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 제사 지내어야 할 귀신이 아닌 것을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함이요, 의로운 일을 보고서도 하지 않는 것은 용맹이 없는 것이다."
내용에 대해 먼저 설명하면 이렇다.
천자나 제후만이 태산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데, 노나라 대부인 계씨(季氏)가 참람하게도 태산에 제사를 지내려 하였다. 이에 공자는, 당시 계씨의 가신으로 있던 자신의 제자 염유(冉有)에게 말리라고 했으나 그가 말리지 못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이야기에 대한 대화는, 바로 뒷 편인 팔일(八佾)篇의 6장에 자세히 나온다.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은 그러한 상황임을 이해하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공자는 역시 그 상황에 대해 있는 그대로 지적하고 비판하지 않는다.
지평의 확대.
이 사안을 통해 일러주려고 했던
거시적인 시각의 가르침을 펼쳐주신다.
먼저 원인 분석.
왜 그들은 자신들이 지내면 안 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가?
아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원래 해서는 안될 것을 무리하게 하는 것에는 당연히 간절한 이유와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공자는 그 점을 뼈를 후려치는
표현으로 짧게 끊는다.
아첨이 무엇인가?
주자의 해설에 따르면,
'잘 보이기를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내게 영향력을 끼칠만한 대상에게 잘 보이기를 바라는 것이 잘못일까?
인간의 본능인데도?
그래서 뒤의 문장이 바로 이어진다.
'의를 보고 하지 않음은 용맹이 없는 것이다.'
행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이들에게는
생뚱맞은 결론이고,
도저히 연결고리가 없을 듯한 두 문장인 셈이다.
그래서 주자가 다시 마지막 문장의 해석을 달아준다.
"알면서 하지 않는 것은 곧 용기가 없는 것이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의 방점은 이것이었다.
첫 문장에서 지적한 내용이 잘못되었음을 모르고 하지 않았다는 진실을 확 후벼 판다.
모르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곧, 그것이 잘못임을 알고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그런 행동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모르고 잘못을 해도
잘못인 것이지만
무엇이 잘못인지 알면서도 잘못을 행하는 것은 욕을 바가지로 먹을만한 일이라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다.
용기가 없는 것이다.
용기?
너무도 당연히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아는데
버젓이 행하는 이들이 많아진 세상이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려워진 세상이다.
그것을 말세라고 하고 혼란의 세상이라고도 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그릇된 것을 그릇되었다고 하면오히려 눈치 없다고 비난받고 조직에서 왕따를 당하는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