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것을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子曰: “過而不改, 是謂過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을 이것을 허물이라 한다.”
이 장 역시 앞서 살펴보았던 짧은 가르침처럼 단 여덟 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더 어렵다. 뻔하고 당연한 말인 듯 보이지만, 이해하기에 녹록한 가르침이 아니란 말이다. 원문을 이해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글자의 원래 의미를 파악하는 것부터 살펴보자면, 양쪽의 명제 모두에 사용된 핵심어라고 할 수 있는 ‘허물 과(過)’의 의미가 앞의 것과 뒤에 것이 다르다는 사실부터 깨우칠 필요가 있다.
앞의 명제에 사용된 過는 ‘자기도 모르게 잘못을 저지르는 過失을 뜻하거나 中道를 얻지 못하는 過中’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고의로 이치나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罪惡과는 다른 이른바 법적용어로 사용되는 ‘미필적(未畢的)’ 고의에 해당한다. 뒤의 명제에 사용된 過는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罪過(죄과)’를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이 장을 해설하면서, “잘못해서 中道를 잃은 자가 그 잘못을 고쳐 중도를 얻는다면 이를 罪過라 할 수 없겠지만 만일 그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를 罪過라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이 장에 대한 주자의 주석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허물이 있으나 능히 고치면 허물이 없는 데로 돌아올 수 있다. 오직 허물을 고치지 않으면 그 허물이 마침내 이루어져서 장차 미처 고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매번 강조하는 바이지만, 공자는 허망하게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철학을 추구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지극히 현실주의를 반영한 그의 가르침에는, 사람에게 잘못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완결무결주의식의 가르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실수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고 그렇기에 이미 예상된(?) 사건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공자의 가르침에 방점은, 잘못을 저질렀다하더라도 그 잘못을 고치는 ‘改過(개과)’에 더 큰 무게를 두었다. 그중에서도 그 잘못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 그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좀 더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수양을 중시했다. 앞서 공부했던 ‘옹야(雍也) 편’에서 공자는 죽은 안연(顔淵)을 칭찬하면서 그가 삶을 통해 보여주었던 ‘不遷怒 不貳過(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거듭하지 않았다)’라는 태도를 칭찬의 근거로 제시한 바 있다. 또 ‘학이(學而) 편’의 8장에서 공자가 ‘過則勿憚改(잘못을 저질렀다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고 가르친 것은, 잘못을 저지른 사실을 깨닫는다면 지체 없이 고치라고 권면한 것이다.
이 장이 어려운 이유는 역시 여덟 자에는 담겨 있지만 분명히 여덟 자만으로도 앞에 생략된 것과 뒤에 생략된 행간의 의미가 매직아이처럼 보이는 자들에게는 명확하게 떠오르는 구조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무슨 말인지 의아한가? 매일같이 2년에 가까운 시간 매일같이 <논어 읽기> 공부를 함께 해왔다면 이제 당신도 어렴풋하게나마 눈에 보이기 시작해야 하는, 너무도 당연한 전제와 결론이 이 장의 가르침의 앞 뒤에는 분명히 달려 있다.
두 명제로 이루어진 이 장의 가르침의 첫 번째 전제는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행위’를 지적한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하게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행위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허물이 무엇인지 원인을 아는 것이다. 자신의 허물이 무엇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을 고치는 일은 고사하고 자신이 허물을 저지른 것조차 모르고 당당히 고개를 쳐들고 뭐가 문제냐고 되물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장의 해설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앞의 명제에 사용된 ‘허물 과(過)’를 미필적 고의라고 설명한 것이다. 자칫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행위라고 하면 그 허물이 의도된 것이 아닌가 헷갈릴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 자신의 사욕(私慾)을 앞세워 과감하게(?) 저지르는 자들의 행위 또한 넓은 범위 안에서는 포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필적 고의라고 앞에 사용된 ‘과(過)’를 규정한 것은, 자의적 악행을 한 이들은 그것을 허물이라고 인정조차 하려 들지 않기 때문임을 이중으로 꼬아서 후려친 고급어법이 담겨 있음을 읽어낼 수 있는 이들만이 읽을 수 있도록 안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장의 가르침은 과정을 강조하여 그 몸통만 던져준 방식이다. 허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한 수많은 케이스별 전제는 모두 행간의 깊숙한 곳에 차곡히 담겨 있다. 그것이 이제까지 공자의 가르침을 공부한 자들에 대한 공자의 살뜰한 배려라면 배려되시겠다.
가장 기초적인 것은 무엇을 허물이라고 볼 것인가에 대한 시비(是非)를 가리기 위한 공부일 것이고, 그 단계가 조금 올라가 중급정도가 되면, 그 기준이 어느 수준에서 확고부동하며 어떤 경우에 케이스바이케이스로 변용적 적용이 가능한가에 대한 응용 편이 될 것이며, 더 높은 경지에 오르게 되면 그것을 상대방이 불쾌하지 않도록 일러주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게 할 것인지 그리고 나 자신은 그 수양과 실천을 평생에 걸쳐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실행 편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바로 어제 이전 장에서 공부한 도(道)라는 다소 애매모호할 수 있는 지향하는 바의 경지가 알아서 사람을 넓혀주고 고양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만이 그것을 키우고 넓혀 크게 만들 수 있다는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이 장의 과정에 맞닿게 된다. 길을 넓히고 키우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실수들이 자의든 타의에 의해서든 벌어질 것인가? 공자는 어쩌면 당연히 직면하게 될 그 실수와 의도되었든 의도되지 않았던 허물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그것을 순연히 인정하고 어떻게 고칠 것인가에 주목하라는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위령공(衛靈公) 편’의 전반부에 걸쳐 계속해서 이어져 나온 ‘자성(自省)의 중요성’과 다시 뫼비우스의 띠처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대부분의 인간은 다른 이들의 허물은 가장 먼저 발견하고 비난하고 비아냥거리며 일이 잘못된 것을 그 탓으로 돌리면서도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는 인색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공자는 무엇보다 자성(自省)만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회를 올바름으로 이끌 수 있다고 일깨워준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발견하고 지적하고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쉽고 간단한 일이지만, 그 다른 사람은 언제고 나일 수 있는 것이고, 혹여 내 잘못한 부분이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안일한 생각 자체만으로 똑같은 실수는 벌어질 수밖에 없는 개연성을 사전에 담보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같은 구성원이었어도 그러할 것이고, 그 조직을 이끄는 리더였다면 조직을 구성하는 구성원의 실수를 커버하고 그것을 예측하지 못한 것도 잘못이고 허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정 위대한 리더들은, 결코 잘못된 결과에 대한 원인으로 팀원들이나 외부의 요인을 핑계삼지 않았다. 그들이 위대한 리더였기에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하고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기에 위대한 리더일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수차례 확인해 왔다.
그렇게 허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배움과 공부는 지식과 경험을 통해 그것을 구분하는 안목을 갖추게 하지만, 이 장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결국 그런 안목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인정하지 않고 고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허물(過)’로 낙인이 찍히고야 만다. 그다음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그래서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가 이 장에는 생략되어 있는 듯 행간에 또렷이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허물이 생기는 것 자체는 불가피한 것이라 이미 인정한 공자이기에, 그 과정 이후 더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허물이라고 판단된 순간, 바로 그것을 순연히 인정하고 고치면 된다는 실천의 무게를 이 가르침의 말미에 담아 넣은 것이다.
조금 복잡하게 설명하자면, 이 장에서 공자는 ‘진정한 잘못(허물)이 무엇인 줄 알겠느냐!’라는 화두를 배우는 자들에게 던진 것이다. 잘못이 발생하는 것은 인간이기에 불가피한 것이라는 용인 범위까지 이미 일러준 것은, 중요한 것이 잘못 자체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문제는 잘못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판단한 직후, 인간이 벌이는, 해서는 안될 진정한 잘못으로 확정되고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찍혀버리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국정조사를 한답시고 국회의원들이 관련 피의자 및 증인들을 불러놓고 국회에서 진실규명을 소리 높여 외치며 카메라 앞에서 다양한 연기를 선보였다.
그야말로 가관도 아니었다. 이미 대통령의 비호(?) 아닌 비호아래 자신들까지는 특수본에 피의자신분으로 끌려가지도 않았으며 끌려갈 일도 없다고 확정한 서울경찰청장과 경찰청장은 전 국민들에게 중계되는 카메라 앞에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정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주말저녁이라 자신이 술을 마신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며 후안무치하게 되묻는 작자를 보며 썩은 경찰조직의 일원들은 과연 우리 조직의 간부로구나하며 자랑스러워했을까?
당일 근무도 아니었다며 비번이었는데 현장으로 달려갔음에도 구속영장이 청구된 소방서장에 대해 발끈하던 소방관들은, 실제로 당일 책임관으로 분명히 근무가 기재되어 있던 사실을 정말로 몰랐을까? 그러한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카더라 식의 지껄임을 취재랍시고 보도했던 언론사 기레기들은 나중에 특수본 대변인이 ‘주말이라서 그냥 평소에 쓰던 비번이라는 용어를 쓴 것 같다.’라는 말을 옮기며 뇌나 양심에 아무런 자극이 가지 않았을까?
이미 수차례 핼러윈 시기의 이태원 안전문제에 대해 코로나 이전에서부터 수년간에 걸친 경찰의 대응 문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 간부라는 작자가 버젓이 카메라 앞에서 국회의원의 첫 질문에 ‘이태원에서 핼러윈으로 인한 안전논의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구체화된 바 없다’는 헛소리를 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경찰 내부에서 이미 그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문건으로 작성된 사실조차도 참사가 터지고 일이 커질 것 같아지니 바로 보고서가 덜미를 잡을까 싶어 삭제하라고 지시하는 정보계열의 경찰 간부들이 정말로 ‘민중의 지팡이’라 불릴 수 있을까? 그들이 잘못이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 그들은 그 잘못을 인정하고 고쳐야 할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수양이라고는 경찰복을 입기 훨씬 이전부터 갖춰지지 않은 족속들이었다.
경찰조직의 간부라는 작자들이 서로 자기 몸 하나 보전하겠다며 기동대를 이미 요청했었다, 아니 그냥 지나는 말로 나왔을지는 모르겠지만 구체적으로나 공식적인 요청은 없었다,라는 둥 그들의 자식을 앞에 두고도 그런 발연기를 할 수 있을지 참으로 한심스럽기 그지없는 장면이 여전히 연출되고 있었다.
상황관리를 해야 하는 간부가 상황실에 한 번도 나가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적당히 컴퓨터로 소일하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상황실에 뛰어나가 지휘하는 것이 서울경찰청의 관례였다는 자백 아닌 자백을 하는 것만으로도 경찰조직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얼마나 구석구석 정치꾼들만큼이나 썩어있고 곪아 터져 있는지를 여실히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북한의 무인기가 서울 상공을 버젓이 비행했다는 사실에 우리 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할 판에, 그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여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게 하려는 자들은 여지없이 등장했으며, 전 정권에서 이미 창설하여 운영되고 있다는 드론 부대를 새삼스럽게 창설하라 명령 내리겠다며 이전 정권이 안일하게 대북대화에만 치중하여 이런 문제가 생겼다고 호들갑을 떨어대며 선전하는 철딱서니 없는 군통수권자를 보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수십 년간에 걸쳐 외교부 산하기관의 공공기관에서 채용비리가 이루어졌다며 제보했더니 그 사실을 인지한, 외교부 감사실 외행원, 감사원 조사관, 국민권익위 채용비리근절단 국장, 서울경찰청 반부패수사대 경위, 공중파 사회부 기자, 국회의 외통위 국회의원, 강남에서 의원직을 겸직하고 있는 외교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한 사람조차 그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바로잡겠다는 이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신년벽두부터 어퍼컷을 휘두르는 대통령은 고질적인 채용비리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팔을 걷어붙이고 대대적인 먼지떨이를 하겠단다. 행여 그것이 노조를 조지듯 자신들에게 눈엣가시인 조직에 한정된 것이 아니기를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