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수를 생각하고 기만할 시간에 그저 더 배워라.

그렇게 해봐도 유익한 것 하나 없었다고 말씀하시지 않냐?

by 발검무적
子曰: “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以思, 無益, 不如學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내 일찍이 종일토록 밥을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서 생각해 보니, 유익함이 없었다. 배우는 것만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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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은 앞서 ‘위정(爲政) 편’의 15장에서 공부했던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두워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의 확장판에 해당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무슨 근거에서 이전 장의 내용과 바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단언하는 설명부터 내놓는지에 대해서는 이 장이 일깨워주고자 하는 가르침의 정수를 이해한 주자가 바로 아래 주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는 자를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반드시 求(구, 탐구)하려고 하는 것이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 스스로 아는 것만 못하다.


실제로 원문에 ‘종일토록 밥도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조차 자지 않으며 생각해보았으나 유익함이 없었다.’라고 과장하여 강조한 것은 문장의 마지막에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앞서 ‘위정(爲政) 편’에서 경계라고 했던 배움과 사색 두 가지 중에서도 사색만으로 경도되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방점을 두어 배움에 무게가 조금 더 실려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위정(爲政) 편’에서 나누어 설명한 바와 같이 공자의 지식을 완성하는 방법은 배움과 사색을 병행하는 ‘學而思’의 방법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공자가 언급한 배움과 사색으로 완성되는 지식론에 대해 주자는, 사색의 의미를, 자기 마음에서 탐구해 나가는 ‘求諸心’으로 풀이하고, 배움의 의미를 일을 익히는 ‘習其事’라는 의미로 풀이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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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앞서 ‘위정(爲政) 편’에서 동일하게 균형을 강조했던 배움과 사색 중에서도, 이 장에서는, 통합적 의미의 학문을 완성하는 데 있어 기본이 되는 ‘배움’에 좀 더 무게를 싣고 강조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위정(爲政) 편’의 균형 있는 수양방식에 대해 강조하여, 사색만 하고 익히지 않는 것도 한 가지 폐단이요, 익히기만 하고 사색하지 않는 것도 한 가지 폐단이라 했던 가르침은 물론 불변의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에서 배움에 더 방점을 찍은 공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다산(茶山; 정약용)은 이 장을 해설하면서 공자가 학문에 더욱 비중을 두는 말을 하게 된 데에는 무언가 모종의 그럴만한 사건이 있었기에 그랬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짐작한 바 있다.


똑같은 문제의식으로 고개를 갸웃하던 배우는 이들에게 이 씨(李郁(이욱))는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공자의 의도를 풀이한다.


“夫子(부자)는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은 자가 아니요, 다만 이 말씀을 남겨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을 뿐이다.”


공자가 배움과 사색에서 배움을 조금 더 강조한 것 같아 보이는 이유는 사실 두 가지 중의적 의미로 포장되어 있다. 그 첫 번째는, ‘위정(爲政) 편’을 공부할 때도 설명한 바 있지만, 배움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사색할 거리 자체가 마련될 수 없다. 배우지 않은 상태는 아무런 재료가 없는 상태와 같다. 재료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겠다고 구상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사상누각(沙上樓閣)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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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사실관계조차 파악할 수가 없다. 사건의 진상을 아는 것 역시 직접 보고 듣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온전한 나의 정보이자 지식이 될 수 없는 것은 배움이 왜 가장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작업인지를 일깨워주는 순간이다.


어느 한쪽의 말만 듣거나 사실에 대한 크로스체크를 통한 객관화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는 부족한 정보와 경도된 판단이 사실관계를 온전하게 하지 못하여 그릇된 결론을 도출하거나 성급한 실수를 만들어버리는 원인을 제공하기 마련이다. 특히, 감정에 휘둘려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 또한 감정이 앞서서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제대로 그 사안을 파악하고 알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어설프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기만 하고 사색하지 않는 것이 위험한 단계이기는 하지만, 그 단계는 최소한 뭔가 배운 것이 있다는 전제를 한 권계인 것이고, 사색만 하고 배우지 않는 경우는 무수히 생각만이 일어날 뿐 그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검증하거나 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들에 대해 궁구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의미를 부여받는다. 단순히 지식을 갈구하고 궁구 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게으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더 심각한 경우는 감정에 휘둘려 명확한 사실관계를 다각적으로 크로스체크조차 하지 않거나 사욕(私慾)으로 인해 진실 따위나 시비(是非)를 가리는 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외면하는 선택을 과감하게 해 버리는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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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가르침은 언제나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의미로 갖추고 있는 경지의 눈높이에 따라 깨달음의 정도와 내용을 다르게 도출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한 사실들을 종합정리하여 분석해 보면, 모든 수양의 기초이자 기본이 되는 배움이 전제되지 않은 채, 그저 공허한 사유만 지속하는 행위가 얼마나 말도 되지 않는지를 설명하는 형태보다 그 행위 자체가 사욕(私慾)에 의해 의도된 지극히 위험하고도 지탄받아 마땅한 행위임을 공자는 이 장을 통해 역설한다.


공자에게 지식을 쌓는 것이 결국 배움과 사색의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진정한 학문의 길은 수양과 실천으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수순은 현실에서 배치되고 뒤틀리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을 공자는 평생에 걸쳐, 특히 자신의 조국을 떠나 제대로 된 군주이자 자신과 함께 도를 도모할 수 있는 동지이자 둥지가 되어줄 위정자들을 만나며 사악한 본성만에 남아버린 추악한 인간의 민낯에 절망하고 탄식했다.


공자가 탄식했던 것은 배우기를 싫어하는 게으른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많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웠다고 하는 자들이 배운 것과 실행이 하나의 방향으로 일치되지 못하고, 책에서 배운 것과 현실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스스로 한계를 긋고 같잖은 변명을 입에 달며 자신의 사욕(私慾)을 채워나가는 모습에 좌절하고 절망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장에서 강조하는, 배우지도 않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무런 유익함이 없었다는 자기 고백적인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기 고백적 어투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공자가 직접 그것을 해보았음을 토로하는 방식으로 말해주는 것은, 부족하고 잘못한 이들을 비난하고 훈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울림이 크다. 다산(茶山)이 공자가 개인적으로 무언가 그럴만한 일이 있었기에 이런 말을 했을 것이라 짐작했던 근거도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사욕(私慾)만을 생각한 나머지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고 고민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묵직하면서도 매서운 일침과도 같은 죽비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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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사실을 두고서도 이익을 달리한다는 이유만으로 전혀 다른 입장의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이 날 선 대립을 하는 것은 하루이틀 보아온 문제가 아니다. 위인이라고, 가문의 훌륭한 선조들이라고 언급되는 높은 벼슬깨나 했던 이들이 조선시대 당쟁에서부터 이미 하루가 멀다 하고 당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말도 안 되는 대립을 보인 것은 버젓이 역사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공자의 시대로부터 수천 년이 지났고, 조선시대의 당파싸움으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최첨단의 시대이지마나 그러한 모양새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현재, 우리의 일상에서도 그러한 황당한 일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분명히 자신이 잘못을 하고서도 그저 밀리기 싫어 사과하기 싫다며 막무가내로 부정하는 유치원 아이들에서부터, 자신의 실수로 인해 지금 자신의 지위가 흔들려 부와 명예를 손실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있는 사실을 숨기고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거짓말도 아닌 시대이다.


혼자 있던 아이가 물건을 깨뜨린 정황이 찍힌 CCTV 영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울며불며 혼신의 발연기로 자신의 결백을 믿어달라고 억지를 부르며 자신이 그러지 않았다고 우길 때, 그 아이의 부모나 선생은 당연히 아이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치욕이거나 패배가 아님을 가르쳐준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빨리 인정하고 상대에게 사과하고 그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는 것이 나은지에 대한 대안을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현명한 부모이고 선생의 도리임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자식을 그렇게 키우지 않으려 하겠는가?


그런데, 정작 거짓말의 수준을 뛰어넘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부인하고 사실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경찰들을 우리는 이번 이태원 참사를 통해서 또 보게 되었다. 가장 많은 비밀이 모두 담겨 있는 핸드폰을 절대 수사기관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점과 실제로 비밀번호를 걸어서 알려주지 않아도 법적으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검사출신의 법무부장관은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비밀번호를 걸지 못하게 하려는 다른 검사와 몸싸움을 하면서까지 비밀번호를 걸고 자신의 비밀을 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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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물이 그러한데 아랫물이 맑을 리가 있겠는가?


핼러윈 당시의 위험에 대해서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보고서 자체를 없애야만 자신들이 형사처벌을 받는 근거가 없어진다는 수사상식을 꿰뚫고 있던 경찰들은 가장 먼저 그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카메라 앞에서 최대한 초췌해 보이는 발연기에 몰입하던 구청장은 그 바쁜(?) 와중에도 측근을 시켜 단톡방에 ‘떼법도 아니고 국민정서법에 걸려서 구속까지 되었다’며 사상범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그녀와 그녀의 보좌진이 한꺼번에 핸드폰을 바꾼 사실이 적발되고 그것이 증거인멸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구속까지 이루어진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그저 핸드폰이 잘 작동하지 않아서 교체한 것일 뿐이라는 변명도 잊지 않았다.


언론을 통해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핸드폰을 바꾼 것은 그녀 혼자가 아닌 그녀의 보좌진들까지 포함된 고위직 복수의 인물들이었고, 심지어 개중 하나는 화장실에 핸드폰을 빠뜨려 바꿀 수밖에 없었다는 블랙 코미디까지 찍은 뒤였다.


그들은 버젓이 잘못을 저지른 자신의 자식들을 가르칠 때,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너의 자존감을 지키고 싶다면 굳이 진실을 끝까지 밝혀 너의 자존심을 상처 내지 않을게. 진범은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하자.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했을까?


전 정권에서 법무부장관을 하려다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며 자신의 잘못 보다는 자신의 피해에 포커스를 맞추며 고난을 겪고 있는 순교자 코스프레를 하는 이도 그렇지만, 검사출신에 법무부장관이 되기 전부터 자신의 처형 자식들과 자기 딸까지 미국의 명문대에 보내겠다고 저지른 부정에 대해 ‘그걸 구체적으로 입시에 사용하지는 않았으니 (형사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라고 하는 변명을 들으며, 그가 과연 검사였을 때, 범죄 증거가 오롯이 담긴 핸드폰에 비번을 알려줄 수 없다는 피의자에게 상냥하기 그지없이 대했을지, 이후 다른 범죄자들이 현장의 검사들에게 현 법무부장관처럼 내 사과폰의 비번을 알려줄 수 없다고 버틴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어떻게 말할지 심히 궁금하여 죽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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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과연 그들이 덜 배우고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나는 여기서 공자가 지적한 사색의 스펙트럼을 확장시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이 본래의 사색인 것에 반해, 이 장에서 공자가 비판하고 있는 더 배울 생각을 하기보다 공허한 생각에 빠져있다는 것은 바로 그 생각이 이제까지 자신이 배운 것을 최대한 이용하여 어떻게 하면 사욕(私慾)을 채울 수 있는지 끊임없이 꼼수를 생각하고 궁리하는 행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법전만 보면, 이렇게 완벽하고 정의로운 법이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이 집행되면서 판결받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사회일수록 부조리가 심한 것임은 굳이 사회학자나 법학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알 수 있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 국민이라는 이름대신 개돼지라 불릴지언정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조차 모르지는 않는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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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안다면 어떻게 하라 배웠는가? 배운 대로 행하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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