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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29. 2022

그녀, 우츄프라카치아 - 7

여름휴가 특집 중편소설 특별선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308


  여자는 자신이 마셨던 꼬냑보다 더 많은 양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더 이상 통화를 계속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그런 상황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오래된 중세 장식의 수화기가 그녀의 손에서 툭하고 미끄러져 떨어졌다. 수화기에서 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이얼링 해즈 롱 넘버 플리즈……”


  그녀의 흐느낌은 더욱 거세게 몰아쳤고, 그녀는 슬픔을 감당해내기에는 너무도 가녀린 손목과 너무도 작은 체구였다. 다시 시작됐는지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8


  먼저 물어본 것도 아니었지만, 그 아이는 남자 혐오증 비슷한 것이 있었다. 그렇다고 나와 잠을 자거나 내 팔을 베고서 커트 코베인의 음침한 음악을 들을 때도 그 아이가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거나 우리의 사이에서 뭔가 끈적한 애정이 존재한다거나 하는 착각은 내쪽에서부터 아예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나를 사랑하냐고 묻는 것도 우스웠다.


  나와 함께 있다가도 그녀의 관심을 끌만한 뭔가가 생기거나 하면 그녀는 서슴없이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언제든지 다른 쪽으로 성큼 돌아설 것 같았다. 그 아이에게 내가 뭔가 기대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가끔은 그녀가 남자 혐오가 특정한 남자들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글을 쓰거나 평론 같은 것을 한다는 남자들이나 여성편력이 대단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해서 삼각관계나 불륜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는 남자에 대한 독설을 퍼부을 때는 그 아이가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남자를 싫어하는지에 대해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저 둘이 있으면서 아무 일도 없는 저녁, 무미건조한 섹스 후에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를 보다가도 그와 비슷한 불륜이니 삼각관계니하는 갈등이 전개될 즈음이면 더더욱 날카로워져 내가 함부로 뭐라 말을 꺼내기도 어색한 팽팽한 긴장이 조성되고 마는 거였다.


  “넌 왜 그렇게 남자들을 싫어하니? 그러면서 난 왜 좋아하구?”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으려고 했지만, 사실은 내가 가장 궁금해하던 부분이었고 그녀의 도통 알 수 없는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난 무엇보다 내가 그녀에게 선택되어진 것 같다는 느낌과 왜 그것이 하필이면 나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었다. 뭔가 뚜렷한 그녀의 답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너무 빨리 선선히 튀어나왔다.


  “그게 중요해요? 그리고 그렇게 물어보는 건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우회적인 표현인 건가요? 대답부터 하자면, 난 오빠를 사랑하지 않아요. 분명히 기억하건대 난 오빠한테 사랑한다는 말 한 번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오빠도 대강 느끼지 않았을까 했는데… 그렇지 않아요? 난 오빠라서가 아니라 나라서 오빠를 좋아하는 것뿐이에요. 복잡한 거 딱 질색인 거 알죠? 난 복잡하지 않아서 오빠가 좋아요. 뭔가 묻고 대답하고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그게 자기 생각과 달랐을 때 상대방에게 화내고 그런 거 정말 싫어요.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듣죠?”


  할 말이 없다. 내가 뭐라 대꾸하자면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한번 자신의 가치관과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할 때면 그날은 어김없이 날을 새면서 귀가 멍해지도록 자신의 가치관에 대하여 나에게 일장 긴 연설을 시작하곤 했다. 물론 술을 먹고 그런 얘기를 하는 경우도 많긴 했지만 술을 마실 경우는 지극히 했던 얘기를 반복하거나 그저 사변적인 얘기로 흐를 뿐이었고 그런 진지한 얘기를 할 경우에 그녀는 결코 알코올을 입에 대지 않았다. 특히나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독특한 사랑관은 더더욱이나 그런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를 다시 혼란의 정가운데에 고스란히 밀어 넣기에 충분했다.


  “사랑이요? 난 사랑 같은 거 믿지 않아요.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사람이 얼마나 가벼워지고 얼마나 더러워지는지 몰라요? 그래서 난 오빠가 날 사랑하게 되길 바라지 않아요. 물론 그럴 일도 없겠지만요. 혹시나 내가 오빠를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난 오빠한테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예요. 섹스를 나누는 게 사랑하는 걸 전제로 한다고 하는 애들은 모두 그게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서 하는 걸 거예요. 오빠가 자꾸 그런 문제에 대해 나한테 매스를 들이대면 들이댈수록 우린 아마 그만큼 더 멀어질 거예요.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는 게 얼마나 그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는지 오빠가 알까요? 오빤 경험해보지 않아서 모르는 것 같아요. 물론 경험해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게 많이 있긴 하겠지만 이런 건 꼭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거든요. 물론 알면서도 또 당하기도 하죠. 하지만 중요한 건,  사람들이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게, 자신이 다른 사람을 배신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것하고 똑같다는 거예요. 굳이 이혼 법정에 놀러 가지 않아도 그렇다는 걸 난 잘 알고 있거든요.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서로 죽이지 못할 것처럼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는 게 그 사랑이라는 거예요. 오빠가 나보다 열 살이나 많으면서도 늘 사랑타령을 하는 건 오빠가 나이만큼 성숙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빠가 그만큼 덜 실망하고 더러운 꼴을 그만큼 덜 봐왔다는 설명이 정확한 표현일 거예요. 이제 그만해요. 나, 내일 기말고사예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섹스 후 당당한 걸음으로 옷을 벗은 채 욕실로 들어가 샤워하는 그녀를 보면서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망과 당혹스러움.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난 일종의 사랑이나 믿음에 대해 크게 상처 입고 삐뚤어진 그녀를 바로 잡아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그녀의 말처럼 나는 순수한 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내가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주고 일깨워줄 수 있다고 믿었던 한 때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굉장히 변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세상이, 그리고 사랑이 그렇게 염세적이지만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뭔가가 있길 바랬다.

  하지만, 결국 나 역시 그들과 혹은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날은 마침 그녀의 수능이 끝나고 그녀가 원하던 대학의 본고사가 며칠 남지 않은 초겨울의 쌀쌀한 날이었다. 세밑이라 사람들이 저마다 명동이니 종로니 마구 넘쳐흘렀고, 나는 아직까지 잘리지 않은 신문사의 마감으로 바빴다. 그즈음 들어온 우리 팀으로 새로 기자가 배속되어 왔다. 사실 기자라고는 했지만 수습기자였고 어찌 보면 기자라는 느낌보다는 아르바이트생에 가까웠다. 녀석은 대학을 졸업을 앞둔 여자였다. 낙하산이라는 설이 분분했는데 나에게 그런 것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선머슴아로 늘 통해왔듯 털털하게 굴길 원했지만 애초부터 그녀는 숨기기에는 너무도 여성스러운 모습을 본래부터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접근하고 집적대던 회사의 남자들이 하나둘 그녀에게 걷어차이면서 나는 굳이 취재를 나갈 때마다 그녀가 나를 지목한다는 것을 선배에게 들었다.


  “널 원하고 있는 거야. 한번 슬쩍 떠봐. 얼른 달려들걸?”


  “무슨 소리예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구 그런 말 하고 다녀요. 송 기자가 들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걸요? 녀석 성격에… 어휴! 난 싫어요.”


  “까짓 거 밑져야 본전이잖아. 한번 시도해봐.”


  그즈음의 나는 혜진이 공부에 집중하는 것을 도와준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똑같은 핑계로 그녀가 나를 피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생각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혜진이 점차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고 뭣도 아닌 이런 어색한 관계가 육체적인 관계만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 마뜩지 않았다. 내가 무슨 철저한 사랑의 전도사도 아닌데 그녀가 참다운 사랑에 대해 깨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말인가. 나는 그럴 그릇도 아니거니와 열 살이나 차이가 나는 속은 늙을 대로 늙어 내 속을 뻔히 들여다보는 그녀에게 차츰 지쳐가고 있었다. 무슨 수로 내가 그런 그녀의 그 날카롭고 괴팍한 기복 심한 성격을 맞춰가며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스물이 되면 난 서른이 된다.라는 단순한 논리도 논리였지만, 그 10년의 나이 차이가 우리 둘이 함께 있을 때면 도리어 내가 열 살 쯤은 어려지는 듯한 분위기가 되는 것이 더더욱 싫었다. 나보다 10년이나 어린 녀석에게 끌려다닌다는 느낌은 내게 그녀가 가진 새로운 매력이나 느낌을 찾고 싶어 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나를 계속 파트너로 지목하던 송 기자의 속내를 떠볼 수 있는 기회가 자연스레 마련되었다. 둘이 함께 취재를 나간 횟수에 비하면 그런 자리가 너무 늦게 온 건지도 몰랐다. 취재가 늦게 끝난 저녁, 식사나 함께 하자며 자리를 마련해준 선배가 송 기자가 화장실을 간 사이 슬그머니 도망가듯 자리를 피해 주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로 돌아온 송 기자는 한 번쯤 둘만 술을 마시고 싶었다면서 나를 선선히 이끌었다. 하필이면 그날이 혜진의 본고사 시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그때까지만 해도 난 분명히 기억했다. 혜진이 나의 와이프라도 된 냥 나는 왜 하필 그녀 생각을 했을까. 최소한 그렇게 맞땋뜨리기 전까지 나는 왜 내가 갑작스레 혜진을 떠올렸는지 알지 못했다.


  “늦었어요. 집에 들어가야지요.”


  내가 먼저 취해 보이는 그녀에게 말했다.


  “선배는 내가 여자로 보이지 않아요? 선배, 혹시 여자 있어요?”


  “무슨 말입니까?”


  “솔직히 내가 선배를 처음부터 좋아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회사에 있는 모든 총각들이, 아니, 몇몇 유부남들까지 포함해서 침을 흘려대면서 나한테 집적대는데 선배는 말 한 번도 먼저 안 걸더군요. 그래서 은근히 오기도 나고 그랬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나도 모르게 좋아져 버렸어요. 나두 여자라구요. 내가 싫다는 사람들은 집적거리고 좀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은 날 봐도 여자 취급도 하지 않으니 내 기분이 어떻겠어요?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취했어요. 들어가요.”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갈 생각으로 난 그녀의 옆구리를 안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렇게 그녀를 억지로라도 일으켜 세운다는 것이 비틀거리며 오히려 내가 그녀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가 갑자기 내 머리를 움켜잡으며 입술을 맞댔다.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그녀를 떼어내려 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거칠기 그지없었고 술기운을 빌어서인지 억세게 날 잡아끄는 힘과 동시에 밀려드는 그녀의 혀를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키스를 당해버렸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고,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는 그녀의 모습에 어떻게 할 줄 몰라 얼굴만 달아올랐다. 아주 잠시였는데 왜 그렇게 그 시간이 길고 당혹스러웠는지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본능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이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해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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