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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22. 2022

너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조절해주는 참스승을 보라

옳은 것을 듣고서도 행하지 않는 자들에게 고함

子路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冉有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公西華曰: “由也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求也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赤也惑, 敢問.” 子曰: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子路가 “〈옳은 것을〉 들으면 곧 행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자, 孔子께서 “父兄이 계시니, 어떻게 들으면 곧 행할 수 있겠는가.” 하고 대답하셨다. 冉有가 “〈옳은 것을〉 들으면 곧 행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자, 孔子께서 “들으면 곧 행하여야 한다.” 하고 대답하셨다. 公西華가 물었다. “由(子路)가 ‘들으면 곧 행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자, 선생께서 ‘父兄이 계시다.’ 하셨고, 求(冉有)가 ‘들으면 곧 행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자, 선생께서 ‘들으면 곧 행하여야 한다.’ 고 대답하시니, 저는 의혹이 들어 감히 묻습니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求는 물러나므로 나아가게 한 것이요, 由는 보통사람보다 나으므로 물러가게 한 것이다.”

이 장은 대화가 꽤 길지만, 그리 어려운 내용을 이야기에 해당하는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나누는 것은 아니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사용하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 방식, 이른바 방편설법(方便說法)이라 불리는 눈높이 교육을 직접 공자의 입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 방식이다.


제자들이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제자들의 성향을 알고 있으면 공자가 스승으로서 왜 방편설법을 사용하였고 그것이 얼마나 적확한 의도와 효과를 거두고 있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질문의 핵심은 역시 ‘실천’이다. 올바른 것을 배우면 바로 행해야 하느냐는 의문을 다혈질의 단순과격한 자로(子路)가 먼저 스승에게 묻는다.


그러자 스승은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럴 수 없으니 함부로 과단성있는 실천을 바로 행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완급을 조절하라고 한다. 왜 갑자기 부모님의 이야기가 나오는지에 대해 현대인들이라면 조금 의아해하할 수 있는 설명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상술하기로 하자.


그런데 똑같은 질문을 이번엔 염유(冉有)가 스승에게 한다. 그러자, 똑같은 질문이었음에도 스승의 대답은 달라진다. 공자는 염유(冉有)에게는 바로 실행해야한다고 가르친다.

염구

그러자, 그 두 질의응답을 모두 관찰하고 있던 공서화(公西華)가 당신과 똑같은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한다. 도대체 왜 똑같은 질문에 대해서 다른 답변을 해주는 것인지를 물은 것이다. 그러자 공자의 대답이 간략 명료하다.


“求는 물러나려 하므로 나아가게 한 것이요, 由는 보통사람보다 더 나으니 물러가게 한 것이다.”


여기서 자로(子路)를 평가함에 있어 ‘兼人’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 주자는, 주석을 통해, ‘보통사람보다 더 낫다’고 평가한 표현이라는 주석을 달고 다른 해설을 붙이지 않는다.


사실 조금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다른 사람보다 낫다느 설명보다는 ‘남의 몫까지 아울러 실행한다’는 말로 지나치게 적극적인 면을 두고 한 말로 칭찬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배우는 자들이 의아해하며 혼란스러워할 것을 염려한 장경부(張栻(장식))가 다음과 같이 이 장의 내용을 상세히 해설해 준다.


“의를 들으면 진실로 마땅히 용감하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부형이 계시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 만약 〈부형의〉 명령을 받지 않고 행한다면 도리어 의를 해치게 된다. 자로(子路)는 들음이 있고(좋은 말을 듣고) 아직 그것을 행하지 못했으면 행여 다른 말을 들을까 두려워하였으니, 그렇다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있어 행하지 못함을 근심할 것이 없고, 다만 행하려는 뜻이 혹 지나쳐서 마땅히 명령을 받아야 할 것에 빠뜨림이 있을까 근심될 뿐이다. 염구의 資稟(자품)으로 말하면 나약함에 결함이 있으니, 부형의 명령을 받지 않음을 근심할 것이 없고, 마땅히 행해야 할 일에 있어 머뭇거리고 위축되어 하기를 용감하게 하지 못할까 근심될 뿐이다. 성인이 한 사람은 나아가게 하시고 한 사람은 물러나게 하셨으니, 의리의 중도에 묶어서 그들로 하여금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병통이 없게 하신 것이다.”

앞서 설명하기로 했던, 왜 올바른 것을 실천하는데 있어 부모님을 생각하라고 했는가에 대한 의문부터 이 주석에서는 풀어준다. 올바른 것을 행하는 것이 단순한 말뿐이 아님을,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임을 이 장에서는 강조한다.


즉, 목숨을 걸 수도 있는 일이 올바른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이라면 당연히 부모님에게 허락을 구해야하는 것이 예(禮)이고 효(孝)였다.


왜 올바른 것을 실천하는데 있어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그 실천의 무게는 당시 시대가 그만큼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며, 실제 당시 세태가 잘못 올바름을 주장하거나 바로잡기 위한다고 나섰다가는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해코지를 당할 충분한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해하면, 이제 왜 자로가 그 질문을 했을 때 공자가 브레이크를 걸었는지, 그리고 장경부가 위의 주석을 통해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자로는 스승의 가르침을 한 가지 배우면 그것을 몸소 실천하지 못하면 다음 배울 것을 듣는 것에 대해 주저할 정도로 우직하고 단순했으며 무식하게 저돌적이었다. 옳다고 생각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돌진하였기 때문에, 스승인 공자는 늘 그의 과단성을 걱정하였다.


그런 제자의 천성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왜 제자가 그런 질문을 하는지도 당연히 파악하였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듣고 뭔가 감이 왔다면 당신은 이제 중급자의 수준에 들어갈 준비를 해도 될 것이다.


맞다. 이 장은 마치 하나의 개념을 가지고 질문하는 듯 하지만, 대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방편설법이 출발하는 시작점이 바로 그 의문을 가진 제자가 왜 그 질문을 하는가에 대한 것을 파악하는 것에 있음을 보여준다.


 장경부의 주석에도 그렇고 우리가 이제까지의 공부를 통해 파악한 자로(子路)의 성향은 무조건적으로 믿고 따르는 스승의 가르침의 종착점이 ‘실천’에 있음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로(子路)의 질문은 그저 모르는 것을 확인하고자 함이 아니라 지금 그 말을 듣고 바로 뛰쳐나갈 기세로 확인하는 최종체크같은 느낌의 질문이다. 그러니 스승인 공자는 자신의 대답이 자로에게 얼마나 큰 도화선에 불을 당기는 일인지 충분히 인지하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염구의 경우는 또 정반대였다. 왜 염구가 똑같은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서까지는 설명이 나와 있지 않지만, 같은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염구가 물었던 의도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이 장을 공부하는 이들 중에서 중급자 이상이라면 파악하고 있었어야 한다.


즉, 이 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똑같은 질문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 같은 질문이지만 다른 생각과 다른 의도를 가지고 스승에게 물었던 것을 공서화가 우연히 모두 보았기에 그 차이를 물은 것뿐이라는 점을 잘 파악해야만 한다.


염구의 질문은 자로의 그것과 다르게 자신이 그것을 함부로(?) 행해도 될런지에 대해 물은 것이다. 즉, 조심스럽고 나약해서 자신이 옳다고 배운 것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하고 그것을 밀어붙이는 것이 어려운데 그래도 실천을 해야하는냐고 물은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그의 성향과 그가 왜 그렇게 묻는지를 파악한 스승이었기에 과감하게 그렇게 실천하라고 말한 것이다. 도대체 염구가 어느 정도로 심약한 스타일이었기에 그렇게까지 과감함을 강조했는지 의문을 갖는 이들이 없길 바란다.

염유

실제 우리는 앞서 ‘雍也(옹야)편’에서 염유가 “저는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부족합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힘이 부족한 자는 중도에 쓰러져야 그만두는 법이다. 지금 너는 선을 긋고 있다(今汝畵)”고 꾸짖는 장면을 확인한 바 있기 때문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100에 도착해야하는데, 한번 뛰어나가면 50씩 가는 다혈질의 제자가 80즈음에서 뛰어나가도 되냐고 물으면 뛰어나가려는 제자의 옷깃을 지긋이 잡으며 차분해지라고 조절해주는 것이 진정한 스승이며, 반대로 최대한 등을 떠밀어도 10씩 가는 제자라면 과감하게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뛰어나가라고 등을 밀어줄 수 있어야만 제대로 제자들을 파악한 스승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스승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책에 나온 지식을 입에 달고 읽어주기만 하고 전달하는 지식장사꾼이 해서도 안될 것이지만, 자칫 나이가 어리고 상처받기 쉬운, 혹은 누가 이끌어주는가에 따라 완전히 자아를 형성하는 시기의 젊은이들에게는 더더욱 그 스승의 자격은 엄중해질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직업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본적인 자질조차 갖추지 못한 자들이 그저 자신의 밥벌이나 뒷돈챙기는 직업으로 여기는 풍토가 만연해가는 것도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한편, 이 장에서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세 제자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갖고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할 숨은 예법에 대한 가르침도 담고 있다. 뜬금없이 여기 어디에 예법이 나오냐고 의아하게 여길 이도 있을 법하다.


먼저, 세 사람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확인해보자. 자로는 공자보다 9살이 어렸고, 염유는 29살이 어렸으며 공서화는 무려 42살이나 어린 제자였다. 이 정보만 들어도 감이 와야하는데 그래도 모르겠다면 조금 더 설명을 들어가보자.

공서화

이 장의 기록은 공서화가 서른살도 안된 나이일 당시에 이루어진 대화이다. 참고로 이 세 인물은 우연히도(?) ‘공야장(公冶長)편’ 7장에서 나란히 등장하여 스승 공자의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더불어 공서화라는 인물은 예법을 중시했던 스승 공자에게서 예의범절에 바른 제자라고 인정을 받았던 신성 제자이기도 하였다.


원문을 자세히 보라. 공서화가 스승 공자에게 한참 위의 선배 두 명을 지칭하며 사용하는 용어가 그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예의범절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대화의 대상이 극존칭해야할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렵다는 이른바 ‘압존법(壓尊法)’을 그가 구사한 것이다. 압존법이 일본어에서 왔다던지 한국어에만 있는 독특한 방식이라 어려워서 없애버렸다던지 하는 무식한 소리는 <논어>의 바로 이 장을 공부하지 않은 자들이 멋대로 떠들어대는 것이니 안들은 것으로 무시해도 그만이겠다.



얘기를 꺼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인물이 교육부장관 후보자에 지명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처음 새 정부가 열리면서 하도 흠집이 많은 인물을 지명하여 쫓겨나듯 낙마 1호가 되어 사퇴의 변을 읽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새로 여자후보로 지명하였는데 이젠 첩첩산중에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


일반인들에게는 어차피 장관후보자라는 사람들이 무슨 전문성을 갖겠는가 싶을 정도로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의 장관후보자들은 그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자들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부장관 후보자에 대해서는 특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교육부라는 곳이 갖는 무게때문이기도 하다. 새정부가 시작되며 지명된 후보자가 대학 총장입네 하면서 법인카드를 알뜰살뜰하게 사용한 민낯이 드러나질 않나 그렇게 일반 학생들이 따기 어렵다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알뜰살뜰하게 대를 이어 자녀에게까지 수혜하게 만든 전력까지 다 까발려진 것도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는데, 이번엔 사이즈자체가 달라졌다.


새로 지명된 그녀는 가장 먼저 뜬금없는 ‘만취’ 음주운전으로 언론을 달구기 시작했다. 먼저 말해두자면 나는 남녀차별주의자다.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고 아름다운 존재이기에 그게 갖춘 품격을 더 갖춰야 한다고 여기는 차별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내가 사용하는 ‘여자가~’라는 단어는 앞에 ‘감히’가 생략된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답고 훌륭한’이 생략된 것이다.


그런데, 음주운전적발당시 혈중알코올 농도가 0.251%였다는 만취사실만으로도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음주운전 경력이 있는 자들은 교장, 교감도 못 해먹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의 케이스는 그저 단순히, 만취음주운전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빙산의 일각은 아주 살짝 그 끄트머리를 쥐어 올렸을 뿐인데도, 언제나 지저분하고 너저분한 곳에서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법비’들의 구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2001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지만, 만취 음주운전에 약식기소로 벌금형을 받은 그녀가 당당하게(?) 정식 재판을 청구한 것이었다. 사건 당시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도로교통법에 의거하면 음주운전의 형량은 2년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이다.


당연히 인사불성 수준의 만취상태는 그 맥시멈에 준해야 맞는데, 정식 재판을 통해 그녀는 선고유예라는 법조인들마저 이해할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아낸다. 이것은 상당한 능력을 갖춘 법비들을 돈을 바르지 않는 이상은 얻어낼 수 없는 결과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말이 너무 많아지니 다음으로 미루지만, 그녀를 후보로 내정한 검사출신임을 강조하는 대통령이 '그 당시의 상황과 사정을 다 봐야한다'고 말하는 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지 대략 난감하다.


이 장과 관련하여 한 가지 당신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올바른 것을 듣고서 바로 실천하지는 못할지언정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뭉개는 자들이 승승장구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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