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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30. 2022

곤궁함은 부러 택하지는 않으나 부끄러울 것도 아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사리사욕이 아니라면 더더욱 말이다.

衛靈公問陳於孔子, 孔子對曰: “俎豆之事, 則嘗聞之矣; 軍旅之事, 未之學也.” 明日遂行. 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衛 靈公이 孔子에게 陣法을 묻자, 孔子께서 대답하시기를 “俎豆(禮器)에 대한 일은 일찍이 들었지만 군대에 관한 일은 배우지 못하였다.” 하시고, 다음날 마침내 떠나셨다. 陳나라에 계시면서 양식이 떨어지니, 從者들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子路가 성난 얼굴로 (孔子를) 뵙고는 “君子도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하고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진실로 곤궁한 때가 있으니, 小人은 곤궁하면 넘친다.”     

‘위령공(衛靈公) 편’의 첫 장이다. 이 편의 첫 장 첫 글자로 편명(篇名)이 된, 위(衛) 나라 영공(靈公)은 워낙 익숙한 인물이라 많이 등장할 것 같지만 실제로 <논어(論語)>에는 두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재위 기간이 무려 42년이나 되어 그런 것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워낙 당시 춘추전국시대의 중심에 있었던 터라 공자가 많이 오간 탓도 있어 위(衛) 나라의 정세와 관련된 다양한 인물들이나 사건에 모두 연관되기에 그 비중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때문에 그 나라의 그 시대 주군이었던 위령공(衛靈公)은 본의 아니게 모두와 연계되어 등장하고 언급된다.     


예컨대, ‘헌문(憲問) 편’의 26장과 ‘위령공(衛靈公) 편’의 6장에 등장하는 거백옥(蘧伯玉)이라던가 ‘공야장(公冶長) 편’의 14장과 ‘헌문(憲問) 편’의 20장에 등장하는 공문자(公文子:중숙어(仲叔圉)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인물)와 ‘옹야(雍也) 편’의 26장에 나오는 논란의 그녀, 남자(南子). ‘위령공(衛靈公) 편’의 6장에 나오는 사어(史魚), 옹야편의 14장에 나오는 송조(宋朝), ‘팔일(八佾) 편’의 13장과 ‘헌문(憲問) 편’에 등장하는 왕손가(王孫賈)와 ‘옹야(雍也) 편’의 20장과 ‘헌문(憲問) 편’의 20장에 등장하는 축타(祝鮀)에 이르기까지 당시 군주였던 위령공(衛靈公)을 중심으로 모두 연계된 인물들이기에 두 번만 등장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크다.     


심지어 위령공(衛靈公)이라는 실명(?)이 아닌 위군(衛君)이라는 약칭(略稱)만으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술이(述而) 편’의 14장과 ‘자로(子路) 편’의 3장에 등장하는 예이다. 그의 손자이자 자기 아버지와 기나긴 왕권 다툼을 하는 인물인 출공(出公) 첩(輒) 역시 할아버지 위령공(衛靈公)의 이야기에서 그 사건의 단초가 시작된다.      


그 위령공(衛靈公)이 孔子에게 군사와 관련된 陣法에 대해 묻자, 孔子는 자신은 군대에 관한 일을 배우지 못하였다면서 단칼에 자르고 그다음 날로 떠났다. 정말로 몰라서가 아니라 하필이면 백성들을 위한 선정(善政)을 펼 생각을 묻지 아니하고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할 생각만 하냐며 핀잔을 주는 공자만의 단호박 논법이기도 하다.     

위령공(衛靈公)의 초상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주석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陳(진)’은 군사(군대)의 行伍(항오)에 대한 列(열)을 이른다. ‘俎(조, 도마)’와 ‘豆(두, 접시)’는 예를 행할 때에 사용하는 기물들이다.     


그 속뜻이 주석에 담겨 있지 않아서 배우는 자들이 혼란스러워할까 싶었는지 윤씨(尹焞(윤돈))는 다음과 같이 간략히 공자의 의도를 정리해준다.    

 

“衛靈公(위령공)은 무도한 군주인데 또 전쟁하고 정벌하는 일에 뜻을 두었다. 그러므로 배우지 못하였다고 답하고 떠나신 것이다.”     


그 뒤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내용은 후대 학자들에게서 많은 논란이 있어 마땅히 별도의 장으로 분리되어야 하는 내용이라고 설명되는 부분이다.   

   

공자가 陳나라에 있으며 양식이 떨어지는 상황이 벌어져 고생한 일화는 앞선 사건과 무려 4년이나 시차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장의 첫머리 상황은, 공자가 애공(哀公) 2년(공자 59세)에 떠났던 위나라로 다시 돌아와 거백옥의 집에 머물고 있었던 때이다. 위나라 영공(靈公)이 무도하므로 위나라에서는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시 떠나려던 시기에 영공이 진법에 대해 묻자 단호박으로 배우지 못했다고 내치며 외면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향을 명확히 한 것이다. 그렇게 그해 여름 영공이 죽고 출공(出公)이 위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공자는 조(曺) 나라에 들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송나라로 들어간다.     


그로부터 4년 뒤인 애공 6년(공자의 나이 63세), 진(陳) 나라에 있던 공자는 초(楚) 나라 소왕(昭王)을 만나기 위해 진나라와 채(蔡) 나라 접경지대로 나섰다가 앞서 ‘선진(先進) 편’의 2장에서 공부했던 저 유명한 ‘진채지액(陳菜之厄)’이라는 사건을 당하게 된다.      

그렇기에 뒤에 나오는 내용은 위령공(衛靈公)의 시대도 아니거니와 앞의 내용과 붙어 있을 연관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주자는 간략하게 그 상황에 대해 역사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라면 다 알아들을 것이라 여겼던 것인지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대신한다.     


공자께서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셨다. ‘興(흥)’은 일어남이다.     


그리고 앞 내용과는 연계되지 않는 이야기임을 재확인시켜주듯 그 상황에 자로(子路)의 질문과 공자의 대답이 이어진다.     


“君子‘도’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에서 방점은 작은따옴표로 표기한 ‘도’이다. 군자라는 존재는 원시 유학의 개념에서 완성을 이룬 존재이므로 곤궁함이라는 결함이 없어야 맞다고 여기는 자로(子路)를 대변인으로 한, 일반인의 눈높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곤궁함이란 부정적인 일종의 부족함에 대한 결과물일 수 있기에 군자임에도 이러한 결과를 당하는 것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문 성향의 질문인 것이다.   

  

이에 孔子는 ‘君子에게 있어 곤궁함을 설명하며 진정한 곤궁(困窮)이란 당당한 것이기에 그것을 지키되, 小人은 그 곤궁함에 처하게 되면 선을 넘는 행동을 저지르고 만다’는 설명을 곤궁이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규정짓는다.     

이 설명에 대해 하씨(何晏(하안))는 다음과 같이 그 가르침의 정수를 정리한다.


“‘濫(람)’은 넘침이다. ‘군자는 진실로 곤궁할 때가 있으니, 소인이 곤궁하면 放逸(방일)하여 나쁜 짓을 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고 말씀한 것이다.”     


여기서 곤궁은 같은 단어이면서 군자의 곤궁과 소인의 곤궁의 두 가지 개념으로 확연히 분리된다. 다시 말해 군자에게 있어 지켜야 할 곤궁과 일반인의 눈높이로 보는 곤궁함에 처하게 되었을 때 소인이 넘지 말아야 할 행동은 다르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주자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정자(伊川(이천))는 말씀하기를 “‘固窮(고궁)’이란 곤궁함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하셨으니, 또한 통한다.     


그래서 종국에 주자는 군자에게 있어 곤궁(困窮)이 갖는 의미에 대한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정리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성인이 마땅히 떠나야 할 경우에는 떠나가서 돌아보고 염려하는 바가 없고, 곤경에 처해서도 형통하여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바가 없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으니, 배우는 자들은 깊이 음미해야 한다.   

  

다시 정리하자면, 같은 곤궁함이지만 군자에게 있어서는 지켜야 할 마지노선인 것이면서도 소인은 그 상황에 몰렸을 때 본성을 드러내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행동을 보이니 같은 개념이면서도 그것을 다루는 존재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여기서 소인이 넘지 말아야 할 선으로 설명된 ‘람(濫)’이라는 단어는 과도한 행위이자 정도에 벗어나 부당한 행위, 혹은 자포자기하여 벌이는 행위를 통칭한다. 이 대답에 대해 다시 자신이 못 알아들은 부분에 대해 되물으며 발끈하는 자로(子路)에게 다시 상세히 부연 설명하는 공자의 명쾌한 해설이 <공자가어(孔子家語)>의 ‘재액(在厄)’에 보여 여기 간략히 소개한다.     


“유(由)야! 너는 아직 모르는 말이란다. 어진 자라고 해서 반드시 남들이 믿게 된다면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지 않았을 것이며, 지혜가 있다 해서 반드시 남에게 쓰이게 된다면 왕자 비간(比干)이 배를 가르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중략) 제아무리 군자로서 학식이 넓고 지모(智謀)가 깊다 할지라도 시대를 못 만난 자는 여럿이 있다. 어찌 나 혼자 뿐이겠는가? 또 비유해 말하자면 지초(芝草)와 난초(蘭草)가 깊은 산골짜기에 났다 할지라도 사람이 없다 해서 그 향기가 나지 않는 법은 없다.(중략) 월왕(越王) 구천(句踐)도 패왕(霸王) 노릇을 할 의사가 있었기 때문에 회계산(會稽山)에서 수치를 당해 가면서도 살아 있었던 것이다.”      


어느 것이 먼저라 말할 수는 없겠으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지 않고서 성공을 이뤄내는 이는 없다. 매양 순탄하여 순풍에 돛 단 듯 일사천리로 풀리는 인생이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고난과 역경을 드라마틱하게 이겨내고 영웅이 되지는 않는다. 누구나 영웅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웅이 아니라 그저 수많은 서민들 중에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고난과 역경을 겪는 사람이 영웅이 아니라 그것을 이겨내고 극복하여 성과를 이뤄내는 이만이 영웅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미 성공이 아닌 수많은 역경과 실패를 경험했던 245여 명 대가들의 이야기를 연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내가 굳이 그 대가들의 성공스토리가 아닌 실패했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바로 이 장에서 공자가 그 시대의 자로(子路)들에게 일러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하고자 함이었다.   

  

앞서 어떤 것이 먼저였는지에 대한 순서를 말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어떤 삶이든 어떤 인생에서든 순탄하기만 하지 못하고 크던 작던 역경과 고난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그 마이너스를 온전히 자신의 경험으로 융화시켜 플러스로 전환시키는가에 따라 성공한 인생과 실패한 인생으로 나뉜다는 것을 245여 명의 실패한 대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     


https://brunch.co.kr/magazine/ahura5

결국 이 장에서 공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는 ‘곤궁(困窮)’의 개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과정을 통해 그리고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따라 군자와 소인의 삶을 구별 지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 자체가 부와 명예라면 곤궁(困窮)은 그야말로 지켜야 할 가치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실패한 삶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리사욕이 군자의 삶이 목표가 아닌 이상,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곤궁함은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거니와 오히려 사리사욕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훈장과도 같은 증명일 수 있는 것임을 공자는 당대의 자로(子路)들은 물론 작금의 당신들에게 일러주고 있다.     


공직자의 재산을 굳이 공개하게 된 취지는, 단 하나이다. 그들이 공직에 있으면서 공직이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사사로이 부를 쌓았는지를 명백하게 공개하여 그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사적인 사리사욕을 채우지 못하도록 경계하고자 함이다. 그러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이제 국회의원들의 재산공개를 비롯하여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의 자산을 통해 순위에 랭크된 자들은 그다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살지도 않는 여러 채의 투기성 부동산 자산은 물론이고 당당하게 출가한 자식이니 법적으로 공개하지 않겠다고 막아놓고서도 적지 않은 자산을 공개한 자들이나, 선출직에 출마할 때 어마어마한 자산을 버젓이 생략하거나 축소 신고해놓고서(실제로 그러한 사실이 적발되면 설사 실수였다고 하더라도 법적 문제의 소지가 있어 당선 무효형을 받는 판례도 적지 않았다) 그저 신고상의 실수라고 대강 얼버무려도 넘어가는 검찰과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 난무하는 시대이다.     

기계적인 항소로 서민들을 괴롭히기 일쑤인 검찰에서 왜 언론인 출신의 비례대표가 그와 같은 범법을 저질렀음에도 딱 당선직을 취소당하지 않을 정도로만 합의(?)한 듯 항소 없이 넘어가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우연치고는 기묘하게도 역시나 언론인 출신으로 청와대 대변인에서부터 그 전관의 힘으로 공기업의 임원직을 거쳐 경기도지사까지 하겠다고 나섰다가 낙선해도 다시 청와대의 홍보수석으로 불려 가며 정치의 끈을 결코 놓지 않는 이들에게 곤궁(困窮)이란 그저 자식들에게. ‘그따위로 제대로 사리사욕 정신을 이어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국민들의 등을 밟고 올라서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곤궁해진다!’의 곤궁 정도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과연 당신에게 곤궁함은 실패한 삶의 창피한 증거인가? 더 큰 목표를 향해가는 과정에서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는 부산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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