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파악할 노력과 용기가 당신에게 남아있기를.
子曰: “衆惡之, 必察焉; 衆好之, 必察焉.”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여러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며, 여러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이 장에서는 사람을 보는 안목에 대한 공자의 일침이 담겨 있다. 일침이라 표현한 이유는 공자의 시대는 물론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이 장의 가르침처럼 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장의 핵심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왜 사람들이 그렇게 실천하지 못하였는가에 대한 보이지 않는 원인을 알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씨(楊時(양시))가 주석을 통해 던져준 힌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오직 仁者(인자)만이 능히(제대로)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미워한다고 해서 살펴보지 않는다면 혹 사사로움에 가리울 수 있다.”
본문에는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은 인자(仁者)가 등장했다. 배우는 이들의 최고 목표 지향점에 오른 뒤에야 공자가 말한 경지는 결코 일반인은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미리 일러두어 공자의 가르침이 오직 성인만이 이룰 수 있는 고담준론(高談峻論)임을 강조한 설명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양 씨는 주석을 통해 왜 일반 사람들이 그것을 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핵심원인을 들어 강조하고자 했다. 결국 그 원인은 사사로움, 바로 사적(私的)인 요소였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공자의 시대 훨씬 이전부터 최첨단에 이르른 작금에 현실에도 대다수의 말을 근거 없이(?) 신뢰한다. 아니, 그들은 대다수의 말이라는 것을 객관적인(?) 근거라고 맹신한다. 짧게 보면 자신의 의견에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고, 멀리 보면 자신의 생각보다 여럿의 생각이 중론이고 여론이기 때문에 나중을 생각했을 때 그것을 따르는 것이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무리에서의 생존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대다수의 의견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형성되는가? 무식한 저잣거리의 경우, 목소리가 큰 자가 그 의견을 이끈다. 누군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소리가 큰 자의 생각이 주변에서 우물쭈물거리며 눈치를 보이는 이들의 생각이라고 여기며 ‘어어’하면서 그 의견에 끌려간다.
원론적이라면 자신의 이익에 배치되는 경우이거나 심지어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해가 되는 경우라면 당연히 반발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해야 하지만 일반적인(도대체 이 일반적인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단어의 뒤에 숨기 좋아하는 부류들이 많으니 심히 거슬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사용한다.) 사람들은 튀기 싫거나 그저 대부분이 그렇게 한다고 하는 것에 반발하는 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반대급부가 귀찮고 두렵다는 이유로 질질 끌려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게 자신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목소리가 큰 쪽을 따라 손해를 입고서 투덜거리며 집에 돌아온 이들은 배우자에게, 혹은 일기장에 ‘사실 나는 그러길 원하지 않았고, 내 생각은 달랐는데 그냥 그렇게 따랐을 뿐이야. 그랬더니 굉장히 기분이 나쁘네.’라며 볼멘소리를 내뱉는다.
그들이 전형적인 소심한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렇지 않다. 단언컨대, 나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이, 바로 그들의 배움이 부족하고 수양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편에서 내내 이야기하는 사회 속에서 관계를 어떻게 맺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흐름은 이 장에 와서 그 사회관계 속에서 우리가 남을 어떻게 제대로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가슴 깊은 폐부를 후벼 파는 질문지를 받아 든 것이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너무도 흔하게, 남에게 아첨하고 무리 짓기 좋아하는 아당비주(阿黨比周)의 소인배(小人輩) 무리를 만나게 되는가 하면,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자신의 正大함을 믿고 홀로 우뚝한 특립독행(特立獨行)하는 군자를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앞의 소인배 무리들은 워낙 도처에 깔려 있어 만나고 싶지 않아도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이 만나게 되지만 군자를 만나거나 함께 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그 이유를, 군자행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지 않느냐고 되묻고 싶은가? 아니. 사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당신이 군자를 만나도 그가 군자인지를 파악할만한 안목이 당신에게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의 안목을 흐리게 만드는 원인과 당신을 그렇게 퇴화(?)시키는 훈련의 과정은 그 사회의 환경에 있는 것도 어느 정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한 대로 世論만 따르다가는 사람에 대한 평가마저 그르쳐 당신의 안목이라는 것이 생기기도 전해 오염되어 상해버리고 만다는 말이다. 예컨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호인(好人)’이라고 일컬어지지만 내면의 덕을 갖추기에는 한참 거리가 먼 향원(鄕原)을 군자로 오인하고 그저 사람들의 평가에 기대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치는 당신의 모습을, 당신은 마주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위정자가 안목을 키워야 하는 공부와 수양을 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올곧은 안목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사회를 올바르게 만드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공자는 이 장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장의 가르침은 좁게는 인재를 등용해야 하는 사람들이 뭇사람의 호오(好惡)에 현혹되지 말고 진상을 살펴서 그 사람을 제대로 판단하고 구별해내야 할 것을 말한 것이고, 넓게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나 뭇사람의 부당한 여론몰이에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 상대방의 인격을 정밀하게 차근차근 살펴보고 스스로 판단하고 이해하라고 일깨워주고 있다.
‘정밀하게 차근차근 살펴보는 것’, 원문에 한 글자로 표기된 ‘찰(察)’이 갖는 본래의 의미이다. 내가 앞서 당신이 사람을 보는 안목을 갖추지 못한 이유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수양하지 못해서라고 말한 근거가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 장에서 공자가 한탄하며 지적한 바와 같이, 이미 공자의 훨씬 이전 시대에서부터 있어왔던 뭇사람들의 무리들의 의견이라는 것은 조작하기 너무도 쉽고 너무도 간단했다. 특히, 부와 권력을 지닌 이들의 입장에서는 개돼지급에 해당하는 민중들을 선동하는 일은 그야말로 손바닥을 뒤집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시대를 거듭하여 개돼지를 선동하는 일에는 첨단 과학 기술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의 발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댓글문화를 만들어 매크로라는 기술을 통해 장사꾼 조직까지 만들어냈고, SNS의 중독을 부르는 성행 현상들과 아무런 생각 없이 중독인 줄도 모르고 빠져드는 너튜브의 알고리즘에 이끌려 된장 닮은 갖가지 똥만 주워 먹게 만드는 일은 그것을 이용하여 이익을 창출하겠다는 작자들의 장삿속과 어울려 그야말로 난장판을 바벨탑처럼 쌓아 올렸다.
공자의 가르침에 있어 기본이 되는 배움의 목적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누차 강조한 바 있다. 당신이 고리타분한 수천 년 전의 꼰대가 반복적으로 강조하였다고 생각한 그 가르침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첫걸음이었다.
가짜뉴스가 진짜뉴스라고 믿는 어리석은 개돼지들의 가장 큰 공통적 특성은 자신들이 접하는 그 뉴스라고 하는 것들을 검증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으른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기껏 사실확인을 하겠다며 시도하는 일은, 녹색창에 그 단어를 집어넣어 초등학생이 80%가 넘는 지식인들의 답변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고작이라는 사실은 이제 신기하지도 않은 지경이 되어버렸다.
가방끈이 짧다고 너무도 당연하게 자신의 안일함을 덮으려 들고, 젊어 보이려고 화장은 떡칠을 하면서도 나이가 들어 이제 뭔가 더 배우고 아는 것도 힘들고 관심조차 없다고 하는 이들일수록 기망하여 소인배들이 원하는 것을 최면과 같이 믿게 만드는 것이 쉽고 간단해진다.
기망하려는 일이 터무니없는 거짓임이 진실로 드러났을 때, 그 기망행위를 시도한 자들에 대한 기존의 신뢰는 더더욱 확실하게 박살 나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소인배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모두 무너뜨려버릴 정도의 높은 리스크를 감안하면서까지 왜 그런 짓을 시도할까?
대답은 너무도 간단하다. 그들에게는 그 정도의 리스크는 언제든 다시 또 다른 거짓으로 덮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과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그런 터무니없는 시도를 통해 단 한 번이라도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포함하여 다시는 그런 짓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응징을 당한 경험이 있다면 그들은 결코 그런 짓을 또다시 하겠다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동서고금 전 세계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총과 칼을 들고 나라를 지켜야 할 직업 군바리가 그 총과 칼을 정권에 겨누어 자신의 사욕을 채우겠다고 권력을 장악하는 일은 국민들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저급한 동남아나 남미에서 주로 벌어져왔다. 물론, 대한민국이 그 오명의 역사 전철을 밟지 않고 그저 스쳐 지나갔을 리가 없다.
문제는 그렇게 처음 군바리가 차지한 군부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자유를 외치고 나라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항거했음에도 한번 했는데 또 한 번 못하겠느냐는 군인정신(?)으로 뻔뻔한 군바리는 또다시 정권을 뒤집어 손에 잡았고, 그 뒤를 따라다니던 군바리는, 자신의 뒤끝이 안 좋아질 것을 우려하여 멀쩡한 보통사람인 양 만들어 다시 정권의 꼭대기에 세웠다.
최연소 국회의원이니 민주화의 투사로 사형선고를 넘어선 남도의 전설이니 하는 자들이 정치에 대한 사욕을 조금만이라도 버렸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그야말로 동남아스러운 저급한 민주주의 코스프레는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모든 국민들이 개돼지인 적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소인배들의 기망행위를 간파한 자들은 언제나 있었고, 그들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자신의 잇속에 맞춰 그들과 이익을 나누며 악어와 악어새로 기회(?)를 살려 부와 명예를 거머쥐던가 아니면 정말로 잘못된 부조리를 바로잡겠다는 일념하에 사회를 올바르게 만들어나갈 ‘진정한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다.
일반인들이 먹고사는 일 때문에 일일이 사실관계 확인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신문을 보고 뉴스를 보고 진실을 알고자 했지만, 이제는 권력자와 결탁하여 너튜브의 뉴스만도 못한 진실을 흐리고 호도하는 ‘언론사’라는 이름마저 무색해진 기레기집단이 ‘뉴스에서 봤는데...’라는 말이 신뢰할 수 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보고 듣고 정보를 취함에 있어 스스로 사실관계를 검증하고 그것을 면밀히 관찰하는 일은 당신이 그저 위 원문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쓰윽 스쳐 지나갈 정도로 가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안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서 그저 소인배들이 이끌어낸 밑그림에 선동되어 심지어 약수터에서 노인정에서 대학강의실에서 ‘너튜브에서 봤는데...’라는 말을 당당하게 권위에 의한 근거랍시고 말하는 시대가 도래하고야 말았다.
동남아의 나라 같지도 않은 차이니즈 타이베이에서는 ‘뉴스에서 봤는데...’라고 하면 사람들이 비아냥거리며 ‘그렇다면 더더욱 믿을 수 없다.’라고 할 정도로 언론이 옐로페이퍼 수준으로밖에 인지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신뢰받는 언론인이라는 존재자체가 없어진 것은 기레기 몇몇이 만든 것이 아니라 결국 거짓이어도 자극적인 내용과 화면만을 원하는 저급한 개돼지들과 언제든 그런 수준의 개돼지들을 선동할 수 부정한 위정자들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대한민국은 과연 그들을 폄하할만한 위치에 있는가?
‘다들 그러니까 그런 줄 알았지.’라는 같잖은 변명은 결국 당신이 머리에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어 그저 정육점에 덜렁거리며 매달리고 있어야 할 고깃덩어리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설사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잇속을 차리는 방향으로 선택하는 간악한 자들이, 그렇게 국민을 개돼지로 아는 것들이 국민을 속이는 기망행위를 만천하에 밝혀 다시는 당당히 그 후안무치한 얼굴을 들고 거리를 활보할 수 없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을 결국 당신들뿐이다.
잊지 마라, 당신이 어떻게 불릴지에 대해 정할 수 있는 자는 결국 당신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