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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29. 2022

仁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왜 인(仁)을 설명하는데 예(禮)가 필수개념으로 등장할까?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顔淵이 仁을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의 私慾을 이겨 禮에 돌아감이 仁을 하는 것이니, 하루라도 私慾을 이겨 禮에 돌아가면 天下가 仁을 허여한다. 仁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 남에게 달려 있겠는가.” 顔淵이 “그 條目을 묻습니다.” 하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 禮가 아니면 듣지 말며, 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禮가 아니면 動하지 말아야 한다.” 顔淵이 말하였다. “제(回)가 비록 不敏하나 청컨대 이 말씀에 종사하겠습니다.”     

편명은 안연(顏淵)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안연(顏淵)편’이라고 부르지만, <논어>에서 실제로 안연이 등장하는 장은 총 21회나 되지만 정작 이름이 달린 이 편에서는 이 장이 유일하다. 바로 앞에서 배웠던 ‘선진(先進)편’에서 그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워낙 공자가 언급을 많이 했기 때문에 마치 많이 등장한 것 같은 느낌이지만 정작 실제로 일화에 등장하여 자신의 입으로 뭔가 말을 전하는 장면은 이 장이 유일무이하다.   

  

안연이 몇 번을 등장하든지간에 뭐가 중요하냐고 묻는 사람은 <논어>를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이제까지의 공부를 껍데기만 한 것이니 다시 1편의 1장으로 돌아가 공부할 것을 권한다. 안연이 공자에게 갖는 심리적 비중도 비중이지만, 공자가 <논어>를 편찬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편집을 담당했던 제자들의 입장에서 ‘그’ 안연이 단 한번 등장하면서 도대체 무슨 질문을 던졌고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가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을 짐작한다면 이 장이 갖는 의미나 왜 이 장에서 언급된 내용들이 후세에 그렇게 유명하게 회자되고 있는지에 대해 충분히 깨닫게 된다.     


안연은 공자의 수행개념중 핵심이 되는 仁에 대해 물었고, 그가 왜 그것을 묻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기뻐하는 공자는 그의 수준에 맞는 핵심 개념을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해준다. 그것이 고문을 모르지만 윤리책에서 그렇게 공부하고 외웠던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개념이다.  

   

공자의 핵심 개념 ‘인(仁)’이 등장하였으니 공자의 주옥과도 같은 대답에 대해 주자를 필두로한 많은 학자들이 이 부분에 대해 상세한 해설과 자신만의 이해를 주석으로 남기고 있다.     


‘仁(인)’은 本心(본심)의 온전한 덕이다. ‘克(극)’은 이김이요, ‘己(기)’는 一身(일신)의 私慾(사욕)을 이른다. ‘復(복)’은 돌아감이요, ‘禮(예)’는 天理(천리)의 節文(절문)이다. ‘爲仁(위인)’은 그 마음의 德(덕)을 온전히 하는 것이다. 마음의 온전한 덕은 천리 아님이 없으나 또한 인욕에 파괴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仁(인)을 하는 자가 반드시 사욕을 이겨 禮(예)에 돌아가면 일마다 모두 천리여서 본심의 덕이 다시 내 몸에 온전하게 된다. ‘歸(귀)’는 許(허, 허여함)와 같다. 또 하루라도 사욕을 이겨 禮(예)에 돌아가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 仁(인)을 허여한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효과가 매우 빠르고 지극히 큼을 極言(극언)한 것이다. 또 仁(인)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 타인이 간여할 바가 아님을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또 그 기틀이 나에게 있어서 어려움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날마다 사욕을 이겨서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면 사욕이 깨끗이 다하고(없어지고) 천리가 유행하여 仁(인)을 이루 다 쓸 수가 없을 것이다.     


주자도 주석에서 강조하고 있지만, 원문에서 공자가 강조한 부분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바로 극기복례의 진정한 개념이고, 둘째는 그것을 강조하며 ‘단 하루라도 私慾을 이겨 禮에 돌아가면 天下가 仁을 허여한다.’ 여기서 방점은 사실 ‘단 하루’에 있다. 왜냐하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365일중에 364일은 그렇지 못하고 단 하루만 극기복례하여도 천하가 인정한다는 개념을 이해하는 듯 하는 듯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단 하루’의 의미는 단지 강조가 아니라 인(仁)이라는 것이 단 하루만 쏙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는 개념이 아님을 경험하고 노력하여 인지한 자만이 이해할 수있도록 안배하는 눈높이 문장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그것을 익히고 행하는 것이 자기주동적이어야만 한다고 강조한 부분이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그러하겠으나 특히나 仁을 실천하고 수행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여, 결코 타인에게 배우거나 등을 떠밀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음을 확실하게 못박는다.     


그래서 그 개념을 막연하게 여기고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하는 이들을 위해 정자(伊川(이천))가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     


“禮(예)가 아닌 곳(부분)이 바로 私意(사의)이니, 이미 사의라면 어떻게 仁(인)일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자신의 사의를 이겨 다해서 모두 禮(예)에 돌아가야 비로소 仁(인)이 될 수 있다.” 또 말씀하였다. “克己復禮(극기복례)를 하면 일마다 모두 仁(인)해진다. 그러므로 천하가 仁(인)을 허여한다고 말씀한 것이다.”     

 

두 번째 주석에서 강조하며 극기복례를 하는 것만으로도 일마다 인해진다는 설명을 통해 하루만 인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바로 지속적인 인의 실천임을 재차 설명하고 있다.     


사씨(謝良佐(사양좌))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극기(克己)는 모름지기 자신의 성질이 편벽되어 극복하기 어려운 곳으로부터 이겨 나가야 한다.”     


그런데 사씨의 그 질문은 이미 안연이 원문에서 실천으로 보여준다. 대부분 공자의 설명을 듣고 연계되는 후속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없다. 명확히 구분하자면 아래 주석에서 설명에 후술하겠지만, 이것은 스승의 질문을 듣고나서 생기는 후속질문이 아닌 그 말을 모두 이해한 자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을 묻는 것이다. 즉, 앞의 형이상학적인 개론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물을 수 없는 형이하학적인 질문인 것이다.

     

그렇게 안연은 바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해 조목(條目)을 묻는다. 별것 아닌 것같지만 이것인 다른 제자들과 안연이 구분되는 격의 차이이고 스승 공자가 인정했던 부분이다. 그래서 그 유명한, ‘인(仁)을 어떻게 구현하는지에 대해 물었더니 예(禮)로 답하더라.’가 나온다.     


“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 禮가 아니면 듣지 말며, 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禮가 아니면 動하지 말아야 한다.”      

공자의 이 대답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을 붙인다.     


‘目(목)’은 條目(조목)과 일이다. 안연이 夫子(부자)의 말씀을 들으니, 천리와 인욕의 사이에 있어 이미 판연히 분별되었다. 그러므로 다시 의문하는 바가 있지 않고 곧바로 그 조목을 청한 것이다. ‘非禮(비례)’란 자신의 사욕이다. ‘勿(물)’은 금지하는 말이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주장이 되어서 사욕을 이겨 禮(예)에 돌아가는 바의 기틀이다. 사욕이 이겨지면 動容(동용)하고 周旋(주선)함이 예에 맞지 않음이 없어서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천리의 유행 아님이 없을 것이다. ‘事(사)’는 일에 종사한다는 ‘事(사)’ 자와 같다. ‘청컨대 이 말씀에 종사하겠다.’는 것은 안연이 묵묵히 그 이치를 알고 또 자신의 능력이 이것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음을 스스로 알았다. 그러므로 곧바로 자신의 임무로 삼고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이 주석에서 핵심문장은 ‘非禮(비례)란 자신의 사욕이다’라는 말이다. 예의가 없는 것은 태도의 문제라고만 이해하는 현대인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큰 문장이기도 하다. ‘예가 아니다’에 대한 설명이 사욕(私慾)이라 설명하는 것은 뒤이은 주자의 연쇄법을 활용한 설명으로 왜 사욕을 이기고 본연의 마음을 되찾는 것이 예(禮)인지를 명료하게 설명해준다. 그것은 예(禮)가 태도나 예절만으로 국한된 것이 아닌 결국 인간이 갖춰야할 본질적인 마음가짐, 즉 인(仁)으로 귀결됨을 보여준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공자의 말씀으로 이 장이 끝나지 않고, 안연이 부족하나마 그 말씀에 종사하겠다는 대답을 하는 것으로 마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안연은 그 어려운 행간의 의미를 모두 길어내어 이해한 뒤 그것을 실행하겠다는 결연한 다짐을 스승에게 하고 있다. 그래서 공자가 안연의 이해도가 이룬 성취와 그 경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자의 의도나 안연의 태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모두 이해하기 어려운 학도들을 위해 정자(伊川(이천))가 이 부분에 대해 상세히 해설을 붙인다.   

  

“안연이 克己復禮(극기복례)의 조목을 묻자, 공자께서 ‘禮(예)가 아니면 보 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動(동)하지 말아야 한다.’ 하셨으니, 〈視(시) · 聽(청) · 言(언) · 動(동)〉 이 네 가지는 몸의 用(용)이다. 심중으로 말미암아 밖에 응하니, 밖을 제재함은 그 심중을 기르는 것이다. 안연이 이 말씀에 종사하였으니, 이 때문에 聖人(성인)에 나아간 것이다. 후세에 성인을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이것을 가슴속에 새겨두고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하여 箴(잠)을 지어서 스스로 경계하노라.     


視箴(시잠)에 말하였다. ‘마음은 본래 虛(허)하니, 사물을 응함에 자취가 없다. 마음을 잡는 데는 요점이 있으니, 보는 것이 그 법이 된다. 사물의 가리움이 눈앞에 사귀면 마음이 그리로 옮겨가니, 이것을 밖에서 제재하여 그 안(마음)을 편안히 해야 한다. 극기복례하면 오래할 경우 誠(성)하게(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聽箴(청잠)에 말하였다. ‘사람이 秉彝(병이)의 양심을 가지고 있음은 천성에 근본하였으나 知(지, 욕심의 지각)가 〈외물에게〉 유혹되고 외물과 동화하여 마침내 그 바름을 잃게 된다. 드높으신 저 선각자들은 그칠 데를 알아 定(정)함이 있다. 邪(사)를 막고 誠(성)을 보존해서 예가 아니면 듣지 않으셨다.’     


言箴(언잠)에 말하였다. ‘인심의 動(동)함은 말로 인하여 베풀어지니, 말을 낼 때에 조급함과 경망함을 금하여야 안(중심)이 이에 고요하고 專一(전일)해진다. 하물며 이것(말)은 몸의 樞機(추기)여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友好(우호)를 내기도 하니, 吉(길)과 凶(흉), 榮華(영화)와 恥辱(치욕)은 오직 이 〈말이〉 부르는 바이다. 말을 너무 쉽게 함에 상하면 虛誕(허탄)해지고, 너무 번거로움에 상하면 支離(지리)해지며, 자신이 〈말을〉 함부로 하면 남도 거슬리고, 나가는 말이 도리에 어그러지면 오는 말도 이치에 어그러진다. 예법에 맞는 것이 아니면 말하지 말아서 훈계 말씀을 공경할지어다.’     


動箴(동잠)에 말하였다. ‘哲人(철인)은 幾微(기미)를 알아 생각할 때에 성실히 하고, 志士(지사)는 행실을 힘써 행위에 지킨다. 천리를 순종하면 여유가 있고 인욕을 따르면 위험하니, 造次(조차)라도 능히 생각해서 戰戰兢兢(전전긍긍)하여 스스로 잡아 지켜라. 습관이 천성과 더불어 이루어지면 성현과 함께 돌아갈 것이다.’”     

위 주석에서 설명한 이 네 가지가 그 유명한 ‘사물(四勿)’ 또는 ‘사잠(四箴)’이라고 불리는 내용의 ‘四勿箴’ 되시겠다. 정자의 이 설명이 배우는 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이해의 바탕을 마련하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주자가 마지막으로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준다.

    

내가 살펴보건대, 이 장의 문답은 바로 심법(心法)을 전수해준 간절하고 요긴한 말씀이니, 지극히 총명한 사람이 아니면 그 기미를 살필 수 없고, 지극히 굳센 사람이 아니면 결단함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오직 顏子(안자)만이 이것을 얻어들을 수 있었고, 모든 학자들도 또한 이것을 힘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程子(정자)의 箴(잠)이 발명하기를 매우 친절히 하였으니, 배우는 자들은 더욱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본래 ‘箴(잠)’이란, ‘아픈 데를 치료하는 침’이라는 뜻으로, 전성하여 교훈이 될만한 뜻이 담긴 글을 이른다. 왜 시작은 분명히 인(仁)으로 한 것 같은데, 예(禮)가 튀어나오고 예가 아닌 것을 의미하면서 사욕(私慾)이 튀어나오며, 그 인(仁)을 완성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삼가야할 행동거지로 사물(四勿)을 설명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리전개가 중급자이상의 수준이 아니고서는 따라가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유명한 장일수록 제대로 이해하는 자가 없고, 제대로 이해하는 자가 많다고 떠벌이는 내용일수록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공부한 자가 드물며,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보기에 힘든 것은 공자 당시나 수천년이 지난 작금의 대한민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공자가 허여했던 안연조차도 그 실천의 무거움을 느끼고 겸허하게 고개를 떨구며 실천의지를 다졌던 상황을 생각해보면, 번역서 몇 권보고나서 거들먹거리는 허접껍데기들의 인문학이 갖는, 그 존재의 가벼움에 먼지처럼 날아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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