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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22. 2022

COFFEE TIME - 완결

여름휴가 특집 단편소설 특별선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301


                           5


  그날 칵테일 바에서의 한잔까지 해서 우리는 꽤나 늦게 모임을 파했다.

  나는 전화를 걸어두긴 했지만 엄마가 아닌 남편이 받는 전화, 그리고 차갑게 깔린 목소리로 오랜만에 나갔으니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라는 그의 말이 더욱 무겁게 가슴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최근 이렇게까지 늦게 들어간 적이 없었던 탓에 괜스레 발이 빨라지고 불안해져 가고만 있었다.


  집에 들어갈 때 언뜻 거실의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렸고, 남편은 거실에 오롯한 자세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이렇게 늦을 줄은 몰랐어요. 친구들이랑...”

  “됐어. 씻고 어서 들어가 자.”


  친구들의 힘겨워하는 소리를 듣고 난 뒤라서인지 난 힘겨움을 공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몸을 씻고서 아이의 잠자리를 다시 챙기고 남편이 먹은 라면 그릇들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내일 아침 쌀을 물에 담아두고서야 겨우 침실에 소리 없이 들어가면서 내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건가에 대해 한 번도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보. 자요?”

  “......”

  “미안해요.”


  조용히 그의 등 뒤로 가서 그를 안아보았다. 그의 등은 시리게 느껴졌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건가? 그는 나를 사랑하는 건가? 사랑해서 결혼하고 사는 거 아닌가?


  당신 날 사랑해요?


  바보 같은 질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난 질문을 입밖에 꺼내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고 느꼈다.


                          6     


  현정이가 날 불러낸 것은 그날 우리의 커피타임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녀가 직장을 그만둔 지 꽤 시간이 지나고 막 새 직장을 알아보고 있던 차에 남편이 소개해준 은행의 면접을 끝내고 나온 그 가을날 오후였다.


  “여기야.”


  대낮이라 그리 많은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그 한적한 장소에서 손을 들어 보이는 현정의 팔이 더 가늘고 길게 느껴졌다. 뭔가 달라진 구석이 있다 싶었는데 테이블 사이를 지나며 그녀에게 다가서는 사이 그것이 그녀의 헤어스타일임을 알았다. 아주 짧아진 커트. 그녀의 몇 년간의 자랑이던 탐스럽고 마냥 시골 처녀스러워 보이던 그 청순한 느낌의 하늘거리던 머리칼들이 아주 단정하고 다부진 그녀의 인상처럼 짧아져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거니?”

  “일은 무슨... 그냥 따분하기도 하고 답답해서 너랑 커피나 한 잔 하려고 부른 건데... 싫었니? 그날 연주랑 보라 얘기 듣고 나서 느끼는 것도 많았고 해서”


  늘 그녀의 질문은 단도직입적이었다.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라고 말하라는 것.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도 아버지가 우리 학교 선생님과 눈이 맞아 이혼을 하게 될 때 그 선생님을 찾아가 그렇게 매섭게 그 선생을 울려놓고 머리끄덩이를 잡아채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서른을 넘긴 지금에서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비친 통유리를 보니 예전이 그녀와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 많은 나이테를 남기고 그녀를 다시 조각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생각해? 내 얼굴, 많이 이상하니? 많이 푸석해? 화장으로 지운다고 지운 건데...”

  “아니야.”


  그녀는 커피가 무척이나 좋다고 말하며 연거푸 두 잔째 리필을 요구했다. 일부러 창가에 앉은 것처럼 그녀의 눈매가 허허로운 시선으로 길가의 낙엽에 가 꽂혔다.


  “면접은 어땠어?”

  “나... 어떻게 하니?”


  그녀는 갑자기 밝던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떨궜다. 떨어진 고개 위로 그녀의 짧아진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그러고 보니 난 그녀를 알고 있는 동안에도 그녀가 짧은 머리를 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 모두가 단발을 고수하고 교복을 입었을 때에도 그녀는 긴 머리를 하겠다고 당당히 학생주임에게 반항했었다. 그런 그녀가 10년도 훨씬 지난 지금 머리를 자른 채 내 앞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그게 제대로 안돼. 내 생활 모든 게 다 흐트러져버렸어.”


  그녀가 쥐고 있던 커피잔이 심하게 흔들리며 파문을 만들어냈다.


  “처음 그 사람을 만난 날부터 뭔가 그렇게 힘겨운 상황이 될 줄은 몰랐어. 그저 나랑 아주 잘 맞는 사람이고 내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한 거라, 나에겐 너무 따뜻한 느낌이었고, 너도 알잖아. 난 아버지가 그때부터 없었다고...”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막 은행에 입사하고 최근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할 거라고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는데, 그녀의 생활은 매우 궁핍한 것 같았다. 그녀는 좋은 옷을 입고 다녔고, 좋은 아파트에, 혼자 살면서도 인테리어 공사에 2천만 원이나 들여가며 가구며 새 디자인을 꾸미는 화려한 생활을 했다. 그런 그녀가 회사생활을 접은 지가 1년이나 지났다는 것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아파트를 팔고 융자받은 것을 갚기 위해 작은 전세로 옮겨야겠다고 했다. 그때 그녀는 이미 이전의 당당하고 활발하게 대부계를 뛰어다니던 직장여성이 아니었다.    


  “왜 그래? 어떻게 된 거야?”

  “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 9년 동안...”


  9년 동안?


  “그 사람한테 일을 배우고 그 사람한테 여자라는 걸 배웠는데... 내가 여자라는 걸 알게 해 줬는데 그 사람을 지우고 살아갈 자신이 없어, 연미야. 난 왜 이렇게 더티해졌는지 모르겠어.”


  그녀의 표현처럼 더티한 그녀의 사랑에 대한 전말은 이러했다.     


  그는 그녀가 입사한 은행의 상사였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한 그날, 연수가 끝나고 돌아와 처음 자리를 배정받은 그 신입사원 환영회 날, 둘은 함께 밤을 보냈다고 했다. 그녀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녀가 어떤 소녀시절을 보냈는지 아는 나로서는 그녀에게 뭔가 특별한 마법 같은 힘이 그녀에게 작용했을 거라 믿었다. 그는 그녀보다 정확히 10살이 많았다. 그 역시 그녀를 알기 전까지 바람둥이이거나 난봉꾼과는 거리가 먼 결혼 한 지 만 5년이 된 너무도 착실한 가장이고 가정적인 사람으로 유명한 공처가였다. 그런 두 남녀가 만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특급호텔에서 하루를 보내고 함께 출근을 했다는 것이 나에게는 물론이고 본인들에게도 크나큰 일처럼 느껴졌을 터였다.


  만난 지 하루만의 동침이라.


  그날부터 혼자서 생활하는 그녀의 집이 그의 집과 같은 방향이었다는 이유로 그는 그녀를 태우고 출퇴근을 하는 번거로움을 자처했고, 그때마다 가끔씩 그녀의 집에서 쉬었다가 가거나 간혹 잠을 자고 가거나 함께 휴가를 받아 여행을 가거나 하는 일이 잦아졌다. 남자는 자신에게 있어 그녀가 평생에 없을 운명 같은 여자라고 말했고, 여자는 그런 남자의 말만 들어도 자신이 찾지 않아도 오게 될 운명이 바로 이 남자라고 생각했다.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남자가 홀로 고학하고 혼자서 생활하는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가슴 뿌듯했다. 물론 그가 자신의 브래지어 훅을 풀러 낼 때나 자신을 안고 있을 때 자신의 몸을 더듬고 예민한 부위를 찾아낼 때의 그것이 그가 자신에게 첫 남자가 아님을 문득문득 깨닫게 했지만 그리고 그것이 그의 아내라는 존재를 다시금 일깨우는 것이긴 했지만 그녀는 그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술이 깨기 위해 잠시 차나 한잔하자고 들른 특급호텔에서의 시간 동안 커피 한잔을 마실 동안 서로의 얘기만으로 두 남녀는 서로가 자신들이 찾아 헤매어야 할 운명이라고 자신하고 그러한 대상을 만난 것에 감사하며 서로의 몸을 안았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그리 오래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녀는 자꾸만 자신이 그의 아내와 비교되거나 그에게서 다른 여자의 체취를 느끼는 것에 서글픔을 느꼈고 그것이 두 사람이 갖는 반목의 소재가 될 때마다 남자는 점차 끊었던 담배의 량이 늘어가는 것을 깨달으며 이제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자신이 서지 않았다.


  여자는 자신의 몸을 탐닉하는 남자에게서 아이의 학교생활을 듣게 되었고, 남자가 가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임을 자꾸만 우려하게 되었다. 남자와의 결혼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남자와의 결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 만 이었다.


  남자는 여직원과의 묘한 스캔들이 불거지자 은행에 사표를 내고 벤처지원 펀드회사를 차렸다. 물론 그때까지도 삼일이 한번 정도의 두 사람의 밀애는 계속되었고 그 현실이 그녀에게도 그다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남자를 위해 대부 서류를 꾸밀 때에도 그녀는 행복했고 자신의 생활과 격에 안 맞는 생활을 꾸며나가는 것도 그의 아내가 하는 것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단지 그녀가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남자가 안정된 가정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자신의 희생이 억울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남자의 펀드회사는 연일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 그녀의 명의로 이어진 대출은 고사하고 본전을 건지기가 힘들어졌고, 그의 처갓집에 손을 벌려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남자는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결코 여자에게 서로가 운명적인 사랑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녀의 귓불에 뜨거운 입김과 함께 끊임없이 속삭여댔다.


  그렇게, 남자의 연락이 점차 뜸해졌고, 그녀는 대부계에서의 업무처리 미비를 이유로 은행을 나와야 했다. 그즈음 그녀는 세 번째 중절 수술을 받았고, 그는 그녀에게 다만 얼마의 돈만을 보낼 뿐이었다. 그녀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고, 그들은 공식적으로 이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비명 같은 자해와 자살미수 끝에 두 사람은 완전히 만남의 종지부를 찍었고, 그녀는 다시 자신의 생활로 돌아와 생을 연명해야 했다. 그렇게 그는 사십 대가 되었고, 그녀는 서른을 훌쩍 넘어 9년간의 운명 같은 사랑은 끝났다고 했다.


  이야기를 다 끝낸 현정은 오히려 이야기를 꺼내기 전보다 훨씬 편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서 세 잔째에 설탕을 계속해서 넣는 듯하다가 이내 씨익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커피 한 잔 한다고 한 게 벌써 세 잔째나 됐네? 이번 직장에선 모임 같은 거 안 나갈 생각이야. 커피 한잔 하자고 하는 남자라도 있으면 어쩌니? 얼마나 더 더티해지라구.”


  피식 웃어주고 싶었지만 얼굴 근육이 굳어서였는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지 뭐. 난 내가 아버지의 여자한테 막 굴던 생각만 했지, 막상 그 사람 부인 앞에서 고개를 들고 소리를 지를 자신이 없더라.”


  버스 정류장에 함께 서 있던 현정은 그렇게 맥없는 한마디를 던지고서는 버스로 올라탔다. 버스 창가로 힘겨운 듯 머리를 떨구는 그녀의 짧은 머리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구둣코에 가 떨어졌다.      


                         7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다시 가을을 맞았다.


  연주는 이혼을 했지만, 다시 그 남자와 재혼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헤어진 것은 아니라고 그녀는 말했다. 좋은 관계로 결혼이라는 것이 다시 필요할 지에 대해 신중하게 고려중이라고 했다.


  보라는 그가 유학가 있는 미국으로 일 년에 두서너 번씩 그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해나르는 중이다. 자신이 먹을 김치도 사 먹던 보라였던 걸 감안하면 보라는 정말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돌아오는 대로 집안에 비밀로 하고 함께 동거할 생각이라고 말하며 미국에서 전화를 건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현정은 결혼을 해서 임신 중이다. 그 해 겨울 그 남자가 이혼을 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아주 담담하게. 그녀에게 있어 그 남자가 전부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으리만큼 그녀의 결혼식 때 사진은 밝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여보세요. 응. 나야. 잘 지내?”

  “응.”

  “우리 집에 언제 커피 한잔하러 오지 않을래?”




재미있으셨나요?

정기 연재를 대신하는 글이라 하도 오래된 원고를 끄집어낸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한데, 한국에 들어오니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자꾸 발에 걸려 글을 집중해서 쓸 정신이 없네요.

당분간은 하루 한 편 소설로 무료함을 대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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