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혈질의 완벽주의자가 대식가에 비만이어도...

음악의 아버지로 등극할 수 있다?

by 발검무적

1685년 3월 신성로마제국의 튀링엔 지방의 소도시에서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문 자체가 200년간 유럽의 명문 음악 가문으로 군림했던 워낙 대단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 역시 아버지나 형들의 영향을 받아 음악에 다양한 관심을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사촌 큰아버지한테서 오르간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교회 부속학교에도 다니면서 성가대원으로서도 활약하였다.

어려서부터 이른바 음악에 있어서는 확실한 영재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일찍부터 찾아온다.

9살에 되던 해, 어머니를 잃고 그 이듬해에 아버지를 잃는 불행을 맞게 된다.

이후 나이 차이가 꽤 있던 형에게 의탁하여 본격적으로 작곡의 기초를 배웠다.

이 형은 당시의 대 작곡가 요한 파헬벨의 제자였기 때문에, 그 역시 형을 통해 파헬벨의 양식을 배웠으며 그의 초기 작품에서는 파헬벨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난다.


어려서부터 이루어진 음악 영재교육에, 학교에서 라틴어와 루터 정통파 신학을 배운 그는 맏형의 집에서 당대 명 작곡가의 작품 사보를 매일 필사하며 공부해나간다.

서양음악의 기초를 만든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이야기이다.


그는 모차르트, 베토벤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음악적 업적을 이룩한 위대한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서양 음악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은 베토벤의 이 말로 설명된다.

"그는 Bach(실개천)가 아니라 Meer(바다)라고 불려야 한다
Nicht Bach, sondern Meer sollte er heißen."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 바흐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바흐보다 그 아들들의 명성이 더 높았다.

그만큼 바흐는 살아 있을 당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음악가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여러 가지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바흐가 라이프치히에 칸토르로 취직할 때 당시 명성이 높았던 작곡가 텔레만의 영입에 실패한 고용주가 "최고가 아니면 2류라도 뽑자"며 바흐를 뽑았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진다.

지금은 '음악의 아버지'이지만, 당시 그는 대놓고 2류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바흐의 인생 최고의 걸작 <마태수난곡>만 하더라도, 당시 연주 때 잠시(?) 호평을 받았으나 이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갔다. 그런데 바흐 사후 약 80년의 시간이 흐른 1829년, 라이프치히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던 작곡가 멘델스존이 정육점에서 고기를 샀는데 그 고기를 싸고 있던 포장지가 <마태수난곡>의 악보였다고 한다. 악보만 보고서도 바로 바흐의 작품임을 알아본 멘델스존은, 이런 대단한 곡이 사장될 수 없다며, 그것을 복원하여 세상에 다시 소개하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바흐는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게 된다.

정작 일반 대중들에게는 2류로까지 무시되던 바흐는 그나마 베토벤이나 멘델스존 같은 천재급 음악인들에게는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의 신경질적인 인상이 제대로 표현된 젊었을 당시의 초상화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는 지나치게 신경질적이고 다혈질의 완벽주의자였다.

젊은 당시 바흐는 처음으로 교회의 새 오르간을 시연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워낙 훌륭한 연주 실력을 선보여 반해버린 관계자들은 그를 정식 오르가니스트로 채용하게 된다.

음악가로서 그가 얻은 최초의 직장이었다.

특별히 어려운 일도 없어, 월, 수, 일요일 3일 정도만 하루 2시간 오르간 연주를 하고 소규모 합창단을 지도하는 것이 일의 전부였다.


문제는 그의 성격이었다.

그의 수준에서 볼 때 교회음악의 수준은 별로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관계자들은 그에게 좀 더 높은 음악 수준을 요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그의 날카로운 성격이 무난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

심지어 교회 바순 주자였던 요한 하인리히 가이어스 바흐에게 '이게 염소소리지? 악기 연주소리냐?'라며 연주 실력에 대해 핀잔을 주었다가, 그날 밤 앙심을 품은 가이어스 바흐가 각목으로 바흐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

바흐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바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들고 나와 그를 죽여버리겠다고 난투극을 벌이게 된다.

이 건으로 바흐는 법정에 서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음악 스타일과 원칙을 고집하는 바흐의 성향은 나이 들어서도 더 강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당연히 고용주들과 여타 동료 음악가들과도 갈등을 굉장히 많이 빚었다고 전한다.

시대와 상관없이 그의 음악을 연주하며 그를 이해한 음악가 중에서 유명한 요요마의 평가를 들어보면, 바흐가 어떤 음악가였는지 참고하는데 도움이 된다.


"모든 인간의 감정에 대해 동감을 잘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객관적으로 감정들을 그려낸다. 인간에 대해 이해하지만 간섭하지는 않는 작곡가다. 인간의 조건과 환경에 대해 과학적이라 할 정도로 연구를 많이 했고 상상력을 동원해 표현했다. 때로는 심각하면서도 톡톡 튀고 즐거운 것이 바흐의 음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바흐의 음악이 단지 클래식 음악 또는 바로크 시대 작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것 중 하나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흐는 엄청난 커피 애호가였다. 카페인이 그의 다혈질을 더 강화시켰는지도 모를 일.


앞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바흐는 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대중의 관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지워져 갔다.

바흐가 다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Johann Nikolaus Forkel)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 1802)』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 책 덕분에 그의 사후 50여 년 만에 전 유럽에는 바흐 광풍이 몰아닥치게 되었고, 대중들의 바흐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1827년 베토벤 사망 시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작성한 추도문을 보면 베토벤 이전의 위대한 음악가로 헨델,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가 언급된다. 당시 이미 바흐가 음악 사상 최고의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여기저기 흩어졌던 바흐의 악보가 다시 수집되고 앞다퉈 출판되었으며 앞서 설명한 <마태 수난곡>을 멘델스존이 복원하면서 제대로 바흐 열풍이 정점을 찍는다.


그는 엄청난 대식가에 비만이었다.

초상화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성격이 까칠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무엇보다 음악과 관련해서는 결코 어느 한 부분도 타협하거나 양보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다.

50세가 넘으면서 백내장으로 고생하였고, 수술이랍시고 안과의사에게 받았지만, 헨델을 장님 수준으로 만든 돌팔이여서 내내 고생하다가 6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음악 장르를 대표하는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음악을 하면서 2류 소리를 대놓고 듣는 것은 치욕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수준에서 볼 때 한심한 음악가들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지 못하고 독설을 내뱉는 그의 성격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특히나 종교와 관련하여 웅장하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어떻게 이런 음악이 단순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존 앨리엇 가디너

존 엘리엇 가디너는, 한 인터뷰에서 "바흐의 음악 속에 있는 것은 연주자나 청취자로서 우리가 들어가는 또 다른 세계라는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다. 가면을 쓰고 무수한 색깔의 환상의 세계로 내려간다."라고 말했다.

바흐의 음악은 신앙을 통해 만들어졌지만 신앙을 초월한다.

가디너도 바흐의 음악과 신앙에 대해 설득력 있는 지적을 한다.

크리스천이 아닌 가디너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바흐를 연주할 때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설득력 면에서 거부할 수 없다"라고 그는 인정한다.

"내 논리적인 마음이 '아니오'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내 영혼은 '이것은 전적으로 믿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하느님의 감각과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가진 사람으로부터만 올 수 있었다. 이것들은 우리 삶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열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클래식에 깊은 조예가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마음의 울림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그저 신경질적인 다혈질 뚱뗑이 아저씨가 만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바흐에게 있어 종교가, 음악이 어떤 것이었을지를 그의 음악을 들으며 상상해본다.

최소한 그에게 음악은 삶이었고, 그의 전부였다.

그가 음악을 작곡하고 그것을 연주하는 동안 그는 온전히 음악으로부터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연봉이 오르는 자리로 옮겨가면서도 가는 곳마다 사람들과의 부대낌이 적지 않았다.

그가 느꼈을 스트레스와 그를 음해하고 괴롭히는 말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정말 가관이 아니다.

그를 음해하는 이들은 그가 금녀의 지역으로 인정되는 성가대에 여성을 올렸다고 공격했고,

지나치게 현란한 기교로 오르간을 연주했다고 공격했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공격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그렇게 기록까지 남기며 바흐를 공격했을 것이다.

바흐는 제대로 음악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수준을 논하는 이들을 가만두고 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나는 바흐의 짜증을, 그가 느꼈을 분노를, 200% 이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그것을 음악을 만드는 것으로서 치유했음을 느낀다.

글을 쓰던 음악을 만들던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일단 내 기준에 흡족하지 않고서 내놓는 프로는 없다.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들은 1호 청자였다.

그 자신이 자신이 만든 음악을 통해 힐링을 한다는 것은 창작을 통해 자신의 가장 힘들고 지친 영혼을 달래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이다.


자신이 살아 있을 시기의 대중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결국 전문가들이나 천재라고 일컬어졌던 이들은 그의 음악을 조금만 들어보고서도 그의 음악이 천재의 그것이라고 공감했다.

전문가들이 알아주는 전문가중의 전문가.

그것이 바흐였다.


2살 연상의 6촌 누이와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13년간의 결혼생활 이후 그녀가 죽었을 때

그는 별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아니, 오히려 그는 그녀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여행 중이었다.

그가 돌아온 후 장례식 비용을 청구하려는 장의사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내에게 물어보시오."

그 답다.


당신은 어떤 것을 통해 당신의 아픔을 치유받는지 묻는다.

당신의 상처 받은 영혼을 위해 당신이 하는 행위가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꼬옥 잡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당신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글로 써서

이름 모를 이들이 브런치라는 공간을 통해 읽어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 어느 것이든 정답은 없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이 온전하게 치유되는 과정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 과정들이 가장 먼저 당신의 마음을 치유해줄 수 없다면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보인 후 공감을 받아야만 하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이 당신이 치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며 착각이다.


바흐가 음악을 만드는 과정이 즐겁고 행복했을 것이라 착각하지 마라.

글을 쓰기 위해 구상하고 글을 쓰고 고치는 과정이 즐겁다는 착각을 하지 마라.

모든 창작의 과정은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을 통과하고 나서 얻는 결과물이 자신의 마음을 움직일 때 그것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음악을 만들기 위함이었다면 2류 소리를 들으면서 바흐가 굳이 계속 작곡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수준이었다면 그는 당시 대중이 열광하는 음악 정도를 찍어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만족스러워할 만한 수준의 음악을 만들고자 노력하였고 그 고집은 죽을 때까지 꺾지 않았다.

다른 음악가들이나 돈이 많은 의사 등 전문직 제자들에게 적당히 립서비스를 해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천성일 수도 있었겠으나

그는 무엇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음악에 대한 기준이 확고했고 그것은 결코 적당히 거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술술 읽히는 글이 그저 좋고, 한번 보면 그냥 재미있는 것이 그저 좋은 것이라고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그저 저마다의 취향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결코 '최고'라고 하지 않는다.


최고를 목표로 하는 이에게 대중의 평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흐에게 그러했듯이 당신이 당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자 한다면 당신은 '실패'라고 하는 기준부터 다시 정립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인정할만한 것이 아닌 것을 남에게 내놓을 수 있을까?

당신의 마음이 움직이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의 마음을 향해 움직이라고 외칠 수 있을까?


실패했다고 당신이 쉽게 좌절해버리기 전에

도대체 무엇이 실패인지 당신의 기준으로 다시 생각해보라.

당신 스스로가 만족할만한 수준에 채 도달하지도 못했으면서 실패했다는 주변의 시선과 손가락질이 두려워 지레 고개를 파묻고 실패자 코스프레를 하지는 않았는가?


누구에게 물을 필요 없다.

가장 먼저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 누구보다 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는

당신 말고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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