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 없이 돌린 주파수가 클래식 음악 채널에 맞춰져 음악이 흘러나오다가 3시의 시보가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늘 그랬듯 자동응답기를 켜 두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전화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있더라도 응답기를 켜 두는 거니까. 암실에서 사진을 인화하는 작업을 하는 시간 동안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가만히 그 새벽의 고요함을 깨뜨린 당사자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날카로워진 귀를 집중하게 되었다. 쉬어버린 그녀의 목소리가 기운이 다 빠져버린 듯 기계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병원으로 좀 와줘요. 피를 많이 흘렸어요. 무서워요. 미안해요. 왜 당신에게 전화했는지 모르겠어요. 화내지 말아요.……”
여자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황급히 달려가 수화기를 잡아채 전화를 받긴 했지만, 이미 수화기를 들었을 때는 그녀의 녹음기 속 길고 거친 숨소리가 스쳐 지나간 후였다. 수화기에선 그저 메말라버린 송신음만이 들어왔다. 갑작스레 상황을 다시 퍼즐 짜 맞추듯 머리가 이리저리 부대끼며 돌았다.
여자는 이모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러고 보니 그 정도가 다였다.
놀란 마음을 억누르며 아무 일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금방 전화를 걸었던 건 어디라는 거지?
신호만 계속 가는 전화를 들고서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분명 핸드폰이 있는 그곳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 늦은 새벽에 서울에 있는 인근 병원을 모두 찾아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녀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가 애인인지 아니면 또 다른 그 무엇인지 딱 규정지어 말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전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외면할 수도 없었다. 내가 그녀를 위해 뭔가 해주려 하면 그녀는 내가 그녀에게 다가서려는 만큼 꼭 더도 아니고 부족하지도 않을 그만큼만 달아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찌 됐든 간에 그녀의 두서없는 말과 안정되지 못한 목소리 톤으로 보건대 그녀는 상당한 쇼크를 받은 것임에 분명했고, 이미 그녀와는 모든 것을 끝냈다고 점을 찍었지만 전화를 걸어온 것을 보면 그녀에게 있어 나는 아직까지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나는 뭔가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녀와의 관계가 끝났고 안 끝났고를 떠나 당장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괜찮다는 목소리라도 들어야 내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모종의 책임의식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내가 그녀의 곁에 있어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기 시작해서는 결국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입고 있었다.
헤어지자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당연히 그렇다고 여겼던 이별이 있은지 근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한 달'이라는 기간은 남자에게 있어서는 어떤 의미일지 상관없더라도 여자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긴 시간일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아무 근거 없는 충고를 들으며 나는 그 통례적인 상식에 기대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를 시간의 흐름에 묻어보내고 난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거라고 자위하며 기억에서 그녀를 지워버리고 난 후였다, 그 한 달은.
평상시 내가 걸어 다니던 길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내 머리를 감안해 보건대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말투, 그녀의 모든 것들이 내 머릿속 혹은 내 가슴속에 제대로 형상화되어 남아 있을지 조차도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녀에 대해 혹시라도 나를 엮어 기억하고 있을 누군가가 물어보지 않더라도 너무도 확실히 지워졌다는 것을 한번 더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응답기를 통해 걸러져 나온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 몇 마디 말에 의해 내 기억의 카메라가 잡을 수 있는 최대한의 도트로 카메라의 앵글을 조이며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너무도 또렷하게 초점을 잡아내고 있었다. 조여지는 앵글 안에 내가 갇혀버린 듯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목을 조이는 옷을 부여잡고 길게 한번 늘려 잡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라면, 그녀라면 분명히 힘들어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나를 지워버릴 거라 여겼다. 최소한 그녀는 그랬다. 그녀는 이제까지 그녀가 만나왔던 다른 이전의 사람들을 대할 때도 그리고 그들을 지울 때도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한번 비웃어버리고는 튕겨내어 버렸다. 그런 그녀의 갑작스러운 전화는 그녀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 같은 것들을 모두 뒤섞어 다시 원점으로 돌리고 말았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이런 내가 아직도 그녀에게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어릴 적 구멍가게에서 계산대에 쌓여있는 거스름돈을 몰래 집다가 주인아줌마와 눈이 마주쳐 버린 그런 느낌으로 옷을 입은 채 계속 서성이고 있었다. 그저 습관적으로 늘 물게 되는 빈 담배에 불도 붙이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하는 내 모습은 나에게도 생경한 것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불안한 건지 나 역시 알 수 없었지만 나를 통제하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나는 그저 스쳐 지나는 통과제의에서 쓰이는 제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투는 다소곳한 소녀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으며, 눈물은 절대 흘려본 적이 없다고 했던 그녀가 분명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지금 불행한 것이었다.
2
내가 그곳을 찾았던 것도 그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광화문을 지나 청운동 고개를 넘어서면서부터 조금씩 바람을 타고 흘러나오던 아카시아 내음이 알싸하던 어느 봄이었다. 찾고 있는 집으로 차가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그 향은 술에 취한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느낌으로 북한산 자락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눈에 들어오는 아카시아 나무라고는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아카시아는 자신의 존재를 그 향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장영주요?”
“그래. 지금 너 밖에 없으니까 빨리 나와.”
본래대로라면 선배가 나가야 하는 인물기사 취재였다. 사진기자와 팀을 이뤄서 나가야 했는데 마침 사무실에 남아 있던 사진기자라고는 수습으로 있던 나밖에 없었다. 말이 수습이지 나는 견습생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사진이 좋아서 시작한 정도에 막 졸업하고 그곳에 들어갔던 나는 늘 건물 사진이나 풍경사진에만 익숙했지 인물사진, 그것도 정식 인터뷰를 하면서 누군가의 모습을 잡아내는 일이라고는 생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수습이 입맛에 맞춰 일을 가려가면서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사진을 전공으로 하지도 않았던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제대로 취업도 하지 못해 일단 좋아하는 사진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선배의 말에 넘어가 시작한 아르바이트치곤 괜찮은 일이기는 했다. 회사의 뒤치다꺼리는 하고 필름이나 정리하던 내게 있어 처음 맡게 되는 일이기 때문에 가슴이 뛰기는 했지만, 수습딱지를 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인물사진을, 그것도 인터뷰를 따라가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여간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누구예요? 지금 인터뷰 따러 가는 사람?”
내가 사진을 찍어야 할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대강 알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물은 질문이었는데 선배는 한심하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장영주가 누군지도 모른단 말야? 너 완전히 간첩 아냐? 책두 안 읽냐? 이런 걸 데리고 일을 해야 하니 원. 여류 소설간데…, 이 바닥에서는 꽤 잘 나가는 편이야. 이혼하고 사는 소설가들이나 다른 여타 여류 소설가들하고는 좀 다르지.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해. 웬만한 4대 일간지도 어느 수준의 레벨 아래로 가면 아예 상대도 안 해줘. 잡다한 잡지나 매체 인터뷰는 고사하고 청탁하는 원고도 함부로 얘기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는…, 하여간에 좀 독특한 여자야.”
사진을 찍기 전에 대상에 대해 공부가 되어 있어야 인물에 대해서 보다 깊이 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은 사진기자의 상식이다. 그런 기본적인 상식조차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나에게 인터뷰할 여류 작가에 대해 설명을 하는 선배는 그 여자에 대해 이미 사소한 일상들까지 충분히 조사를 끝낸 듯했다. 일단 대강의 설명을 차 안에서 들으며 그녀를 만나게 되면 연출할 기본적인 분위기와 내가 인터뷰 사이에 조심해야 할 것들, 특히 그녀가 민감해하는 듯한 반응이 보일 경우 즉시 눈치를 채고서 그녀를 거슬리게 하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한다는 경고를 선배는 잊지 않았다.
문학을 한답시고 꽤나 콧대가 높은 여자겠군. 하필이면 그런 여자 사진이 개시라니. 그래도 별 거 있을려구. 그저 글쟁이가 다 그렇겠지.
그때는 그저 그런 생각뿐 별다를 생각을 할 것도 없었고 난 말 그대로 사진만 담아오면 되는 것이었다.
북한산 자락을 접어들면서 커다란 집들이 연이은 것이 보였다. 웬만한 산동네 높이처럼 계속 올라가는데 집들의 크기는 점점 더 커져만 갔고, 나로선 상상도 하지 못한 거부들이 사는 동네라는 분위기가 대문만 보아도 물씬 묻어 나왔다. 서울의 한 복판에서 그리 멀지 떨어지지 않은 시내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나로선 의외였다. 오히려 나중에 작업실 분위기로는 더할 나위 없다는 설명을 해주면서 그녀가 싱겁게 웃어 보이긴 했지만, 난 그때까지도 그녀가 어떤 작품들을 쓴 작가인지조차 모르고 있던 터라 그저 내가 이런 동네에서 글이나 쓰면서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나 풀어놓고 있었다.
이집저집을 구경하면서 올라가다가 다른 양옥들과는 다르게 전통가옥 근처에서 선배가 차를 세웠다. 기본적인 구조는 양옥의 구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담너머 언뜻 보이는 나무들 하며 정원의 양식이나 담들은 한옥의 그것을 옮겨놓은 듯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멋스럽게 어우러져 주위의 집들과는 격이 달라 보이는 것이 사진을 찍는 내 눈에는 이채로웠다.
“야! 침 닦아라. 안 내릴 거야?”
인터폰은 사람보다 먼저 카메라 렌즈가 맞아주었다.
“누구세요?”
막상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커다란 '저택'이었다. 단지 작업실에 불과해서 그저 그림 그리는 사람들의 아뜨리에 정도처럼 조그만 오피스텔 정도를 예상했는데 이건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높은 고지대의 동네에 그렇게 큰 저택들이 산 밑에 줄지어 자리 잡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 예. 한주 일보에서 나왔습니다. 장 선생님 계십니까?”
“예. 들어오세요.”
전기가 흐르는 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그냥 툭 밀리며 열렸다. 선배와 막 들어가려는데 검은 물체가 어깨를 툭 치며 우릴 앞질렀다.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우리 곁을 지나는 듯 쑥 하고 열린 문으로 먼저 들어가 버린 거였다. 우린 황당했지만 이미 여자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쑥 들어가 버리고 난 후였다.
지난겨울, 여러분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연재소설 <마녀의 조건>에서 주인공이던 마녀 강연미가 필명 한영원으로 출간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후속 연재를 예고했던 바로 그 작품이 오늘부터 연재를 시작한 바로 이 중편소설입니다.
<논어 읽기>는 조만간 다시 연재를 재개하되, <실패한 대가들의 이야기>와 <현역 목사 아동학대 사건>은 당분간은 조금 쉬어야 할 듯합니다. 수습해야 할 일들은 많고, 시간은 제한되어 있는데, 글쓰기에 전념하지 못하면서 이도 저도 못하는 것보다는 당분간 휴식을 온전히 취하는 것이 나을 듯하여, 호흡이 긴 중편 소설을 가져왔습니다. 아마 완결하는데 9회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