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때 마치 만화나 삼류 연애드라마에서나 벌어질 것 같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내 시선 앞으로 혜진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밖으로 나가다가 팔짱을 끼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날 보고 있었다. 그리곤 특유의 비아냥 거리는 미소를 흘리고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은 이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고 있었다.
송 기자와의 해프닝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혜진에게 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가 난감했다. 가만 생각하면 내가 굳이 그녀에게 뭔가 설명하거나 그녀가 나에게 설명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 뻔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쌓여 내가 의도한 상황의 연출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싶었다. 삐삐에 메시지를 계속해서 남겼지만 연락이 오질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그녀를 다른 형태로 만날 수 있었다.
퇴근이 늦어져 또 선배와 한잔을 걸치고 집에 돌아오던 길이었다. 문을 열려고 열쇠를 꽂은 순간 문이 스르륵 열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엔 당연히 혜진이 들어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서면서 난 혜진이 영영 내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집안의 모든 유리란 유리는 박살이 나있었고, 책들이 찢어진 채 바람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가 가져다 놓은 시디는 모두 부러지거나 휘어져 바닥에 널브러진 채였다. 그리고 그녀의 남성스러운 필체로 아주 강한 느낌의 단어들만 모아둔 편지 아닌 편지가 집 열쇠에 꽂혀 암실에 걸려 있었다.
- 넌 정말 밥맛이야! 다른 쓰레기들이랑 다를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바보 병신이었어. 다시 마주치는 일이 없길 바라.
그렇게 혜진은 처음에 내 집에 들어왔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내 집을 떠났고, 그 이후로 다신 날 찾지 않았다. 그 해의 첫 달 그렇게 이별하고 나서는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처음 예감에는 추호의 의심도 들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완전히 그렇게 끝난 것이라고 믿었다.
9
담배가 어디 있더라.
나는 첫 번째 통화내용을 계속해서 다시 돌리고 또다시 돌리고 몇 번이나 반복해 들으며 그녀와의 기억을 차근차근 다시금 더듬어 가고 있었다.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나를 문득 발견하곤 나는 나 자신에게 놀라고 있었다.
내게 이렇게 차분하고 진지하게 누군가를 생각해낼 수 있는 감성이 남아 있던가.
내게서 그녀가 연결되어 있는 우리 사이의 교집합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부분이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저 양적으로만 생각하고 치워버릴 정도로 그녀와 나누었던 시간이나 공간들이 덧없이 잊어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차지했던 비중과 깊이를 무시할 만큼 뻔뻔하거나 그녀가 혐오스럽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만큼 내 깊숙한 곳에 들어와 이미 자기 자리를 만들어 살고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나 역시 그렇게 비슷한 색과, 비슷한 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근거 없는 확신은 점차 냉철한 분석을 통해서 나온 것인 양 나의 감성을 모두 뒤흔들어 놓고 말았다. 그녀에 대한 생각이 이제는 절박했었다고 결론지어지고 만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나를…,
옷을 챙겨 입고 나서 입에 거꾸로 문 담배를 구겨버리고 나서야 나는 어쨌든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가자마자 먼저 담배를 사러 집 앞의 편의점에 들렀다. 잠깐 사이라고 느꼈는데 내가 잠시 나갔다 들어온 사이에 그녀는 그 잠시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두 번째 전화메모를 남겨두었다. 나보다 그녀는 늘 한 발 앞서 도착해 있었다. 역시 내가 직접 받아서 나에게 뭔가 얘기를 하느니 보다는 이 편이 나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느 사이엔가 기계에다가 대고 말하는 것이 사람을 보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익숙해진 듯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나를 지금 자기 앞에 세워둔 것처럼 천연덕스럽기만 했다. 그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안정되고 차분해져 아까 전화 걸었던 사람과 같은 인물이 아닌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엄마가 피를 많이 흘렸어요. 집에서 비린내가 나요. 락스로 아무리 씻어내도 지워지지가 않았어요. 병원에는 안 와도 돼요. 그 남자가 왔어요. 당신이 오면 안 될 거라는 생각 못했었네요. 엄마는 당신이 아직까지 엄마가 내 이모라고 여기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아니, 아마 모든 사람들이 아직도 그렇게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행복하게 지내요. 난 괜찮으니까 연락할 필요 없어요. 연락하고 싶음… 내가 할게요. 그럴 일 있을지 모르지만 또 모르는 거니까 나 가봐야 돼요. 그럼 끊을게요.”
10
설이라고 해서 그녀들에게 특별할 것은 없었다. 늘 그렇듯 그녀들은 저마다의 공간에서 나올 필요가 없었다. 곧 있을 혜진의 졸업과 대학 입학을 앞두고 혜진이 수석으로 대학에 붙었다는 것도 그녀들에겐 그다지 별다른 사건이 아니었다. 최소한 그녀들에겐 그랬다.
그날도 그랬다. 설을 며칠 앞둔 터라 아줌마는 설 연휴에 시댁에 가서 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 연휴를 위한 장을 한아름이나 봐왔고, 어차피 연휴가 있거나 명절일 경우에는 일하는 아줌마든 누구든 집에 두지 않는 것이 여자의 묵인된 관례였기 때문에 이미 10년 이상 일을 해준 아줌마는 음식만 준비해두고 냉장고를 채워둔 뒤 미리 여자가 준비해둔 선물과 봉투를 고맙게 받아 들고 집을 나갔다. 이제 집안에는 두 사람의 여자만이 남아있었다.
마이클 프랭스의 시디가 거의 끝나갈 무렵 벨이 울렸다. 혜진은 집안에 두 사람만 있을 경우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누구세요?”
“어, 난데…”
어쩡정한 목소리의 현준이 카메라에 보였다. 꽃과 과일, 그리고 케이크와 한과 따위의 것들이었다. 혜진은 그가 마뜩지 않았다.
“선물 놔두고 가요.”
“혜진아. 문 좀 열어줄래?”
“그냥 가라니까요. 이모 없어요.”
“혜진아. 문 열어줘라. 그게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이니?”
뒤에서 이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혜진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곤 도어스의 음악이 집을 떠나가라 터져 나왔다.
“안녕하세요.”
“응. 현준 씨 왔어? 웬일이야. 집에 내려간다더니…”
여자는 서른 중반을 갓 넘긴 그 신진 작가를 밀어주고 있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적적함을 달래고 있었다. 여자에게 마흔을 넘긴 여자에게 남자가 없이 계속 지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수도생활과 같은 것이었다. 여자는 수도생활을 하기에는 너무도 강한 열정을 지닌 이른바 예술을 한다는 끼가 강한 여자였다. 혜진을 집안에 두고 그를 들인다는 것도 조금은 애매한 것이긴 했다.
“아니. 혜진이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괜찮아요? 혼자 지내기 적적할 것 같아서…”
“혜진이 집에 있을 때는 삼가라고 그랬잖아. 자꾸 이러면 곤란해져, 내가.”
“우리 사이에 그럴 게 뭐가 있어요? 이거 받아요.”
여자에게 꽃을 건네주며 현준이 여자를 안으려고 했다. 음악소리가 크긴 했지만, 여자는 꽃만 받고는 슬며시 몸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