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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20. 2022

그냥 죽어버리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시도도 해보지 않고 삶을 접는 것이 仁일까?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 “未仁乎?”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     
子路가 말하였다. “桓公이 公子 糾를 죽이자, 召忽은 죽었고 管仲은 죽지 않았으니, 〈管仲은〉 仁하지 못할 것입니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桓公이 諸侯들을 규합하되 兵車(武力)를 쓰지 않은 것은 管仲의 힘이었으니, 누가 그의 仁만 하겠는가. 누가 그의 仁만 하겠는가.”     

이 장에서는 앞에서 공부했던 제(齊) 나라 환공(桓公)의 이야기 중에서도 관중(管仲)에 일화를 들어 그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 우직했던 자로(子路)의 생각에는 관중(管仲)이 인(仁) 하지 못한 인물일 것이라고 먼저 비판하며 물었으나, 스승 공자는 그에 동의하지 않고 관중(管仲)이 등용된 과정에서부터 관중(管仲)이 이후 펼친 정치방식에 대해 허여(인정)하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주자는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주석을 통해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春秋左傳(춘추좌전)>을 상고해 보면 제나라 양공이 無道(무도)하자 포숙아는 公子(공자) 소백을 받들어 莒(거) 나라로 망명하였고, 無知(무지)가 양공을 시해하자 관이오(관중)와 소홀은 공자 규를 받들어 노나라로 망명하였는데, 노나라 사람들이 공자 규를 제나라로 들여보내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여 소백이 들어가니, 이가 환공이다. 환공이 노나라로 하여금 자규를 죽이게 하고 관중과 소홀을 보내 줄 것을 청하자, 소홀은 죽고 관중은 〈함거에〉 갇히기를 자청하였는데, 포숙아가 환공에게 말하여 정승을 삼게 하였다. 자로는 관중이 군주를 잊고 원수를 섬겼으니, 마음을 차마(잔인)하고 천리를 해쳐 仁(인)이 될 수 없다고 의심한 것이다.     

관중의 초상

제나라 환공과 관중의 일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齊) 나라의 건국 이야기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번 기회에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齊) 나라는 주(周) 나라를 건국하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일명 강태공으로 일반인들에게 불리던 태공 여상(呂尙)에게 봉해진 나라로 자손들이 대대로 군주를 이어왔다. 환공의 아버지 희공(僖公)은 태공망의 13대손이었고 그에게는 제아(諸兒), 규(糾), 소백(小白)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자였던 제아는 이미 태자로 봉해졌고 왕위는 이후 장자인 제아가 계승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희공은 그의 동생 이중년(夷中年)을 지나치게 아꼈던 나머지 동생이 죽자 동생의 아들인 무지(無知)를 태자인 제아와 동급으로 대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만다. B.C. 697년 마침내 희공이 죽고 태자 제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양공(襄公)이다. 양공은 하필이면 자신의 친누이였던 문강(文姜)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이른바 근친상간의 금지된 사랑을 맺고야 만 것이다.     


양공이 즉위하여 가장 먼저 한 명령은 사촌동생이던 무지(無知)에 대한 선왕의 지나친 예우에 대한 부분을 모두 폐지시킨 일이었다. 양공 입장에서 보면 태자 때부터 아무런 계승권도 없는 사촌동생이 자신과 동급의 대우를 받는 것에 상당히 불만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무지(無知)는 무지대로 자신이 받던 특별대우가 졸지에 모두 취소되자 신분이 강등된 듯한 상황에 상당한 불만을 품게 된다. 

그러던 중에 노나라로 시집갔던 문강이 남편인 환공(桓公; 이름이 같지만 제나라 환공이 아니니 주의할 것)과 함께 제나라로 근친(覲親)을 왔다. 다시 만나게 된 양공과 친누이 문강은 재회의 기쁨에 다시 금지된 사랑에 불을 지피고 만다. 얼마나 대놓고 그런 애정행각을 벌였는지 당연히 문강의 남편이 그 사실을 눈치채고 만다. 그는 대노하여 아내인 문강을 몰아세웠고, 문강은 오빠인 양공에게 달려가 살려달라며 애원하며 매달리게 된다.     


양공은 사욕인 애정에 눈이 멀어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사랑이자 여동생을 핍박하는 그녀의 남편을 죽여버리고 만다. 그리고서는 여동생 문강을 제나라에 그대로 머무르게 하며 근친상간의 불륜을 계속 유지하는 실정(失政)을 저지르고 만다. 사생활이 그리 문란할 지경이니 정치가 제대로 운영될 리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기분 내키는 대로 명을 내리니 나라의 정치는 점차 혼란스러워져만 가고 그에게 아부하는 간신배들만이 조정에 들끓었다. 이에 권력투쟁 속에서 자신의 생명이 위협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 왕자 규(糾)는 관중(管仲), 소홀(召忽)과 함께 자기 어머니의 나라였던 노나라로 망명을 하게 되는데, 이때 배가 다른 형제였던 소백은 어머니의 나라였던 위나라로 가지 않고 포숙아(鮑叔牙)와 함께 거(莒) 나라로 망명하며 왕자들이 찢어지게 된다.     


양공의 실정(失政)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세력들은 제 나라의 정치가 점차 어려워질 지경에 이르자 마침내 무지(無知)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고 그 반란은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무지(無知) 역시 그리 총명한 인물이 되지 못했던 터라 양공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기분 내키는 대로 정치를 행하여 즉위한 지 수개월도 채 되지 않아 살해되고 만다. 그렇게 B.C. 685년 제 나라의 군주 자리가 공석이 되자 이 군주 자리를 놓고 남아 있던 왕자 규와 소백이 골육상쟁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이게 된다.     

뛰어난 기지를 갖추고 있던 소백은 관중의 계략을 간파하여 결국 치열한 공방전 끝에 승기를 잡게 된다. 결과적으로 왕자 규(糾)는 죽음을 당하고 그의 오른팔이던 관중(管仲)은 포로로 사로잡히는 치욕을 당하게 된다. 그렇게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 소백이 바로 이전 장에서부터 언급되었던 첫 번째 패자(霸者), 제(齊) 나라 환공(桓公)이다. 하필이면 모시던 군주가 달라 적의 입장이 되긴 했지만 관중과 포숙아는 천하에 둘도 없는 우정의 대명사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환공의 오른팔 역할이던 포숙아는 환공이 제나라로 귀국하려는 중도에 자신을 방해하여 죽이려 들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관중을 죽이려는 것을 보고 만류하며 다음과 같이 고했다.     


“주군께서 오직 제나라만을 다스리려 하신다면 이 포숙아 한 사람의 힘으로도 족할 것이오나 만약 천하의 패자가 되려 하신다면 관중(管仲)이 아니고서는 그 일을 해낼 사람이 없습니다.”

포숙아의 진의(眞意)를 읽은 환공은 천하를 제패할 패자의 풍모로 관중(管仲)의 죄를 사하고 오히려 그를 중용하게 된다. 포숙아의 예언(?)처럼 관중은 환공의 책사가 되어 이후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시키고 천하를 제패하는데 큰 공헌을 세우게 된다.     


환공이 즉위한 것이 B.C 685년이고 천하를 제패하고 패자(霸者)로 인정받은 것이 환공 7년(B.C.679년)으로 현재 산동성 복현에 자리 잡고 맹주로서의 힘을 자랑하던 때가 태공망의 시대로부터 370년이 지난 시기였다.     


원문에서 자로(子路)가 관중(管仲)을 비판하며 자신이 섬겼던 왕자 규(糾)의 원수에 해당하는 환공(桓公)을 다시 섬겼으니 인(仁)하다고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단편적인 자신의 평가를 내린 것인데, 공자는 제자의 편협한 생각에 대해 환공의 책사가 된 후 관중(管仲)이 펼친 ‘諸侯들을 규합하되 兵車(武力)를 쓰지 않은 정치행위’에 더 높은 평가를 내린다.     

공자의 대답에 담긴 가르침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여 배우는 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九(구)’는 《春秋左傳(춘추좌전)》에 ‘糾(규)’로 되어 있으니, 감독함이니 古字(고자)에 통용되었다. ‘병거를 쓰지 않았다는 것’은 위엄과 힘을 빌리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如其仁’은 누가 그의 仁만 하겠는가라고 말씀한 것이니, 또 두 번 말씀하여 깊이 허여 하신 것이다. 관중이 비록 仁人이 될 수는 없으나 그 혜택이 사람들에게 미쳤으면 仁의 功이 있는 것이다.     


자로(子路)가 주장한 바와 같이, 환공은 노나라 莊公(장공)에게 압력을 가해 규를 죽이게 했다. 그를 모시던 소홀(召忽)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관중은 따라 죽지도 않았고 오히려 목숨을 구제받고 중용되어 적이었던 환공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베풀었으니 그 부분에 대한 자로(子路)의 해석이 깊이가 얕다고만 폄하할 것도 아니다.     


‘헌문(憲問) 편’에서 인재 등용에 대한 부분을 일관되게 언급하고 주제로 삼고 있음은 이미 주지한 바 있다. 앞서 인사권자에 해당하는 위정자 제 나라 환공의 패자로서의 인정받을만한 부분을 진 나라 문공과 비교하여 언급하고 나서 바로 다음 장에서 그가 펼칠 훌륭한 정치 중에서도 인재 등용에 대한 부분을 관중(管仲)과의 일화를 통해 언급한 것도 이 편에서 설명하고 있는 주제와 무관하지 않다.     


언뜻 원문을 읽으면 관중(管仲)을 칭찬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공자는 관중(管仲)을 높이 평가하고 허여 했다기보다는 그러한 관중(管仲)이 역사를 이룰 수 있도록 등용한 제 나라 환공이 인재를 등용하는 그릇과 그 방식에 대해 보이지 않게 호평을 보였음을 읽어낼 수 있다.     


인(仁)을 완성한 인물로 인정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관중(管仲)이 제 환공의 재상으로 40여 년이나 집권하면서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방면에 있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천하를 제패하는 초석을 세운 공적에 대해서는 허여(인정)하는 공자의 평가는 지극히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자신이 따르던 주군이 죽음으로 권좌에 앉는 것에 실패했다면 소홀(召忽)과 같이 따라 죽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공부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의 위기 앞에서 구제받은 관중은 재상으로 중용된 이후 보인 행보에서 제후들을 규합하는 데 있어 무력을 사용하지 않도록 지략을 펼쳤다. 만일 그저 무력만으로 제후들을 제압하려 들었다면 중원 일대는 물론 중국 천하 전체가 전란에 휩싸였을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즉, 공자가 인정한 가장 큰 관중의 공적은 천하를 제패한 것이 아니라 그 공적을 세움에 있어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지 않는 방식으로 평화적 결과를 도출해낸 데 있다.     


공자가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던 것은 누차 강조한 바 있다. 공자는 자신의 공부는 물론이고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과거 역사적인 사실을 공부하고 그것을 통해 현재에 얻어내고 실행하는 가장 큰 목적은 현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만일 관중(管仲)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중용되어 재상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사리사욕만을 채우고 백성을 우선으로 한 정치개혁을 수행하지 않았더라면 적이었음에도 중용했던 제나라 환공의 안목이나 판단에까지 좋은 역사적 평가가 가해질 리 만무했다. 아울러 포숙아(鮑叔牙)가 단지 죽마고우를 살리겠다고 되는대로 떠들어댔던 것이 아님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공자는 깨우치고 그 깨우침을 다시 가르침으로 내어놓는다.     

처음 왕자 규(糾)의 책사 역할로 천하를 도모하려 했던 관중(管仲)이 자신이 죽이려 했던 환공(桓公)에게 중용되어 자기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던 계기는 물론 제 나라 환공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인재 등용은 그가 인재임을 알아보고 등용하는 군주의 발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전제는 그 인재가 ‘준비된 진짜’ 여야만 한다. 그래서 다음 장에서는 바로 관중(管仲)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간다.     


이 장은 직접 언급한 관중(管仲)의 이야기가 아니라 행간에 감춰져 있는 제나라 환공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전제로 관중(管仲)의 이후 행보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역사관을 공자는 가르쳐주고 있다.     


관중(管仲)의 입장에서 보면 왕자 규(糾)를 따라 천하를 도모하고자 했던 첫 시도는 명백하게 실패로 끝났다. 그 한 번의 실패로 주군을 따라 목숨을 끊은 소홀(召忽)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여 적이었던 환공(桓公)의 재상이 되었을 때 관중(管仲)이 느꼈을 마음가짐을 이 장을 공부하는 이들이 한 번쯤 되새겨보았으면 한다.     


죽음을 건 도전이 대실패로 끝나고 죽음을 앞에 두고 있다가 자신을 믿어주고 오히려 중용해주는 군주를 만났을 때 그가 펼치고자 했던 것은 따르던 주군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결국 천하이고 백성이라는 점을 관중은 깨달았다. 이후 40여 년간 그가 펼친 정치 활약상을 보면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고 자신을 알아준 주군을 위해 노력했다는 표면적인 것 이외에 그가 품은 큰 뜻을 펼치는 대의명분을 볼 수 있다.      

물론 그 대의명분이자 목표가 제 나라 환공과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은 천하를 꿈꿀 수 있었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었다. 관중이 다시 얻은 천재일우의 기회는 편협하게 자신의 주군을 죽인 원수가 아닌 백성을 위해 천하를 제패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지 않게 하는 정치였고, 관중은 그것을 여생을 통해 분명하게 증명해 보였다. 그것이 그가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인정받고 그 어렵다는 공자의 인정을 받아낸 이유이다. 


당신이 고작 개인적인 실패에 좌절하고 힘겨워할 때가 아님을 이 공부를 통해 깨닫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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