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는 결코 사람을 크게 만들어줄 수 없다.

오직 사람만이 道가 道일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by 발검무적
子曰: “人能弘道, 非道弘人.”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道를 크게 할 수 있는 것이지, 道가 사람을 크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장은 여덟 자의 지극히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나마도 대구(對句)로 되어 있어 여덟 자를 이루었을 뿐 실제로 앞의 명제가 이 가르침의 핵심이다. 사람만이 道를 크게 하고 넓힐 수 있는 것이지 결코 道가 사람을 크게 하거나 넓혀주지 않는다는 공자의 가르침 전체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주자는 공자의 이 간단하면서도 거대하기 그지없는 가르침에 대해 어떤 이해를 보여주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弘(홍)’은 넓혀서 크게 하는 것이다. 사람 밖에 〈따로〉 道(도)가 없고, 도 밖에 〈따로〉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인심은 지각이 있고 道體(도체)는 함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도를 크게 할 수는 있고, 도가 사람을 크게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주자의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하여, 다산(茶山; 정약용)은, “만일 性을 道에 영속시킨다면 道體란 지극히 크고 끝이 없거늘 어떻게 사람이 그것을 축소하거나 확대할 수 있다고 하겠으며, 사람이 도를 배우면 덕의 마음이 드넓어지고 나날이 빛나 커지거늘 어떻게 도가 사람을 크게 할 수 없다고 하겠느냐?”며 반문하며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다산(茶山)은 귀류법을 통해서 ‘心을 사람에 영속시키고 性을 道에 영속시키는 관점이 옳지 않다’고 배격하고, ‘弘道란 성인이 태어나서 천하에 道를 넓히는 사실을 가리킨다’는 보다 중의적인 해석을 내놓기도 하였다.

다산의 의견을 참고하더라도, ‘사람밖에 도가 있는 것이 아니며, 도 밖에 사람이 없다’는 선문답 같은 명제야말로 주자가 공자의 가르침을 오롯이 배우는 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그려낸 표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동양고전을 공부하겠다고 하는 초심자들이 범하는 가장 큰 잘못된 선입관이 道를 형체가 없는 애매모호한 저 구름 꼭대기에 있는 거대한 별개의 것이라 경외시 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마나 제대로 된 배움에 장애가 되는지 그리고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에 대해 주자는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道라는 것 자체는 그저 개념이고 객관적인 존재일 뿐 사람에게 작용할 수 있는 지각이 없다는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고 당연한 소리인 것 같지만 실제로 道를 닦고 수양하고 배워 익히겠다고 공부하는 이들에게 道는 노력해도 쉽게 손에 닿을 수 없는 절대적인 그 무언가로 신격화(?)되어 버리고 마는 경우가 적지 않기에 주자의 이 설명은 더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현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춰 다시 부연설명하는 사례를 들자면, 인간은 새처럼 날 수 없고 치타처럼 달릴 수 없으며 거북이처럼 심해(深海)를 헤엄치고 다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의 욕망을 달성시키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여 비행기를 만들고 스카이다이빙이라는 레포츠를 만들어 하늘을 나는 새가 느끼는 기분을 느끼고 그 효율을 달성하였다.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타며 치타만큼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같은 이치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비행기나 자동차가 대단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만들어내고 개발하고 발명한 이들은 인간의 욕망과 꿈을 달성하겠다고 노력하여 결국 현실화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道가 비행기나 자동차 등과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 공자가 늘 강조하고 역설한 부분이다. 예컨대 눈에 보이는 육체의 경우, 똑같은 몸을 가지고 있지만 누군가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단련하여 단단하고 거대한 근육을 만들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늘 야식에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지방과 콜레스테롤로 가득 찬 육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누군가는 보기 좋은 몸을 만들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운동을 한다고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운동을 하고 자기 관리를 통해 최상의 몸상태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은 안다. 자신의 몸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 자신의 사람을 얼마나 고양시키는지를 말이다.

문제는 맛있는 것일수록 불량식품이 많고, 편한 대로 지내고 조절하지 않고 방만해질수록 몸은 망가져 실제로 병에 걸리기 쉬운 상태로 만들고 병에 걸리더라도 쉽게 이겨낼 수 없는 상태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즉, 당장 맛있다고 불량식품을 많이 먹고 당장 졸리고 피곤하다고 그냥 먹다 지쳐 잠드는 생활이 패턴이 되는 순간, 말 그대로 몸은 망가지고 만단.


먹고 싶은 욕구를 견디고 몸에 좋은 것이라고 맛이 없는 것을 먹어가며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침에 조금 더 자고 싶은 몸을 일으켜 세워 조깅을 하거나 수영장 물에 몸을 던지는 일은 누구나가 즐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무언가를 절제한다는 행위 자체가 인지능력과 조절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쉬운 일은 아닌 이유는 당장 편하고 당장 내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에 경도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우선시 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터널에서 불의의 폭발사고가 터지고, 타고 있던 배가 갑자기 뒤집히고, 지하철에 사고가 터져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탈출해야 하거나 같이 있는 가족을 지켜야 할 상황일 때, 평상시 최상의 몸상태를 만들어 내 육체를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평상시의 삶의 태도가 축적되어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를 나누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육체를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두고 단련하는 것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의 삶과 미래를 결정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마음가짐은 어떠하겠는가? 내 이익을 얻고자 하기 위해 조금의 범법을 벌이는 것을 합리화하고 더 큰 범법행위까지 벌여가며 이익을 챙기는 괴물이 되어가는 이들을 우리는 뉴스에서 자주 접하곤 한다.

그들이 만약 매일 같은 시간 몸을 단련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배우고 익혀 올바름을 위해 정진하고 부조리를 바꿔나가는 실천을 거듭하는 삶을 영위해나갔더라면 그들이 뉴스에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가 이렇게 악화일로로 타락해져만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눈에 보이기 외모와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예쁘고 주목받는 몸매를 만들고 싶다는 가시적이고 근시안적인 목적을 가지고서도 몸을 만드는 이들은 있지만, 누군가에게 칭찬을 듣거나 용감한 시민상이 무슨 삶에 대단한 보탬이 된다고 자신의 올바름을 보이지도 않는 자신의 마음 안에서 키워나갈 생각을 하는 이들은 훨씬 더 적고 없기 마련이다.


이 장의 여덟 자가 바로 그러한 점들을 모두 압축적으로 담아낸 공자 가르침의 정수임을 장자(張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마음이 性(성)을 다할 수 있음은 사람이 도를 크게 할 수는 있는 것이요, 성이 마음을 검속 할 줄 모름(검속하지 못함)은 도가 사람을 크게 함이 아닌 것이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는 것은 본능이고 본능에 맞춰 내가 먹고 싶다고 남의 것을 빼앗더라도 먹어치우고 예쁜 것을 갖고 싶다며 다른 사람의 것을 마구잡이로 빼앗아 가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동물이지 인간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움직이고 운동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것이 편안한 것 같지만 그것이 쌓여 정작 몸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살펴보면 내가 편하다고 생각했던 행동이나 내가 맛있고 생각해서 마구잡이로 먹었던 음식들은 결코 내 몸을 건강한 상태로 만드는 것에는 정반대의 효과를 내고 만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규율을 좀 어기면 어떻고, 실제로 당장 눈앞의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좀 혜택을 받고 이익을 챙기면 어떠냐는 안일한 마음가짐은 당장은 이익을 주고 만족감을 줄지 몰라도 결국 어느 순간 지탄받는 삶으로 전락하여 후회하더라도 때가 이미 늦어버리게 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운동을 하는 이들은 말한다. 운동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매일 수행과 같이 하던 운동도 하루를 안 하면 그저 큰 티가 나는 것 같지 않지만 다음날 똑같은 중량의 무게를 들더라도 매일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데, 일주일을 쉬고, 다시 한 달을 쉬고 몇 개월을 쉬게 되면 본래의 망가졌던 몸으로 돌아가는 속도는 훨씬 더 빨라지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배우고 익히는 목적이 좋은 대학을 가서 더 많은 부와 명예를 갈취하기 위함이라며 그렇게 해서 얻은 알량한 지식과 명문대 졸업장 및 자격증을 도구로 이용하여 의사, 검사, 판사, 변호사, 정치꾼 등이 되어서는 사회지도층이랍시고 거들먹거리며 비리까지 서슴없이 저지르다가 카메라 앞에 서는 어리석은 자들을 우리는 이미 수차례 목도한 바 있다.

그들이 혹 <논어(論語)>를 읽으며 공부했다며 아는 척을 하더라도 그들에게 그것은 잘난 척을 하기 위한 문구 외우기나 학점을 따기 위한 방편에 하나였을 뿐, 그 가르침이 자신의 삶에 녹아들어 실천으로 발현되는 경험 따위는 해본 적도, 해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현들의 가르침 속에서 묻어 나오는 진정한 깨달음의 올바름에 대한 논의는 그저 도덕책에 나오는 죽어있는 개념일 뿐 결코 자신들의 삶의 기준이 될 수도, 사회적 지향점이 될 수도 없는 것이라 단호하게 거부의 의사를 선언한다.


지극한 현실주의자였던 공자는 결코 추상적인 도를 언급한 바가 없다. 공자는 기존의 동양철학에서 하늘에 있던 관심사를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바꾼 인물로 일컬어진다. 공자는 도덕의 기능을 성대하게 만드는 인간 의지를 중시하였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하게 自覺(자각)하고 도덕의지를 발휘하여 인간다운 삶을 완성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공자의 의도는 위 여덟 자 중에서도 ‘能’이라는 한 글자에 농축되어 담겨 있다. 앞의 사람이 주체일 때는 들어있는 ‘能’이라는 글자가 뒤의 명제 네 글자에는 담겨 있지 않은 것이 바로 그 차이를 보여준다. 오직 사람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고급 문법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에서 道를 중심에 두지 않고 사람을 중심에 둔 것 역시 공자의 인본주의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즉, 여기서 말하는 ‘道’는 추상적인 실체라기보다는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도덕(道德)이나 정의(正義)를 의미한다.


道를 실현시키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의미가 없다는 이 장의 핵심요지는, 다시 ‘道라는 핵심 의지가 마음에 담겨 있지 않다면 사람이라 할 수가 없다.’는 명제로 귀결된다. 이것은 <중용(中庸)>에서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설명과 자연스럽게 일맥상통한다.


이 장을 다시 ‘위령공(衛靈公) 편’의 저변에 깔려있는 전체 메시지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 어려워 보이고 불가능해 보이는 道를 이루는 것도 사람이고, 그것을 방해하고 망칠 수 있는 것도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의 작용이 사회 안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완성되어야만 유의미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자신들이 사욕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고 그렇게 온갖 범법과 부정을 자행하고서도 버젓이 부와 명예를 누리며 자신들을 비난하는 이들을 개돼지라 부르며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이 정권을 잡고 국민을 위한다는 입에 발린 거짓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것은 결코 정상적이라 할 수 없다.

그들의 반대편에 있다는 이유로 운동권출신이랍시며 10년이 넘도록 다선의원직에 올랐다고 거들먹거리거나 그들의 권력에 기생하며 어떻게 비례대표자리나 전략공천이라도 받아서 최고의 정점에 오르겠다며 뒤로는 온갖 부정과 지저분한 짓을 하면서도 청렴결백한 코스프레를 하는 자들 역시 그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나를 다스리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안목을 갖추는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의 기준으로 완성되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道를 완성하였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을 위함이 아닌 우리를 위함이 사회 구성원들 모두에게 설득력을 갖고 자신의 사욕을 위해 그 질서를 무너뜨리는 언행들이 지탄받고 고개를 들 수 없을 때야말로 사회는 올바름을 향해 겨우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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