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8년 5월 5일 프로이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당시 프로이센 내 유대인 차별 경향 때문에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루터교로 개종한 이력이 있는 변호사였으며 자유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자유주의적 사고를 많이 물려받았고, 특히 아버지가 17~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루소, 볼테르)에 관심이 있어서 그 영향도 크게 받았다. 정작 유대인 집안이었으나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개의치 않았으며, 루터교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3살에 김나지움에 들어가 라틴어, 희랍어, 작문, 수학 등에서 출중한 재능을 보였다.
또한 자유주의 성향의 스승들을 만나며 봉건주의와 전제정에 대한 반감을 키워갔다.
또한 사회개혁의 의지도 있어서 1835년 졸업 논문 <직업 선택에 대한 한 젊은이의 고찰>을 써서 "인류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김나지움 졸업 이후 법학 공부를 바라는 아버지에 뜻에 따라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거기서 그는 법학에 열심히 몰두했지만 곧 종교, 철학, 문학, 거기에 예술에 이르기까지지적 욕구가 광대하게 퍼지며 관심을 보였던 탓에 아버지가 그를 베를린 대학교 법학과로전학시켜버리고 만다.
방대한 지식욕구와 호기심을 채우며 그는 엄청난 지식을 흡수한 학자로 성장한다.
결국 철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언론인이라는 모든 타이틀을 갖춘 인문 과학자로,
전 세계적으로 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이,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었던 철학자이자 사회과학자 중의 한 명으로 손꼽는다.
바로,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의 이야기이다.
사회학, 철학, 정치학, 경제학, 역사학, 문화인류학, 사회복지학, 미술사학 등 수많은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 논문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학자이기도 하다. 2005년 영국의 방송사 BBC가 대중들에게 시행한 설문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꼽혔다.
사회주의의 창시자이자 공산주의를 정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현대 독일의 정치와 경제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독일 내에서도 가장 위대한 독일인 중 한 명으로 언급되어 위인으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순수 철학 및 역사학 그리고 스스로 전문적이라 했던 사회과학에 있어서
그의 이론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논란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큰 그의 학술사적 위치라 평가할 수 있겠다.
사탄 숭배자로도 알려진 마르크스는 그의 책 <자본론>을 다윈에게 헌정한다고 했던 다윈주의자였다.
간혹, '원조 빨갱이'라고 폄하되는 경우도 있지만, 근대 사회과학의 분과학문들을 새롭게 창시하였고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 등을 저술하였으며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말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은 인류 전체의 사상과 철학, 사회, 문화, 외교, 정치 등의 방향성에 대해 지대한 영향을 끼친, 말 그대로 대학자였음에는 아무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런 엄청난 대학자였던 그에게 과연 무슨 실패가 있었고 극복할 시련이 있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실제 마르크스는 공부는 잘했지만, 결코 모범생은 아니었다. 싸우고 다치기 일쑤였고 큰소리로 노래 부르고 돌아다니다가 대학 안에 있는 학생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흥청망청한 씀씀이 때문에 빚을 지기도 했다.
스물세 살에는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교수가 되고자 하였으나, 좌파적인 급진적 성향 때문에 좌절된다.
결국 그렇게 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데 자유 기고가로 활동하는 동안 좌경적(左傾的)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상을 표현하는 바람에, 결국 당국의 신문 검열을 받고 할 수 없이 파리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망명'이라고, 글은 이렇게 쉽게 적지만, 망명은 자신의 나라를 버리고 조국을 바꾼다는 말이다.
귀족 가문 출신의 아름다운 여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하여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 가운데 둘은 런던에서의 지독한 가난 때문에 일찍 죽음을 맞고 말았다. 그 후 사랑했던 아내마저 죽자 그는 좌절하고 병을 얻어 자신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알제리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에서마저 쫓겨난 마르크스는 벨기에의 브뤼셀로 가서 열일곱 명의 회원을 모아 세계 공산당을 창당했다. 이것이 또다시 문제가 되어, 그는 마지막 종착지인 런던에서 나머지 인생을 보냈다.
런던에서 그는 극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된다.
가구를 저당 잡히는가 하면, 한 번은 옷이 전당포에 잡혀 밖에 나갈 수조차 없었다.
빚으로 고생하다가 견디기 힘들어 마침내 파산 신고까지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최악의 마지막 조치를 막아준 사람은 평생 동안 그의 절친이었던 엥겔스였다.
마르크스는 그의 도움을 받아 필생의 대작인 <자본론>을 쓰기 시작해 1867년 제1권을 출판했으며, 제2권과 제3권은 그가 죽은 후 엥겔스에 의해 출판되었다.
노동자를 위해 빈부 격차를 없애려 사회와 맞서 싸운 경제학자였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아이러니한 삶을 살았던 마르크스.
런던에서 생활고를 극복하겠다고 철도원으로 취직하려고 했지만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과 엉망진창인 글씨 때문에 불합격하고 만다.
실제는 그는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의 분위기에서 자라, 낭비벽이 심해 가난하게 살았다.
특히 파산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행했던 사치와 향락의 파티를 했던 돈은 그가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않은 바로 그 아버지의 재산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준 예술작품을 팔려고 할 때 그의 어머니가 반대하자 엥겔스를 찾아가 "어머니가 죽는 게 더 나은 때가 온 것 같다"며 망언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거기다가 아버지 유산을 다 팔고 돈이 없자 역시 귀족 딸이었던 부인이 물려받은 유산(주로 예술품)까지도 다 팔아버렸다. 그래도 사치를 감당 못해 파산을 하게 된다.
그의 가난은 불가피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그의 생활패턴이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한 마디로 그의 경제관념은, 역대 경제학 관계자 중 최악이었다.
그래서 그는 태생이 부르주아였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절반은 강제적으로 프롤레타리아를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나라에서 살 수 없어, '망명'이라는 불가피한 선택을 하게 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런 고난을 겪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제학자이면서도 낭비벽으로 가난에 시달리고 파산신고를 한 사람 역시 거의 없다.
자녀가 죽어 관을 마련해야 하는데 외상으로 마련하지 못해 매장하는 상황에서도 돈이 생기면 여전히 철없이 사치를 부린 경제학자는 부자 친구 엥겔스의 도움을 죽은 후에까지 받아 겨우 <자본론>을 완간하게 된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그는 돈에, 그리고 환경에 그리 큰 구애를 받지 않았다.
어렵게 생활고를 벗어나겠다고 한 취업활동에 외모와 악필 때문에 떨어지고서도 그는 그렇게 집필활동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갔다.
오히려 말년에는 엥겔스가 마련해준 런던의 버젓한 집에서 여유 있는 집필활동을 하였다.
그가 매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성향이었다면 결코 해낼 수 없는 방대한 집필이었다.
당신의 부모가 많은 돈을 남겨주지 않은 흙수저라서
금수저들의 삶을 부러워하고
부모를 원망 아닌 원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금수저였다고 해서
당신의 삶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았을 것이라고
착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마르크스가 그러하였듯이 부모의 유산으로 부유해진 이들은결코 부를 계승하지 지속적으로 유지하거나 계승하지 못한다.
대개 자신의 노력 없이 부를 넘겨받은 후손들의 삶이그다지 유복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물려받은 부와 상관없이 자신이 받은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방대한 학문의 세계를 열었다.
그것은 막대한 유산의 덕분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 유산은 그의 삶을 지난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는 그래서 경제활동에 열성적이지 않았고
비슷한 성향의 낭비벽이 심했던 아내와 부창부수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그 버릇은 고치지 못했다.
결국 그의 지난한 삶을 분석해보면,
그가 받은 유산은 그의 삶에 플러스 요인이라고 할만한 것을주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신에게 부모가 남겨준 엄청난 재산이 있고 없고는결국 당신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큰 요건이 되지 못한다는 결론이다.
아니, 오히려 당신의 철없는 낭비벽만을 부추겨
제대로 된 경제관념을 갖추는 것에 저해만 될 뿐이라는 명확한 사례이다.
마르크스가 인정할지는 모르겠으나
마르크스는 헤겔이 대학교수로 있던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수많은 사상과 개념을 정립하는 수련기간을 가졌다.
그것이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마련해준 막대한 어느 유산보다 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돈이 없어 대학을 못 가던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니, 오히려 공부만 잘하면 돈을 받으면서 대학을 다니고 유학까지 갈 수 있는 시대이다.
당신이 금수저가 아니라서 강남 1타 선생님에게 과외를 못 받아성적이 그 모양이었다고 부모탓을 하려면당신은 애초부터 고 정도의 인간이었음을 인정하면 그만이다.
당신이 더 큰 인물이 되고자 한다면
당신이 지금 흡수하고 갖춰야 할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듯이배우고 익혀야 할 시기임을 명심하라.
당신의 젊음이 당신을 더 기다려주지 않는 것처럼
이제 당신은 젊음을 낭비한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마르크스는 돈을 낭비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지만
결코 시간을 낭비하거나 방만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자신을 업그레이드하였고자신이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했다.
그래서 대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금 같은 시간과 젊음을
의미 없이 낭비하며자신의 부모가 금수저가 아님을 탓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럴 쓸데없는 짓으로 낭비할 시간과 정력이 있다면당신의 삶을 업그레이드하는데 모두 쏟아부어라.