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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29. 2022

훌륭하여 그 자리에 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라 함이다

다만, 진정 그걸 아는 자를 찾아보기 어려울 뿐이다.

闕黨童子將命. 或問之曰: “益者與?” 子曰: “吾見其居於位也, 見其與先生幷行也. 非求益者也, 欲速成者也.”
闕黨의 童子가 명령을 전달하자, 혹자가 묻기를 “學問이 進展된 자입니까?” 하였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으며 先生과 나란히 걸어가는 것을 보았으니, 學問에 進展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빨리 이루고자 하는 자이다.”

이 장은 짧지 않았던 ‘헌문(憲問)편’의 마지막 장이다. 이전 장에서 불알친구에 대해서 묘한 타박을 표현했던 것처럼 이 장에서도 공자의 묘한 꾸지람(?)이 주된 가르침이다. 아직 나이어린 심부름을 하는 동자에 대해 묻는 이에게 동자에 대한 혹독한(?) 평가를 내리는 공자의 이야기는 자칫 이 장에서 전하고자 하는 행간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위험이 있으니 찬찬히 곱씹어 그 진의(眞意)를 파악할 필요가 있겠다.  


사실 내용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공자의 문하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심부름을 하는 어린 동자를 보며, 그 대단한 성현의 집에서 공자가 그 아이를 부려서 쓰니 성인의 측근에서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것도 많을 것이고 그럴만한 아이이니 심부름꾼으로 발탁(?)하여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대단한 아이가 아니냐고 물은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해 주자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궐당(闕黨)은 黨(당, 행정구역 단위)의 이름이다. ‘童子(동자)’는 冠禮(관례)를 하지 않은 자의 칭호이다. ‘將命(장명)’은 손님과 주인의 말을 전달함을 이른다. 혹자는 이 동자가 학문에 進益(진익, 진전)이 있으므로 공자께서 그로 하여금 명령을 전달하게 하여 총이(寵異)하신 것인가 하고 의심한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질문한 이의 의도를 이미 모두 읽고서 그저 겸사가 아닌 되려 신랄한(?) 비판을 통해, 그 아이가 아직 기본적인 예의조차 제대로 깨치지 못한 사례를 들어보인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學問에 進展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빨리 이루고자 하는 자’라며 가차없이 내려치는 평가로 동자에 대한 자신의 발탁은 질문자의 기대(?)와 같은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한다.

예의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아이라고 든 사례에 대해 그것이 왜 예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인지를 주자는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해준다.


예에 “동자는 〈자리 한가운데에 앉지 말고〉 마땅히 모퉁이에 앉고 뒤에서 수행해야 한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보건대 이 동자가 이 예를 따르지 않으니, 학문에 進益(진익)을 구하는 자가 아니요 다만 빨리 이루려고 하는 자일뿐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에게 使令(사령)의 임무를 맡겨 어른과 어린이의 질서를 보고, 사양하고 공손한 용모를 익히게 한 것이니, 이는 그를 억제하여 가르친 것이요 총애하여 특별히 대우하신 것이 아니다.


공자의 말대로라면 그렇게 기본조차 갖추지 않은 아이를 왜 곁에 두고 심부름시키는 일을 하는 임무(?)를 주어 발탁하였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주자는 행간의 의미까지 길어내 명확하게 설명해준다. 주자의 주석이 갖는 본연의 의미를 넘어 이 주석의 경우는 이 장의 진정한 가르침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표본이 된다 하겠다. 


공자가 동자에게 심부름꾼이라는 일을 맡기고 발탁(?)했던 이유는, 예의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아이의 모습을 보고서 실생활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그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몸과 마음으로 깨닫게 해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공자는 제자를 비롯하여 자신이 가르치거나 접하는 이들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특유의 통찰력으로 그의 본성을 읽어내고 그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주석의 설명에서처럼, 동자가 어른 앉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는 설명은, 본래의 예법에 따르면 동자는 방 안에 정해진 자리가 없으므로 구석에 앉아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또 동자가 선배들과 나란히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지적은, <예기(禮記)>의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어른과는 隨行(수행)하고, 형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과는 雁行(안행;기러기처럼 열을 지어 나란히 가는 것)한다’라는 가르침에 따라 아직 제대로 된 기본 예의범절에 대해 동자가 숙지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한다.


중요한 점은 그것을 비난의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부분을 보고서 동자에게 가장 필요한 교육방식이 심부름꾼의 임무를 주어 제대로 된 예의범절이 어떠한 것인지 곁에서 보고 배우고 익히도록 안배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는 흔히 말하는 ‘공자왈맹자왈’을 공허하게 떠들며 형이상학적인 것들을 들먹여 기본도 안되어 있는 이에게 혼란만 가중시키기보다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교육방식을 통해 예의 기본을 이해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마음과 몸에 새겨질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공자의 현실주의적 교육방식을 여실히 증명해보이고 있다. 


공자는 동자의 行動擧止(행동거지)를 보고, 그가 겸허한 뜻을 지니지 못하여 학문과 수양을 더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동자가 기본단계를 제대로 이수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 그 위의 것을 배우고자 탐내는 것은 ‘엽등(躐等;순차적 단계를 무시하고 뛰어넘으려고 하는 참람된 행위)’임을 지적하는 것으로 질문한 이의 잘못된 생각을 비롯하여 배우는 이들의 안일한 사고방식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헌문(憲問)편’을 관통하는 몇몇 주제중에서도 가장 도드라졌던 주제는 바로 ‘인재등용’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이 편을 마무리하는 이 장에서 동자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새삼 심부름꾼하는 동자가 무슨 대단한 관직이고 벼슬이라고 인재등용과 연관지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으나, 실제로 이 마지막 장은 그렇게 가볍게 넘길만한 장도 아니거니와 바로 이전장에서 살펴보았던 불알친구에 대한 내용과 그 형식이 비슷하다는 식으로 대강 뭉개고 해설한 가르침이 아니다.


이 장은 공자가 측근의 심부름하는 아이로 쓸 정도라면 그 또래에 비해 출중한 성취를 이룬 가능성이 있거나 최소한 그 측근에서 보고 들은 것이 매일같이 축적되었으니 대단한 성취를 이루지 않겠느냐는 딱 일반인 그 이상도 아닌 이하도 아닌 눈높이의 질문을 꼬집는다.


관례를 치르기도 전의 어린 동자가 성인 공자의 문하에 들어왔다고 으쓱대며 하고 다니는 모습이 공자에게는 기본조차도 갖추지 않은 건방지고 오만하기 그지없었는 것이었다. 그런데 질문한 이의 눈높이에서 보면, 공자가 손님의 접대를 하는 심부름꾼으로 동자를 쓰고 있다는 것은 뭔가 대단한 구석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더욱 우습다.


공자는 사람을 쓰는 방식에도 어느 하나 허투루 하는 것이 없다. 그 자리에 배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언가 인정을 받아 그 자리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바로잡고 채우기 위한 안배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무조건 자신의 비위를 잘 맞추거나 뭔가 인정받은 구석이 있어서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에 다름아님 가르침이다.

물론 위정자로서 백성을 위해 정치를 펼치는 것이 연습도 아닌데 그렇게 그를 교정하고 가르치기 위해 그 자리를 안배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 부정할 수도 있겠다. 그 반문이 성립한다면 즉, 이 장에서 동자에 대한 공자의 비난을 문면만으로 받아들인다면, 공자는 귀한 손님들이 들고나는 심부름을 하는 예의를 갖춰야 할 자리에 그렇게 무례하고 오만한 동자를 발탁(?)하여 손님들에게 무례를 보이면서라도 동자를 가르치겠다는 모순을 보였다는 말인가?


공자가 동자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부름꾼으로 곁에 두고 그 아이를 썼다는 사실이 한 장의 가르침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공자 특유의 다각적인 의미부여와 실천의식이 그 안에 복합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처음 이 편에서 인재등용에 대한 것을 논할 때, 그 인재를 어떻게 인재인줄 알고 발탁하는가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공자는 이 장에서 아이의 품성을 관찰하는 방법과 아이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교육 방법에 관해 중요한 지침을 제시하는 것으로 인재등용의 그 시작점에서 마침표까지 한 가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의범절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지 못한 동자에게 오히려 귀한 외부 손님들을 받고 오가며 말을 전하는 심부름을 시킨 것은, 그 동자가 외교사절에 끼어 나라를 대표하는 일을 하기 위한 기본기를 갖출 수 있도록 안배한 것이다. 


동자가 성급하게 학문의 진보를 이루고자 했다는 평가를 내린 공자의 분석으로 보건대, 동자가 원했던 것은 사실 그런 하찮은(?) 심부름꾼이 아니라 정식 문하의 제자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자는 동자가 하찮다고 여겼던 바로 그 일이 실생활에서 가장 필요하면서도 기본이 되는 예의범절이고 그것은 거들먹거리며 앉아서 책을 읽는 것으로 익힐 수 없는 것임을 확실하게 가르쳐주고자 한 것이다.

글을 쓰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붓을 잡으려는 아이에게 먼저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앉아 먹을 갈며 마음을 갈아 글을 쓰기 전에 마음을 안정시키고 집중시키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도자기를 구워내는 장인이 제자를 키우는 도제방식은 앉아서 도자기를 만드는 이론을 가르치거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정신교육을 하는 형태가 아니다. 그저 장인이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그 전체 과정의 하나부터 열까지를 보좌하고 흙을 준비하고 그릇을 씻어 물을 준비하여 진흙을 이기는 일부터 준비하고 돕도록 하여 그 과정을 실생활에서 익히도록 하는 것이다.

수년전 한 분야에 일가를 이뤘다는 교수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우리가 공부할 때의 모교 학생 수준과 요즘 모교 학생 수준을 한탄하며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입네하면서 대학원중심 대학으로 키운다고 하여 인재가 키워진답니까?”

“물론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평소 어떻게 대학원생들을 지도하십니까?”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것이 학위를 훈장삼아 연봉을 키우겠다는 허망한 생각을 갖는 것이 아니라면 배움을 업으로 삼고자 한 이들인데 우리 대학이 대학원중심 대학입네 연구실에 비서처럼 방지기를 두는 이유는 도제방식을 표방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요. 그런 점에서 보면 요 몇 달 전에 엉뚱한 방지기 녀석 하나가 내게 왜 자신에게 특별히 가르침을 주지 않냐고 묻더군요.”

“요즘 아이들이 당차긴 하지요.”

“그래서 내가 그 아이를 방지기에서 내치기 직전에 넌지시 물었습니다.”

“?”

“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매주 자네에게 반납하라고 했던 이유에 대해서 자네는 내가 도서관에 가기가 귀찮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나?”

“자기를 가르쳐주는 교수가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공부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이야기를 왜 안해줬느냐고 투덜거렸을 그 아이가 과연 그 질문의 의미는 이해했을까요?”

“그래서 결국 그 아이를 방지기에서 내보내며 일러주었습니다. ‘자네는 내 논문과 내 저서를 읽지도 않았던데, 자기가 배우겠다고 들어온 스승의 글과 연구를 꼼꼼하게 보지도 않으면서 그 스승에게 왜 특별한 지도를 해주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자네는 무어라 답하겠는가?’”


물론 동자도 그렇고 위의 내가 겪은 사례도 그렇고, 배우는 자들의 위치이기에 부족한 것을 그 자리에서 채워나가는 것이니 장관 자리나 조직내에서 지금 당신의 자리는 실전이고 실생활이라고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잘 생각해면 능력이 출중하여 인재로 인정받아 그 자리에 낙점되어 영화를 누리기보다는 자신이 부족한 것을 더 살피는 계기로 삼고 자신의 자리에서 그간 보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 더 보완하고 노력하는 이들이 결국 그 자리의 인재로 인정받지 않던가?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다양한 국제 업무 경험도 갖고 있다. 법무행정이 경제 발전을 뒷받침할 수 있는 법무행정의 현대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사법제도로 정비해나가는데 적임자라고 판단했다”며, 그래서 글로벌 감각을 가지고 있으니 글로벌화되어가는 법무부의 수장으로 아주 적임자라는 궤변을 코미디를 연기한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은 연일 글로벌은 언감생심, 언론사들과 싸우고 갈구느라 자기 부족함을 돌아볼 시간은 없어보인다.


그들이 과연 그 자리에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메우고 있는지 아니면 부와 권력을 휘두르는 정점에 올랐다며 득의양양해하는 칼춤을 추고 있는 것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이것으로 ‘헌문(憲問)편’이 끝이 났습니다. <논어(論語)>의 총 20편중에서 6편만이 남았습니다. 40장 이상으로 구성된 3개의 편중에서 내일부터 공부할 ‘위령공(衛靈公)편’까지가 끝이 나면 이후엔 다소 가볍게 갈 수 있을 듯 합니다. 벌써 이 해가 한 달여밖에 남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2년을 꽉 채우고서도 끝내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끝을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공부를 꾸준히 할 수 있는 비법(?)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기존에 볼 수 없는 탁월한 논어 해설서네 뭐네 극찬하고, 어려운 동양고전을 공부해나가는 재미가 있다며 댓글을 달던 학도들이 하나둘 중도에 이러저러한 사유로 발길을 끊는 것을 보아오면서 새삼스러울 것도 아닌데 마음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하고 매일아침 함께 공부하며 글읽는 학도들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그럼, 저는 그렇게 내일 늘 그렇듯 ‘위령공(衛靈公)편’ 첫장을 펼쳐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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