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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27. 2022

그녀, 우츄프라카치아 - 5

여름휴가 특집 중편소설 특별선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306



                          5     


  처음 남자와 자는 것이라고 그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하면서도 그녀의 행동들은 마치 대사나 지문을 따라가듯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말 그대로 무미건조, 그 자체였다. 벌거벗은 몸으로 서로 부대끼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행위를 하는 내내 자신의 일상을 읊조리듯 낮은 목소리로 숨을 고르며 말하는 것이 거슬리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것이 편한 것 같았다. 가끔씩 내 움직임마저 제지하며 그치고 말을 이어나가는 그녀의 말들은 대개는 그녀의 생각들, 그녀가 늘 귀에 꽂고 듣는 음악들, 그리고 자기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관찰기가 고작이었다. 그런 식으로 듣는 그녀의 학교 생활은 그녀의 행동에서처럼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다.


  그저 요맘때 학교를 다니는 이른바 신세대라는 아이들의 행동에서 그렇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자기 혼자 있기를 즐겨하고 늘 귀에 음악을 꽂고 다녀야만 마음이 안정되고 많은 이야기를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싫어하는 약간은 독특하면서도 그들의 세계에서 보면 아주 평범하달 수 있는 그런 아이였다. 물론, 애인을 두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그의 집에 들러 함께 밤을 보낸다거나 술을 먹으며 담배를 피우는 것은 그리 흔하다 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그녀의 주된 생활이 될 정도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처음 황당한 만남 이후로 그녀에게서 처음 전화가 온 것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그 여름의 장마 막바지였다.


  “저 좀 재워줄 수 있어요?”

  “여보세요? 누구시죠?”

  “저 기억 못 하세요. 평창동… 장영주 씨……”


  그제서야 그는 몇 달 전 청바지를 툭툭 털며 일어서던 여자아이를 기억해냈다.


  “어디지? 지금?”

  “대학로…”


  그렇게 끊긴 수화기를 내려놓고 남자가 그녀를 데리러 중고 아반떼를 끌고 나갔을 땐, 이미 1시가 다 되어서였다. 그녀는 전화부스 안에서 오들오들 떨며 파래진 입술 안으로 이빨을 딱딱 부딪히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집에 전화했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급한 대로 그는 차 안에 두었던 모포를 꺼내 그녀를 휘감고 집으로 돌아왔다.

  “……”


  특별히 대꾸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에서 오는 내내 그녀는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남자가 기어에 손을 올려놓았을 때 가만히 내 손 위로 차가운 그녀의 손을 잠시 포개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그녀에게 뭔가 더 이상 대답을 독촉할 수가 없었다.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샤워를 하고 나온 그녀가 그의 헐렁한 옷을 입고서 입을 뗀 것은 3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미안해요. 전화할 데가 없었어요.”

  “괜찮아. 난 여기서 잘 테니까, 그거 다 마시고. 따끈한 코코아야. 그리고 눈이라도 잠시 부쳐.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내일 학교 가야 하잖아. 방학도 아닌데…”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사고는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거실에서 잠을 자던 그가 흠칫 놀라 깬 것은 새벽녘 알몸으로 자신의 몸 안으로 기어들어오며 황급히 그의 입술을 찾는 그녀의 입술이 포개지던 순간이었다.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녀의 요구는 끈질기고 간절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그녀는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가슴은 충분히 그의 가슴을 누를 만큼 크고 강한 수밀도의 그것이었고, 이곳저곳을 더듬는 그녀의 행위는 거칠기는 했지만 그를 충분히 흥분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게 그는 그녀를 받아들였다.


  “후회하지…, 않아?”


  그가 담배를 입에 물며 죄책감인지 모를 감정에 넌지시 물었다.


  “그런 말…, 굳이 할 필요 없어.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그리고…”


  그의 입에서 담배를 빼앗아 그녀가 한 모금 빨고는 다시 재떨이에 부볐다. 아까와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말투가 바뀌고 거칠어져서만은 아니었다. 그녀에게서는 왠지 또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기대하기 뭣했다. 아직도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만의 착각이고 그의 오산이었다. 그녀는 최소한 그보다 훨씬 세상을 오래 산 자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묘한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며칠 밤을 새우던 그에게 그녀의 품은 따스한 엄마의 품 같았고 마치 오랫동안 함께 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그런 점에서 둘의 모습은 여자가 남자에게 기대고 의지하려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의 품에서 오랜만의 숙면을 취하는 듯한 모습을 자아냈다. 그는 오히려 그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런 건 나한테 아무런 중요한 게 아냐. 중요한 게 뭔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는 바로 그게 더 중요한 거야. 뭐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사람들은 아직 몰라. 그래서 죽지 않고 사는 거야. 그걸 알 때까지 그리고 그걸 알기도 전에 가잖아, 병신같이.”


  나른해지는 자신을 느끼며 익숙한 비누 향내에 눈을 감으며 그녀의 목소리가 가물거린다고 그는 생각했다.     


                         6


  몰래 들어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아줌마도 없었고 이모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거실로 들어가 옷가지를 던지고서는 그대로 배고픈 배를 채울 생각으로 주방을 들어설 때 작업실 쪽에서 사각거리는 걸음걸이가 들렸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안에 케이크와 샴페인과 과일이 들어있었다. 그것을 보고서 새삼 생일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고마워하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젠 어떻게 된 거냐?”


  늘 그렇듯 여자의 목소리는 그 모습을 확인하기도 전에 소녀의 목덜미를 잔뜩 곤두서게 만들었다.


  “……”


  아무 말없이 차려진 상 한쪽에서 오트밀을 꺼내 우유를 붓던 소녀는 잠시 멈칫하는 듯하다가 다시 우유를 냉장고에 넣고 여자의 존재를 무시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소녀의 속내를 그녀가 읽어내지 못할 리 없었다.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그러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상관없잖아요. 내가 어디서 자고 들어오든!”


  가운을 입고 아직 헝클어진 머리로 커피를 따르는 여자는 어제도 밤새 작업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최소한 자신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 아침에 들어왔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을 봐서도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굳이 변명할 기회를 잃은 것이라고 여겼다.


  “외박하지 말라고 했잖아! 버릇된다고! 도대체 어젠 어디서 잔 거야?”

  “친구네서 잤어요.”

  “친구 누구?”

  “말하면 알아요? 혜영이네요.”

  “거짓말하지 마! 혜영이넨 어제 벌써 연락 다 해봤어. 어디서 어린 게 거짓말이나 하고 함부로 밖에서 자고 들어와!”


  여자가 들고 있던 커피잔을 탁자에 탕하고 내려놓으며 무섭게 소녀를 노려봤다. 평상시에도 몇 번 사소하게나마 부대끼기는 일이 있긴 했었지만 친구네 집까지 전화를 해봤다니, 기가 차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심하게 자신의 행동을 추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녀는 마치 죄인을 다루는 듯한 그녀의 거슬리는 말투와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냥 잔소리를 하던 평상시의 그녀와는 뭔가 조금 달랐다. 째지는 듯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소녀에게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여자의 날카로운 반응에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려 드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차마 들고 그녀를 볼 자신이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오트밀을 먹고 있는 시늉이라도 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생각하는 대로 자신의 몸이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느낌이 몸을 경직시켰다. 행동이 자연스러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손에 들고 있던 플라스틱 스푼이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녀는 겁에 질려있는 것도 아닌데 자신이 왜 이렇게 흥분되는지 몰랐다. 갑자기 감정이 여기저기 터지기 시작한 수도관처럼 폭주하는 느낌으로 치밀어 올랐다.


  “어제 내가 밤새 널 기다리고 여기저기 전화하고 미친 여자처럼 헤매 다녔다. 그런데 아침에 겨우 기어 들어와서는 뭐가 어쩌고 어째? 이젠 거짓말까지 해가며 외박을 해? 니가 하는 짓이 얼마나 천박한 건지 알고나 하는 짓이냐? 엉?”

  “천박? 천박이라고 했어요? 그 젊은 놈을 집안에 끌어들인 사람이 누군데, 나한데 지금 천박이 어쩌구저쩌구 할 자격이나 있어요?”

  “닥치지 못하겠니?”

  “내가 엄마한테 뭘 어떻게 해달라고 한 적 있어요? 왜 새삼스럽게 엄마 행세를 하려고 들고 난린데요? ”

  “이모라고 부르랬잖아!”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빽 지르며 내던진 커피잔이 싱크대에 날아가 박살 났다. 소녀가 아악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귀를 틀어막고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움켜쥐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여자가 짜증스러운 듯 주위를 돌아보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소녀에게 다가섰다.


  “미안하다. 괜히 소리 질러서…”


  여자는 소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려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소녀는 신경질적으로 여자의 손을 탁 쳐내며 맞서 소리 질렀다.


  “그래요. 이모가 그렇게 잘났으면 이모 혼자서 살지 왜 내가 사는 걸 가지구 이래라저래라 하고 그래요? 나두 이제 스무살이라구요. 스무 살은 채우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굳이 그렇게 기다리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네요. 진작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잘됐어요. 독립하겠어요.”

  “독립?”


  여자의 한쪽 눈썹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그녀가 신경이 날카로울 때 한쪽 눈썹이 올라가는 습관이 있다는 것은 소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소녀의 감정상태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요량할 여유도 마음도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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