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가에 대한 공자의 대답.

결국 그 모든 것의 기준도 스스로 정하는 것임을 깨닫기를.

by 발검무적
子曰: “巧言亂德, 小不忍則亂大謀.”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공교로운 말은 德을 어지럽히고,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 계책을 어지럽힌다.”

이 장에서는, 앞서 ‘학이(學而)편’의 3장에서 나왔던 “巧言令色(교언영색)은 鮮矣仁(선의인)이니라.(말을 잘하고 얼굴빛을 잘 꾸미는 자 가운데 어진 사람이 드물다)”로 유명한 ‘교언(巧言)’에 대해 다시금 언급하고 있다. 뒤이어 다른 가르침도 병렬하여 설명하였는데, 그 두 가지가 분리된 각기 다른 가르침이라고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도대체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듯한 이 두 가지에 대한 권계가 어떤 연관으로 서로 이어져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초심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설명한다.


공교로운 말은 옳고 그름을 바꾸어 어지럽히니, 이것을 들으면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는 바를 상실하게 한다. ‘小不忍(소불인)’은 婦人(부인)의 仁(인)과 匹夫(필부)의 勇(용)과 같은 것이 모두 이것이다.


위 주석의 핵심은 ‘지키려는 바’에 있다. 이 장의 가르침에서는, 배우고 익혀 수행하는 자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그 지키려는 바를 방해하고 무너뜨리는 요소에 대해서 외적인 요소와 내적인 요소를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교언(巧言)에 대해서는 이미 ‘학이(學而) 편’에서 그 해악(?)에 대해 충분히 언급한 바 있다. 이 장에서의 의미에 대해 굳이 그 단어의 의미를 번역하자면, ‘번드르르하게 꾸미는 말’이거나 ‘말을 꾸미는 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역시 그 행위의 목적이다. 말을 언제 번드르르하게 꾸미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단어의 의미는 보다 명확해진다.


학교에서 친구 사이에 이간질을 하기 위해 없는 말을 만들고, 직장에서 동료 선후배를 모함하기 위해 진실이 아닌 말로 교묘하게 꾸며대고, 가족친지 간에 만나서 그 자리에 없는 이에 대해 비난하고 없는 사실이 진실인양 말을 만들어내는 것,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사욕(私慾)을 채우기 위해 이루어지는 사특한 행위이다.

눈에 보이는 이익을 챙기기 위함은 물론이거니와 자기만의 심리적인 만족이나 사악한 본능에 입각하여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통해 상대적으로 행복감을 느끼려는 지저분한 마음까지, 그 모두는 사욕(私慾)의 범주에 포함된다.


간혹 몇몇 해설서에서는 이 장의 첫 명제에 대해 그런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정 지어 사용하고 있는데, 공자의 어법이 늘 그렇듯이 이 표현은 중의적으로 그런 행위를 하는 자는 물론이거니와 그런 행위를 갖게 만드는 마음속에 담긴 사악하고 작은 본능의 꿈틀거림을 통칭하고 있다.

그래서 주자의 주석에서 말하는 ‘지키려는 바’는 첫 번째 명제의 덕(德)을 의미함과 동시에 덕을 갖춘 이들을 방해한다는 의미로도 확장된다. 스스로가 덕을 갖추려는 노력과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에 대해 질시하고 공격하려는 소인(小人)들의 방해는 언제나 그치지 않는다. 더 위로 올라가고 더 훌륭한 덕(德)을 갖출수록 그와 같은 외부의 질시와 내부의 작은 욕구는 부지불식간에 커져가고 거침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큰 목적을 이루고 지키는 것에 있어 작은 일을 참지 못해서 모든 것을 망쳐버리게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는 것이 두 번째 명제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이 내용은 앞서 공부했던 ‘안연(顏淵) 편’의 21장에서 “하루아침의 분한 마음으로 인해서 자신을 잊어서 그 화가 어버이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 미혹됨이 아니겠는가?”라고 일갈했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위 주석에서 주자는 이 두 번째 명제에서 말하는 작은 일을, 작은 것이라고 하여 차마 하지 못하는 경우와 하찮은 일을 참지 못하는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상세히 풀이했다. 차마 못하는 마음이 지나쳐 일을 결단하지 못하는 결정장애(?)와 같은 우유부단함을 婦人(부인)의 仁이라 설명하고, 하찮은 일을 참지 못해 지나치게 과감한 것을 匹夫(필부)의 勇(용)이라 설명하였다.


비유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대명사를 사용한 이 주석의 설명방식에 대해 남성과 여성을 성적으로 차별지어 한 말이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을 투영시킨 오독(誤讀)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주자는 그저 내부적인 두 가지 변화의 요인을 음과 양으로 대비시켜 표현한 것뿐이다. 중요한 점은 그 두 가지 원인이 大事를 실행할 큰 계책을 어지럽혀서 결국 그 大事가 완수되지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이 장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있어 공자가 설명한 두 가지 명제가 어떤 유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풀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그것은 표면적인 1차적인 문제일 뿐 더욱 중요한 것은 과연 공자가 설명한, 참지 못해서 안 되는 그 작은 일이 무엇이며 크고 작은 일을 가르고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과연 참고 무시해버릴 수 있는 작은 일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주자는 일찍이 그 경계와 기준이 될 수 있는 개념의 단초로 ‘수치(羞恥)’를 들어 설명하였다. 즉, 부끄러움을 감내해야 할 경우라면 참아야 하는 것이고 진정한 부끄러움이라는 판단이 들 경우에는 참아서는 안된다고 전제한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부끄러워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과 기준이 다시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야말로 이 장을 통해 공자가 강조하려던 바로 그 기준이다.


주자는 진정한 인내에 대해 설명하면서, “일에는 분명히 忍耐(인내)해서 안 되는 것이 있거늘 어찌 전적으로 인내만 배우겠는가? 인내만 배우게 되면 그 폐단이 구차하고 미천한 상태에 이르게 만든다”라고 하였다. 이 설명은 이 장에서 말한 작은 것이 아닌 참는 것만으로 넘길 수 없는 반대쪽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긋고 있다.


이미 첫 번째 명제에서 살짝 그 모습을 드러낸 ‘덕(德)’이라는 개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장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공통적인 메시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방식, 즉 공(公)의 영역에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사회정의(社會正義)’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공공의 기준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단순히 그것이 사회적인 것만이라고 단정 지어서는 오독의 여지가 다시 발생한다.


내가 오독의 여지라 지적한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인 법규나 규율처럼 사람들이나 사회적인 약속을 통해 개개인의 의식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과는 차별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공적(公的)인 영역은 위정자에 의해 규정된 형태가 아닌 개개인의 배움과 수양과정에서 확장되어 형성된 누구나가 그렇다고 인정할만한 ‘상식’과 ‘양심’의 영역을 의미한다.

개개인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사회공통적 상식의 영역이자 양심의 부분이라는 설명은, 개인수양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 곧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고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귀결로 이어질 수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이 공자가 강조했던 저 유명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간단명료하면서도 정작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자들은 많지 않았던 그 문구의 핵심에 다름 아니다.


왜 배우는가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배우는 행위에서 그치지 않고 개인의 삶 속에서 실천하고 그 실천하고자 하는 핵심행위의 목적이 사회를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하는 것에 있다는 공자의 가르침은 이미 그의 평생에 걸친 삶으로 충분히 증명되고 역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큰 공명(共鳴)을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 분개하고 어떤 일에 분노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일을 바로잡는데 힘을 기울이고 어느 정도까지는 그저 무시하고 넘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평생에 걸친 숙제이고 문제일 수밖에 없다.


걸려있는 경제적인 이익이 일정 금액 이상이면 매달리고 일정 금액 이상이 아니면 굳이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며 그것을 바로잡거나 따지고 분노할 필요가 없다는 일반인들의 눈높이도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처음 경제적인 이익으로 삼았던 그 금액의 기준을 과연 얼마로 정할지, 또, 그 경제적인 금액이 처음에는 작은 줄 알고 그냥 넘어갔었지만 나중에 그 파급효과로 인해 어마어마한 금액의 손실을 논할만한 문제였다면 그것 역시 판단한 사람의 책임이자 감당해야 할 몫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바로잡는 데 있어 얻게 되는 경제적인 이익이 얼마나 되는지를 산술 하는 것도 다소 세속적이고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지만, 우리가 겪는 대개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인 이익에 한정되는 문제 이외에도 개인적인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여 더 큰일을 도모하기도 전에 망쳐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장에서 공자가 설명한 두 가지 명제는 오히려 사안에 대한 진실성 여부를 흐릴 수 있는 외재적인 요인과 그 문제를 접하는 개인의 판단의 문제를, 인간으로서의 감정의 문제에 더 초점을 두고 그것이 사소한 듯 하지만 결국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과 문제는 결국 사람의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것에서 불거진다는 아주 작은 문제인 듯하면서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큰 문제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군주가 자신을 잘 보필하라고 선발한 인재를 두고 그를 질시하여 모함하고자 하는 간신이 군주에게 이간질을 하여 교묘한 말로 사실이 아닌 것을 꾸며냈을 때, 군주 역시 인간인지라 자신의 부족한 점을 파고들었을 경우, 그렇게 신뢰하고 믿어 의심치 않던 충신을 의심하고 자신의 사욕이 그 교묘한 말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만들어 관계를 무너뜨리게 되고 말게 되는 것은 결코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아무리 많이 공부하고 자기 수양에 매진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교언(巧言; 교묘하게 꾸며낸 말)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나중에 지나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당장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사람으로서 갖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통제하지 못하여 정작 자신이 목표로 삼은 큰 일을 이루기도 전에 일이 틀어지고 망쳐져 버리는 경우는 너무도 많다.

본인이 아닌 입장에서 냉정하게 바라보게 되면 그럴만한 일도 아닌데 싶지만 정작 내 일이 되면 눈이 뒤집히고 쉽게 흥분하여 평상시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일을 망쳐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망연자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왜냐하면, 세상사 모든 일은 결코 단순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쁜 놈들은 명백하게 나쁜 짓만 해서 그 증거를 형사나 판사의 코앞에 가만히 두고 자신의 죄를 반성하지 않는다. 군바리 대통령의 딸이었던 자를 앞세워 그 오랜 세월에 걸쳐 그녀의 뒤에서 국정농단을 했다는 그녀는 능력이 안 되는 자신의 딸을 버젓이 군바리 대통령 시절 그 대통령들의 아내들의 학벌로 유명했던 대학에 넣고 싶었고, 실제로 그녀의 딸 사랑은 그녀가 가진 돈과 권력으로 그 일을 어렵지 않게 수행했다.


그런 삐뚤어진 부모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 SNS를 통해 난도질에 가까운 비난을 내지르던 대학교수가 청와대에 민정수석으로 들어가고 정의를 부르짖으며 사법개혁을 완수하겠다며 법무부장관직으로 옮기려 할 때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당연한 정도로 인식되던 현대판 음서제라 불리는 부모찬스는 그에게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하는 것을 넘어 반대쪽의 어퍼컷을 내지르는 검찰총장출신의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트리거를 당기고 말았다.

말 한 마리를 사주는 것으로 유명 대학을 갈 수 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처럼 사람들에게 퍼진 적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유명대학의 졸업장을 받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그 말은 단순한 교언이 아니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가 다선의 국회의원으로 어느 사이엔가 정치 명문가 집안으로 변신한 지저분한 집안출신의 ‘능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하기 어려운’ 자식이 아버지의 지역구를 이어받아 자신 역시 다선 국회의원직을 거쳐 권력의 정점을 잡겠다고 여의도를 휘젓고 다니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된 것은,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다고 큰 그림을 보지 못하며 사회의 작은 듯 보이지만 빙산의 뿌리가 되는 그 부조리들을 눈감아주고 함께 이익을 누리겠다며 냅다 표를 던져준 개돼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돼지와 시대를 바꿀 수 있는 깨어있는 국민. 그것을 가르는 기준이 바로 이 장에서 말하는 판단의 기준임이 이제 조금 보이는지 모르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