹과리를 치고 북을 치며 그를 성토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이전에 최순실의 딸에게 SNS를 통해 퍼부었던 비난들은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날아와 비수로 꽂혔다.

주워들은 아주 약간의 지식만으로도 누구나 번드르르하게 말하고, 있어 보이는 척 굴 수는 있다. 결코 배움이 짧지 않았던 독립투사들이 행동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던진 것은 있어 보이고 싶어서나, 자손을 독립유공자로 남기기 위함이 아니었단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리 착해도 배우지 않고 행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