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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11. 2022

누구를 등용하든 자신의 마음만 바로 잡혀있다면...

인재를 어떻게 등용할까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仲弓爲季氏宰, 問政, 子曰: “先有司, 赦小過, 擧賢才.” 曰: “焉知賢才而擧之?” 子曰: “擧爾所知. 爾所不知, 人其舍諸?”     
仲弓이 季氏의 家臣이 되어 政事를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有司에게 먼저 시키고 작은 허물을 용서해주며, 賢才(德이 있는 자와 才能이 있는 자)를 등용해야 한다.”     

이 장의 내용은 이전에 보아왔던 다스림에 대한 문답처럼 간략 명료하지 않다. 기본적인 구조는 실제적인 실천 사안에 대해 공자가 가르침을 내리고 구체적인 방안을 다시 묻는 제자에게 그 방안의 요지를 알려주는 방식으로 익숙하지만, 내용이 심상치 않다.      


중궁(仲弓)이 실제 정치에 나서 제대로 뭔가 해보겠다고 스승에게 다스림을 묻는다. 스승의 가르침은 세 가지로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그런데 왜 그 담당자들에게 먼저 일을 시키는지, 작은 허물은 어떤 것을 말하는지 덕이 있는 자와 재능이 있는 자는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설명 없이 쭉 한 방에 설명을 마친다.     

주자는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공자의 가르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상세한 설명을 붙였다.     


‘有司(유사)’는 여러 직책이다. 가신은 여러 직책을 겸(총괄)한다. 그러나 모든 일을 반드시 저(유사)에게 먼저 시키고 뒤에 그 이룬 공적을 살핀다면 자신은 수고롭지 않고서도 일이 모두 거행될 것이다. ‘過(과)’는 실수로 잘못한 것이다. 큰 잘못은 일에 혹 해로운 바가 있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지만, 작은 허물은 용서해 주면 형벌이 남용되지 않아 인심이 기뻐할 것이다. ‘賢(현)’은 덕이 있는 자이고 ‘才(재)’는 재능이 있는 자이니, 이들을 등용하여 쓰면 유사가 모두 적임자〔其人(기인)〕를 얻어 政事(정사)가 더욱 닦여질 것이다.     


세 가지 내용에 대해 찬찬히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담당자들에게 시킨다는 것은, 현재 중궁(仲弓)이 가신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강조해서 한 말이다. 그들에게 먼저 시키라 함은, 현실 정치라는 것이 가신의 위치에 있으면서 혼자서 모든 것을 살피고 처리하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뿐더러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요지를 설명한 것이다. 장관이 민원업무를 직접 내려와서 일일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면서 정작 장관이 해야 할 총괄 업무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중앙 공무원이나 지자체 공무원들이 폭탄 돌리기를 하며 업무분장을 외치고 자신들의 책무를 회피하고 복지부동하는 것과는 별개로 본래의 조직개편이 세분화되어 있는 것은 이 첫 번째의 공자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첫걸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 의미를 대한민국 공무원들이 살리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뻔한 질문은 하지 않기로 한다.     


둘째, 작은 잘못이란 무엇인지 명확히 구분한다. 사실 잘못에 크고 작음이란 있을 수 없다. 잘못은 잘못일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작은’ 잘못이란, 일의 대세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을 말한다. 잘못이라고는 하지만 현대어로 ‘실수’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실수라고 하더라도 일 자체를 망쳐버리거나 다른 과정에까지 악영향을 끼친 경우 그것은 용납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주자의 설명에 의하면, 일의 대세에 영향을 주지 않고 그것이 의도했거나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니 이상, 넘어가 줄 수 있는 선이라고 판단한다면 눈감아주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 명료하다. 모든 잘못에 형벌을 가하게 되면 눈치 보고 오히려 안 좋은 효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실리적이고 현실적인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의 지침은 인재를 등용할 수 있는 인사권의 있는 가신(家臣)의 위치에 있으니 인재를 ‘제대로’ 등용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굳이 콕 집어서 ‘賢(덕이 있는 자)’와 ‘才(재능이 있는 자)’로 구체적인 의미를 규정한 것은 다시 한번 잘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두 가지 모두 갖춘 자라 하지 않고 두 가지를 열거한 이유를 포함해서 말이다.     


중궁(仲弓)은 스승의 설명을 듣고 앞의 두 가지는 이해를 했다는 전제하에 세 번째 가르침에 대해 도대체 그런 인재를 알고 어떻게 등용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묻는다. 그러자 공자가 무심코 툭 던지듯 말하는 진리가 배우는 자들의 마음을 울린다.     


“네가 아는 자(賢才)를 등용하면 네가 미처 모르는 자를 남들이 내버려 두겠느냐.”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학도들이 있다면 내가 단언컨대 다시 한번 잘 읽고 그 행간의 의미까지 파악하라고 죽비를 살짝 머리에 찍어주도록 하마. 주자 역시 무심한 듯 이 장에 대한 주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仲弓(중궁)이 한 세상의 賢才(현재)를 다 알 수 없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이것으로써 말씀해 주신 것이다.     


무심한 듯 하지만, 당신이 처음 이해했던 것처럼 중궁(仲弓)의 질문이 가진 핵심은 ‘어떻게 인재를 구분할 수 있겠는가?’가 아니다. 세상 전체에 그 인재들을 모두 챙기고 싶은 욕심을 스승인 공자가 바로 읽어낸 것이다. 그런 인재를 찾아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세상에 그런 능력 있는 인재를 모두 알지 못하면 어쩔지에 대한 염려야말로 욕심 중에도 욕심 아닌가?     


그런데 공자의 대답이 중궁의 욕심보다 더 세다. 자신이 아는 그 몇을 등용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결코 나머지 남아 있는 인재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 그 말이 갖는 무게나 행간의 의미가 얼마나 깊은지 곰곰이 곱씹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정자(明道(명도))는 공자의 가르침을 통해 중궁의 레벨과 성인 공자의 레벨이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사람은 각기 자신의 친척을 친애하여야 하니, 그런 뒤에 친척만을 친애할 뿐이 아니다. 중궁이 ‘어떻게 현재(賢才)를 알아 등용합니까?’ 하고 묻자, 공자께서 ‘네가 아는 현재(賢才)를 등용하면 네가 모르는 현재(賢才)를 사람들이 내버려 두겠느냐.’라고 하셨으니, 중궁(仲弓)과 성인(聖人)의 마음씀의 크고 작음을 볼 수 있다. 이 뜻을 미루어 나간다면 한 마음이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고 한 마음이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다만 公(공)과 私(사)의 사이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세상의 모든 인재를 확인하고 자신이 혹시라도 그 인재를 하나라도 놓칠까 싶은 마음도 일반인보다는 앞서는 ‘특별한’ 욕심이라 할 텐데, 성인 공자는 대답으로 제자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특별한 사람을 모두 골라 쓰지 않더라도 사람 한 명만 제대로 쓰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세상 사람들이 인재라고 불리는 이들을 추천할 것이며, 자신이 인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자천(自薦)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단순한 설명 같지만 지극히 오묘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성인의 경지를 보여주는 이치에 다름 아니다. 

    

조금 과장해서 설명하자면, 공자의 이치가 가리키는 본질은 인재를 바로 판단하여 등용하라는 말이 아니다. 인재가 아니어도 설령 부족한 사람을 들어 쓰더라도 그 진심을 보인다면 정말로 능력이 있는 자를 놓칠 리가 없다는 설명으로 사람을 들어 쓰는 자의 마음가짐을 가리키는 것이다. 행여 능력이 좀 부족한 사람이라도 과감하게 등용하고 그를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보다 훨씬 능력 있고 자질이 뛰어난 인재들은 당연히 모습을 스스로 드러낼 것이며 그들의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어렵고 또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또 가만 생각해보면 또 그 얼마나 멋지고 상상만으로도 신이 나는 세상이란 말인가? 능력을 갖춘 사람을 쓰면 쓰는 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을 쓰더라도 누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쓰는가에 따라 결국 인재는 그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 만든다는 것으로 결국 인재를 등용하는 것으로 세상이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인재를 쓸 수 있는 그릇을 갖춘 위정자가 세상을 바꿀 토대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배우는 자들에게 이 장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범 씨(范祖禹(범조우))는 반대의 경우를 설명하며 그 진의(眞意)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일을 有司(유사)에게 먼저 시키지 않으면 군주가 신하의 일을 행하게 되고,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래에 온전한 사람이 없게 되고, 현재를 등용하지 않으면 모든 직무가 폐해질(마비될) 것이니, 이 세 가지를 잃으면 季氏(계씨)의 家臣(가신)도 될 수 없는데, 하물며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이겠는가.”     


이 마지막 주석에서 세 번째 내용까지 포함하여 그 세 가지를 모두 잃게 되면 계씨의 가신조차 될 수 없는데 천하를 다스림을 말하는 것에는 더 이를 것도 없다는 정리이다.     

최근에 미국 국회의 아줌마가 한번 들른 것만으로도 난리가 난 동남아의 이름 모를 중국의 속국에 해당되어 ‘차이니즈 타이베이’라고 불리는 땅에는 인재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당 야당이 평생을 두고 싸우면서 다른 쪽이 정권을 잡아도 정작 인재가 없다며 상대편 쪽에서 사람을 빌려올 지경의 난장판 정치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 땅은 망조가 들어 중국이 굳이 자신의 땅이라며 침략하거나 먹으려 들지 않더라도 스스로 망조를 택하고 있다.     


남의 땅 이야기할 것도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뭐 그 땅과 많이 다른가? 인재가 없어 대통령 후보로 나설 자가 없어 거기서 거기인 두 명의 망조 들린 자들이 붙어서 종이 한 장 차이로 이전 정부의 반대 심리가 지금의 대통령이라는 자를 뽑았다. 그런데 반년도 되기 전에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손가락을 자르고 싶어지는 상황이 정말로 왔다. 그 말을 하며 절대 뽑지 말라던 자는 그 곁에 바로 붙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정치판에서 밀려나지 않겠다고 계속 버둥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 수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어디에 인재가 있단 말인가?’라고 한탄할 필요가 없다는 요지가 바로 이 장의 가르침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등용하는 인사권자의 준비된 마음가짐에 있다.      

기어코 정신없이 술 먹고 운전하고서도 당당하게 벌금도 낼 수 없다며 정식 재판을 청구하여 선고유예를 받아낸 희대의 교육부 장관이 코미디쇼를 하던 끝에 잘라졌다. 스스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분명히 강판되었다. 그런데 등용될 때 인사권자가 보였던 행동이 어떠했는지 사람들이 잠시 잊었던가보다. 잊을 만도 하다. 그녀를 잘라버린 이유 중에서도 자신만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이유가 가장 컸으니 말이다.       


청문회라는 형식을 거쳐야 임명이 가능한 자들이 청문회장에 나와 영혼까지 탈탈 떨리고 결국 자식 문제로 개망신을 당하고 이제까지 자신들이 살아온 주마등(走馬燈)을 뜬 눈으로 지켜봐야 하는 꼴을 당하는 것에 모두 함부로 나서면 뭐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몸을 사렸다.     


그런데 이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망신을 당하든 영혼이 탈탈 털리든 며칠 몇 달만 장관직에 머물더라도 마지막 직으로 평생을 불리고 싶다는 사욕(私慾)에 기어코 청문회장에 나서는 자들도 적지 않다. 이 장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렇게 사리사욕에 부나방처럼 죽는 줄도 모르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다면 그것은 너무도 당연히 인재라고는 할 수 없다.     

앞서 잠시 생각해보라도 했던 화두를 생각해보자. 인재라고 설명했던 부분을 둘로 나눠 설명하되 덕을 갖춘 자와 재능이 있는 자를 얻어야 한다고 했다. 둘 다 갖춘 자가 최상임을 모르는 이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두 가지뿐이었을까? 이것은 내면과 외면을 나눈 것이다. 덕을 갖춘 자는 실질적인 행정업무보다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근본적인 마음가짐을 주변의 이들에게 보여주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인재이고, 재능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실무적으로 그러한 덕으로 변화된 마음을 기본으로 하여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해낼 수 있는 실천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두 가지 모두 중요하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만을 강조하지 않음을 뜻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성인 공자라면 재능 있는 것보다 덕을 갖춰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왜 이 두 가지를 동일한 비중으로 똑같이 인재라 표현했는지를 생각해보면, 공자의 실용적인 정치감각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작금의 우리나라에는 덕을 갖추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재능도 없어 일도 못하는 이들뿐이다. 그리 생각하는 것이 나 한 사람뿐이라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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