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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10. 2022

이 힘겨움의 끝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지쳐가더라도..

그저 좌절하고 포기해선 안된다. 끝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子路問政, 子曰: “先之勞之.” 請益, 曰: “無倦.”     
子路가 政事를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솔선하고 부지런히 해야 한다.” 더 말씀해 주실 것을 청하자,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하셨다.     


이 장은 ‘자로(子路) 편’의 첫 장이다. 자로(子路)는 <논어>에서 주인공(?)인 공자를 제외하고서는 그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다.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된 이 편에서는 단 세 번밖에 나오지 않지만, 전체를 통틀어 41회나 등장하니 <논어>를 읽고서 수많은 공자의 제자들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자로(子路)만큼은 어떤 인물인지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이와 같은 이유가 깔려 있다 하겠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보면, ‘자로초견(子路初見)’에 자로(子路)와 공자의 운명적인 첫 만남을 다룬 일화가 나온다.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했다.

“그대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는 긴 칼을 좋아하지요.”

“나는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대가 잘하는 것에 학문을 더하게 되면 아무도 거기에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배우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이요?”

“무릇 어진 임금도 간하는 선비가 없으면 정사(政事)를 돌볼 수 없게 되고, 선비도 가르쳐주는 친구가 없으면 제대로 들을 수가 없게 된다. 미쳐 날뛰는 말을 몰 때는 채찍을 잠시도 놓으 수 없고, 활을 당길 때는 다시 바로잡을 수 없고, 나무는 먹줄이 그려져야 곧아지고, 사람은 간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성인(聖人)이 된다. 배움을 얻고 묻는 것을 중요시한다면 그 누군들 도리를 따르지 않겠는가? 어진 사람을 헐뜯고 선비를 미워하면 반드시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군자는 학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라네.”

“남산에 대나무가 있는데 여리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곧고, 그것을 잘라서 쓰면 견고한 갑옷과 투구도 뚫을 수 있소. 이런 것으로 말한다면 도대체 배움이 뭔 필요가 있단 말이요?”

“노송나무 화살에 깃털을 꽂고, 화살촉을 숫돌에 갈아서 쓴다면 그 뚫는 것이 더 깊어지지 않겠는가?”


공자의 이 설명에 자로가 두 번 절하고 말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이것이 한때 건달로 단순 무식하던 자로(子路)가 스승 공자를 따르게 된 유명한 첫 만남 일화이다.     


다시 이 장으로 돌아와 보자. 그런 다혈질 단순무식의 화신 자로(子路)가 다스림에 대해 물었다. 그의 눈높이에 맞춰 대답해준 내용은 바로 ‘솔선수범하는 실천’이었다. 이 단순하면서도 정작 지키기 어려운 가르침에 대해 소동파(蘇軾(소식))는 다음과 같은 주석으로 배우는 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백성들이 행해야 할 것(道理(도리))을 자신(爲政者(위정자))이 먼저 솔선하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을 자신이 부지런히 애써서 하면 백성들이 비록 수고롭더라도 〈윗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앞서 일관되게 공자가 계강자(季康子)에게 다스림의 요지라고 말했던 ‘너나 잘해!’의 연장선에서 나온 답변이다. 사실 원문의 ‘勞之’를 나는 ‘부지런해야 한다’라고 범범하게 해석했지만, 실제로 이 부분에 대한 후대 학자들의 해석 논란도 제법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자신이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라고 보는 해석부터, ‘백성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일하게 한다’와 ‘백성들로 하여금 수고로움을 잊게 한다’에 이르기까지 그 해석들은 다양했다. 그 의미와 비근한 예로 <주역(周易)>의 兌卦(태괘) 彖傳(단전)에 나오는 ‘說以先民(열이선민), 民忘其勞(민망기로)’를 들기도 하는데, 그 의미는 ‘기뻐함으로써 백성에게 솔선하면 백성들이 수고로움을 잊는다’라는 뜻이다.      


위에 소동파의 주석은 그중에서도 마지막 해석에 비중을 두어 설명하였는데, 그 근거는 끝나지 않은 이 장의 마지막 공자의 언급과 유관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솔선수범을 말하는 스승의 답변에,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단순 명료한 답변이라 의아했던 탓인지 자로(子路)가 뭔가 더 말해줄 것이 없냐고 묻는다. ‘請益’은 스승의 한 말씀이 끝나면 다시 한 말씀을 청하는 예법으로 뭔가 자로(子路)가 예를 어기고 더 알려달라는 식의 무례를 범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자 공자는 조용히 한 마디를 덧붙인다.      


“無倦(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원래 앞서 ‘안연(顏淵) 편’의 14장에서 공부했던 거지무권(居之無倦)의 의미와 통한다. 공자가 자로(子路)의 요구에 위와 같은 말을 덧붙이게 된 배경에 대해 오 씨(吳棫(오역))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용맹스러운 자는 일하기를 좋아하나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것으로써 말씀해 주신 것이다.”     


몇몇 현대 해설서에서는 다혈질에 일을 벌이고 추진력에 대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자로(子路)에게 이런 식의 설명을 한 공자에 눈높이 교육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엉뚱한 해설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똑같은 내용을 보고서도 어떻게 그렇게 다르게 볼 수 있는지 참으로 신기할 뿐이다.     


아울러 처음 내용까지 거슬러 올라가, 위정자도 아니고 실천력밖에 없는 자로(子路)에게 솔선수범을 언급한 것이 어울리지 않는 방편 설법이라고 이해한 것도 전체적인 공자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오독의 산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대개 용맹스럽다고 하는 다혈질 성향을 가진 이들의 가장 큰 맹점은 일을 벌이기만 하고 마무리할 때까지 일관되고 꾸준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공자는 제자 자로(子路)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않고, 그것을 제대로 실천에 옮기는데 가장 문제가 될만한 부분을 지적하여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즉 공자가 덧붙인 이 말의 행간이 품은 의미는, 조금 노력해보고서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염증을 내어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권계인 셈이다.     


이러한 공자의 설명방식과 배려에 대해 정자(明道(명도))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자로가 정사를 묻자 공자께서 이미 말씀해 주셨고, 더 말씀해 줄 것을 청하자 ‘게을리하지 말라.’고 하셨을 뿐이요, 일찍이 다시 말씀해 주신 것이 없었으니, 우선 깊이 생각하게 하신 것이다.”     


무언가를 더 추가로 이야기해주는 대신 그에게 곱씹어 생각할 여지를 하도록 하는 것, 공자만이 할 수 있는 가르침의 방식이라 할 것이다.   

  

정사(政事), 이른바 다스림에 대한 개념을 설명할 때 공자의 가르침이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실제로 정치행위를 하는 자들의 언행을 살펴보면 관념적인 지식을 앞세우고 도대체 정확하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를 언행을 정치의 본질인 것처럼 당당히 말하는 자들을 보곤 한다.     


구체적인 잘못에 대해 지적을 하고 문제점을 이야기하며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들은 버젓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제가 있는 부분을 보완하여 앞으로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논의하며 향후 더 나은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얼핏 들으면 정말 멋진 말로 들리지 않는가? 하지만 이 대답에는 어떠한 구체적인 방법도 그 실천 방식도 들어가 있지 않다. 그들은 언제나 이런 공허함으로 이것도 아니면서 저것도 아닌 스텐스를 취한다. 그것은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최대한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도록 하면서 그럴싸해 보이도록 말하기를 열심히 노력하고 연구하는가에 대한 것은 인정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정치는 하나의 본질, 바로 백성을 돕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설명하는 공자의 정치관은 오늘날 선진 시민 사회가 추구하는 정치관과 상통한다. 모든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정신은 공자가 그렇게 주창하던 덕치(德治)에 다름 아닌 용어이고 개념이다. 이 장의 가르침은 다로 그 덕치(德治)를 이루고자 하는 자가 어떻게 그것을 실천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간명하게 말하고 있다.     


내가 이 장을 읽을 때마다 공감하는 부분은 뒤에 이어 덧붙여 설명한 내용이다. 참으로 현실적인 설명이라서인데 부정하고 부조리한 것을 바로잡는 노력을 기울임에 있어 쉽게 지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들 때마다 이 문장이 떠오르곤 한다.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결코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아니 여러 번을 고치고 수정해도 그것이 바른 자리로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수많은 노력과 수고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나 개인적으로는, 정치를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행위’라고 설명하곤 한다.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만 그것을 백성들이 보고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백성들이 수동적으로 정치행위를 하는 자들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종속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늘 강조하듯이 정치는 정치꾼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행하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이 장에서 설명한 솔선수범의 다른 표현이고,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에서 진정한 정치가 시작된다고 가르침을 주었던 것은 바로 공자였다.     


위정자가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고 솔선수범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백성들이 바로 선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앞에서 설명하고 공부한 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소시민이고 백성의 입장이며 대단한 정치행위를 하는 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바로 당신이 조금씩 사욕(私慾)을 정당화하면서 더 나쁜 정치꾼들이 있다면서 자위하고 슬쩍 넘어가는 순간 일은 사회는 좀 먹기 시작하면서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게 된다.     

아주 작은 거짓마저도 용납하지 않으며 언제나 바른 길로만 살라고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의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언제나 욕을 하고 비난하는 정치꾼들은 대놓고 자신들의 사욕을 차지하겠다고 국회의원 배지를 노리고 그것에서 떨어지면 지자체 장이라고 하면서 권력욕을 놓지 못한다. 하지만 이미 사욕을 드러내 놓고 세상을 바꾼다던가 사회를 바로잡겠다는 대의명분조차 멀리 한 채 ‘직업적 정치’를 목적을 가지고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모두가 잘못인 줄 안다. 그런데 그들을 욕하는 당신이 그런 그들의 부귀와 권력을 부러워하며 그것을 얻지 못한 질시를 보인다던가 언제든 당신도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잘못된 야욕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당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사회인가에 대한 부분을 나는 경종을 울리고 싶다.     


결국 몇몇 소수에 의해 세상이 이끌어져 가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선거철에 그 야욕을 드러낸 자들이 평상시 눈을 내리깔고 보는 국민들에게 넙죽 엎드리는 쇼를 보면서 그리고 그것이 4년에 한 번씩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총선과 별개로 지방선거니 대선이니 하는 사이사이 이벤트로 거의 2년에 한 번씩 보면서도 그저 반복할 뿐 개선되지 않는 이유를 묻고 싶다.     


이 장에서 공자의 설명처럼 잘못을 알고 그것에 대해 반성하고 솔선수범해서 고치고 실천하는 것에 대한 노력이 일회성으로 짜잔 하고 거듭남을 바로 보여주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타락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노력해도 한 번에 결과가 드러나지 않고 잘못을 바로잡아도 다시 그 잘못 보다 더 큰 잘못이 아무렇지도 않게 눈앞에 나타나 기운을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자는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노력하는 모습으로는 누구 못지않았던 자로(子路)에게 이와 같은 권계를 화두로 던져준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에 좌절하거나 지루하다고 여겨 결코 게을러지지 말라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에 이렇게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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